어른도 길을 잃는다. 지은이: 박정요 출판사: 창작과 비평사 1. 사장나무가 있는 마을 "행남아 행남아, 어서 나온나! 아 이누무 가시낭년, 빨리 나와 불 넘으란 말이다! 행남아 악!" 할머니가 듣지 않도록 조심조심 부르던 엄마가 그만 자제심을 잃고 벌컥 소리를 질렀다. 그예 날이 새고 만 것이다. "이누무 가시낭년, 정초부터 똥구멍에 해 비치도록 자빠져 있을래 응? 불 사그라지기 전 에 빨리 나온나 빨리. 할머니 역정 내신다 빨리!" 엄마가 내 몸뚱이를 마구 두드리고 흔들어서 일으켜세웠다. 나는 잠에 못 이긴 척 눈을 감은 채 따라나섰다. 불은 대문 앞에 지펴져 있었다. 왼손으로 꼰 새끼줄을 달아서 집안 구 석구석을 끌고 다니며 액막이를 한 피마자대와, 제남이가 겨우내 두 뺨이 얼어붙도록 날린 참연과 가오리연, 가짓대, 고춧대 같은 것을 태우는 불이었다. 불길은 사그라지기 직전이었 다. 나를 제외한 칠남매는 벌써 다 넘은 것이다. "행남이는 올해 몇살이냐." "열한살이라우." "그럼 열한 번 넘어야겄구나. 자 넘어라 어서." 정월 대보름날 새벽의 불 넘기는 해마다 할머니가 집전하는 종교 의식 같은 것이었다. 행 여 어느 구석 어느 틈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재앙과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한 액 막이인 것이다. 나는 불을 넘다가 숫자를 까먹었지만 제남이가 쪼그리고 앉아 잘난 척 큰 소리로 세고 있었기 때문에 별일은 없었다. "그래, 올해는 제발 늦잠 좀 자지 말고, 말 잘 듣고 무럭무럭 자라라." 할머니가 손을 탁탁 털며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덕담을 하자 지켜보던 엄마가 괜히 옷섶을 누르며 감읍하는 시늉을 했다. 겨우내 소한테 입혔던 가마니때기를 벗겨가지고 외양간에서 나오던 아버지도 유심히 건너다봤다. 나는 뭔가가 찔끔 오금이 저려서 슬며시 변소로 들어 가버렸다. 변소에 앉아 있노라면 흙벽의 살점이 떨어져나간 틈으로 온 집안이 한눈에 내다보였다. 아버지는 가마니때기를 새끼돼지 우리 위에다 바람이 들지 않도록 눌러 덮고 엄마는 우리가 넘었던 불찌꺼기들을 삽에 쓸어담고 있었다. 제남이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세숙대야에 손을 넣어 해찰을 부리고 큰언니는 어느새 숯불을 담은 다리미로 마루에서 옷손질을 하고 있었 다. 아버지가 마을 굿마당에 입고 나갈 한복이었다. 그런데 부엌에서 톡 튀어나온 다찌니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큰언니를 향해 큰소리를 마구 퍼부었다. 설거지 당번을 새로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돼지우리 쪽의 아버지와 닭장 쪽의 할머니를 재빨리 둘러본 엄마가 부삽 을 든 채로 쫓아가서 다찌니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아침부터 가시낭년이 큰소리를 내느냐는 빤한 훈계였다. 그럴수록 다찌니는 열을 받는 성격이었다. 팔딱팔딱 뜀을 뛰고 몸을 털며 왜 나만 때리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큰언니만 삐놓고 둘째언니는 두찌니, 셋째언니는 시찌니, 넷째언니는 니찌니, 다섯째 언니는 다찌니라 불렀다. 오빠와 제남이는 두찌나 시찌나 니찌나 다찌나 그리고 여찌나가 되어야 할 나한테 그냥 행남아, 하고 불렀다. 언니들은 밥을 가장 늦게까지 먹는 사람이 그 끼니의 설거지를 하기로 자기들끼리 약속을 해놓았다. 그래서 서로 눈치를 보며 후닥닥 후닥닥 밥을 먹다가 누군가 일어서면 질세라 너 도나도 숟가락을 내던지기 일쑤였다. 그중에서도 약삭빠른 다찌니는 밥 빨리 먹기 선수여서 설거지를 거의 안했다. 특히 저녁에는 물 만 밥을 씹지도 않고 후루룩 마셔버린 다음 밤중 에 따로 밥을 몰래 훔쳐다 먹었다. 그런데 니찌니는 쇠죽을 쑤고 큰언니는 옷손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제 저녁 대보름 차례상 설거지가 다찌니 몫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어제 저녁에도 설거지는 다찌니 몫이었다. 밥 먹는 중간에 아버지가 다찌니더러 할머니의 국물을 다시 데워오라고 했다. 할머니랑 가장 사이가 나쁜 다찌니는 금세 입이 오리처럼 튀어나오 더니 아직 저 모양이었다. 다찌니가 화가 나 있을 때는 나도 불리한 입장을 면할 수가 없었다. 다찌니는 화가 날 때 마다 동생들한테 괜한 트집을 잡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만만했다. 오빠와 제남이 는 우리 집의 천금같은 아들들이어서 백작 공작 같은 신분이지만 틈새에 끼여 있는 나야말 로 있으나마나 한 가시낭년, 강아지 다루듯 해도 아무 상관 없는 존재였다. 보름밥을 찌고 국물만 데운 아침밥상은 금방 차려진 것 같았다. 발이 저려서 연신 콧등에 침을 바르던 나는 식구들이 모두 안방으로 사라진 틈에 슬그머니 집을 나왔다. 다찌니의 심 기가 특별히 나쁘지 않다 해도 나는 밥상머리의 놀림을 면할 방법이 없었다. 어젯밤, 태어나 서 처음으로 우리 집 대표가 되어 보름밥을 얻으러 나갔는데, 밤새 골목만 쫓겨다니다 빈손 으로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골목마다 액막이로 듬성듬성 떠놓은 빨간 황토흙이 꽃무늬처럼 번져 있고 마을 울력으로 깨끗하게 쳐올린 고샅 또랑엔 어젯밤 누가 떨어뜨렸는지 김밥덩이가 풀어져 있었다. 맨발에 꿴 검정고무신이 얼음을 밟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지지만 나는 내처 골목을 올라갔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곧 지신을 밟고 걸궁을 칠 굿마당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른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온 하루의 시간을 벌게 되는 것이다. 어젯밤 자시에 동제를 올린 동네마당엔 차일이며 제상 덕석들이 아직 그대로였고 주렁주 렁 금줄이 쳐진 사이로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동제 때 함부로 뛰어다니거나 장난치 다 다치면 그대로 병신이 된다는 속설이 있는데도 어른들이 없는 틈을 참아내지 못했다. 하 지만 동네마당에 어른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명절인데도 꾸질한 누비 솜옷에 염소처럼 수염이 노란 춘희네 할아버지가 하늘을 향해 마구 삿대질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날 좀 잡아가거라! 이놈들아, 날 좀 잡아가거라!" 춘희네는 너무 가난해서 명절에도 보리밥으로 차례를 지냈다. 보리밥이 먹기 싫으니까 새 벽같이 동네마당으로 나와서 미치광이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삼 백육십오일 내내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6·25 때 춘희네 큰아버지와 막내삼촌을 한꺼번에 잃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날은 6·25 때 있었던 일을 구절구절 떠들며 날 좀 잡아가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사람들이 놀라서 슬슬 도망을 치기라도 하면 더욱 큰 소리로 떠들어 댔다. 명절이면 더더욱 화가 나서 떠드는 것이다. 춘희네 큰엄마인 한몰댁이 잿등 쪽에서 동동거리며 달려왔다. 한마을 우대미에서 같은 마 을 잿등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몰댁으로 불렸다. 마을에서 염소수염 할아버지가 어려워하는 사람은 딱 하나 큰며느리 한몰댁뿐이다. 꽥꽥 소리를 지르고 허공에 삿대질을 하며 성질을 부리다가도 한몰댁만 나타나면 조용해지는 것이다. "아버님, 허구헌 날 이러신다고 하늘이 한번 대꾸를 합디야 땅이라고 대꾸를 합디야. 괜히 목 메고 기운만 빠진께 제발 이러지 마시랑께라. 동네 우세 그만 하시고 얼른 가서 조반 드 십시다. 금방 굿차리고 나오믄 정신이 없어라아." 한몰댁은 을씨년스럽게 센 반백의 머리칼을 심란하게 쓸어넘기며 달랬다. 염소수염 할아 버지는 거짓말처럼 곧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내가 죽어야제, 어서 죽어야제. 늙은이 하릴없이 밥그릇이나 축내고, 아이고 내가 어서 죽어야 에미 니가 등을 펼 것인디." 배도 고프고 며느리도 어렵기 때문에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금세 풀이 죽어서 군말없이 따 라나섰다. 이럴 때는 꼭 오종종거리며 엄마 치마꼬리를 따라가는 아이 같다. 염소수염 할아 버지는 정말로 장날이면 동네 어귀 돌쩌귀에 걸터앉아 엄마 기다리는 아이처럼 장 보러 간 며느리를 하루 종일 기다리곤 했다. 동네마당엔 남자 아이들뿐이기 때문에 나는 여자 아이들이 더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 다. 원수 같던 검정고무신이 이럴 때는 하느님처럼 고맙지만 발이 시린 건 사실이었다. 발바 닥이 얼음장처럼 감각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살금살금 뚜껑례네 담벼락을 붙들고 걸어 보 았다. 용기를 내서 삽짝을 기웃이 들여다봐도 집안은 고요했다. 뚜껑례는 원통해서 밤새 뜬 눈으로 새우다 늦잠이라도 자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어쨌건 내 운동화밖에 알 바가 없었다. 있다. 운동화가 아니고 찌그러진 양푼이 마루 끝에 놓여 있었다. 그속에 제남이의 양재기와 함께 내 운동화도 들어 있을 것이다. 살금살금 걸어가서 살짝 들고 나올까 궁리를 하는데 변소에서 갑자기 컥컥 기침소리가 났다. 엿장수 총각이다. 그는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밤마다 사십대 과부인 뚜껑례의 안방으로 이사를 다닌다고 했다. 나는 십년 감수를 하는 바람에 심 장을 틀어쥐고 슬며시 담 뒤에 쭈그려 앉았다. 정말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나는 정말로 뚜껑례네가 그렇게 무서운 여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곤충처럼 목소리가 가느다란 점쟁이 여자의 이름이 바로 뚜껑례라 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저 운동화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흥분한 탓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름밥을 얻으러 다닌다는 사 실에 나는 그만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년의 가뭄 때문에 집집마다 형편이 어렵다며 엄마가 말렸는데도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가뭄에 흉년이라도 누구 굶어죽었다는 사람 없드라. 안 죽을 정도믄 풍습은 지켜야제." 할머니는 단호했다. 엄마의 한 마디엔 꼭 열 마디를 해줘야 하는 고집 때문이었다. 보름날 엔 아홉 집에서 얻어온 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먹어야 한다는 것도 할머니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다 큰 언니들은 창피하다면 고개를 저었고 오빠도 관심이 없었다. 당연히 모두의 시 선은 나에게로 몰렸다. 존재라곤 없던 내가 뜻밖에 우리 집 대표가 된 것이다. 할머니의 뜻 이라면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얼굴도 잘 쳐다보지 않던 아버지가 나 를 향해 특별히 당부하는 것이 그렇게 버거울 수 없었다. "개 있는 집은 들여다보지도 마라. 그러고 밥 안 준다고 대이고 깔따구 노래를 부르고 그 러믄 못써. 알아묵었냐?" "야." 못 미덥기만 하다는 듯 아버지는 몇번이나 당부했고 나는 모깃소리처럼 기어들어가는 소 리로 대답했다. 항상 내가 당신의 딸이라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것 같던 아버지가 특별히 단 속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제남이가 따라나선 것이었다. 팔남매의 맨 꼴지 막둥이인 제남이에게도 우리 집에서 가장 만만한 사람은 나였다. 오빠 는 우리 집의 막강한 신분인 장손이고 언니들은 나이 터울이 많아서 감히 어쩔 수 없엇지만 네 살 터울인 나한테만큼은 고추 달린 특권의식을 마음껏 누리려 들었다. 할머니처럼 우리 집에서 제남이를 이길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조그마한 양푼을 들고 제남이는 찌그러진 양재기를 들고 집을 나섰다. 우리는 우선 내 친구인 선희네가 사는 우대미부터 올라가보기로 했다. 선희는 물론 벌써 나가고 없었다. 결혼을 하자마자 남편이 돈을 벌기 위해 월남으로 떠나버린 선희의 올케가 부엌에서 빼꼼 내다보는데 밥 좀 달라는 소리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본등 우리 골목을 거쳐 아리대미 미란네 집으로 갔다. 미란이도 벌써 나가고 없었다. 미란네 고모 는 우리 큰언니랑 가장 친한 친구인데도 밥 달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선희와 미란이는 아마 밥 얻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쥐불놀이를 하러 간 게 틀림없었다. 나는 더욱 제남이 가 귀찮아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그만 밥 얻으러 다녀봤자 뒷날 자랑거리는커녕 웃음거리도 안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고 보니 더 이상 자신있게 들어가서 밥 좀 달라고 할 만한 집도 없었다. 아버지가 삼대 독자인데다 여자 형제도 광주에 사는 고모 한 사람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을에 친척 이 없었다. 나는 왜 밥 달라고 할 집도 정하지 않고 밥 얻으러 다닐 생각만 했는지 내 자신 이 아주 난처하게 생각되었다. "잿등 아지미한테 하자." 내가 자기를 떼놓고 도망칠까봐 처음부터 조바심을 내던 제남이가 짱구 굴리는 소리를 했 다. 잿등에 사는 아짐은 오빠의 양어머니였다. 오빠의 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 그 집에 이름 을 팔았던 것이다. 거기서는 틀림없이 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잿등으로 가려 면 다시 본등과 동네마당을 뺑 돌아야 했다. 아리대미에서 바로 잿등으로 올라가려면 방앗 간을 지나야 하는데 그 방앗간은 달밤에 도깨비들이 날장구를 치며 아이들을 유혹하는 어둠 의 소굴인 것이다. 우리는 다시 다리를 질질 끌며 골목을 돌았다. "그림자가 따라온다." 제남이가 느닷없이 볼멘소리를 했다. 생전 처음 밤길을 걷게 된 긴장과 흥분은 벌써 사라 져버린 음성이었다. 괜한 트집부터 잡는 것이 어지간히 춥고 다리도 아픈 모양이었다. 고작 세 집에 들르기 위해 온 마을을 다 돌았으니 다리가 아프기도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냥 돌 아갈 수는 없었다. 고작 밥 한 그릇을 얻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았다면 할머니는 뭐라고 할 것이며 언니들은 두고두고 나를 얼마나 놀려먹을 것인가. "그림자가 따라온단께!" "보름달이 떴은께 따라오제 바보야." "지금은 밤인디 워째 그림자가 따라오냔 말여." "달이 떴은께 따라온단께!" 내가 버럭 소리를 질러도 제남이는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밤마다 그림자가 어디로 갔느냐, 불을 켜라고 할머니를 못살게 굴더니 오늘은 나를 못살게 굴 모양이었다. 나는 그때 제남이를 그만 돌려보내고 친구들이나 찾아갔어야 옳았다. 동네마당에는 사장나무를 중심으로 치렁치렁 금줄이 쳐졌고 집채만큼 커다란 차일 안에는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얀 차일 위로 언뜻언뜻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비쳤다. 올해 동제는 그 어느 해보다도 정성을 다해야 하기 때문에 규율이 아주 엄격하다고 했다. 사십년 만이라고 도 하고 칠십년 만이라고도 하는 지난해의 그 지독한 가뭄이 계속되지 않도록 동제를 잘 지 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해 같았으면 동제를 잘 지내기 위해 우리 아버지도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하고 저 곳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는 돼지가 새끼를 아홉 마리나 낳는 바람에 아버지는 제주 의 자격을 잃고 말앗다. 집안의 소나 돼지 염소 같은 짐승은 물론 사람이 아기를 낳아도 부 정 탄다는 이유로 제주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찬물에 목욕하는 고생을 하지 않아서 차라리 잘되었다고 하지만 우리 들은 왠지 김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주 사소한 부정거리조차 경계하려고 몇날 며칠을 삼 엄한 몸가짐으로 지내다가 하얀 제복을 입고 엄숙한 동제마당에 서 있던 아버지는 얼마나 아름다웠는가 말이다. 아버지도 다소 풀이 죽은 것 같았다. 이왕 온 김에 나는 동네마당 양쪽에 붙어 있은 말집네와 뚜껑례네를 차례로 건너다보았 다. 사시사철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여 노는 동네마당에 붙어 있어서인지 두 집이 왠지 친 숙한 것처럼 느껴졌다. 말집네는 마을에서 가장 유명한 가난뱅이기 때문에 나는 우선 뚜껑례네 집으로 향했따. 뚜껑례는 신이 들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과부 점쟁이인데 밤마다 작은방에 사는 엿장수 총각 과 포개져서 잠을 자느라 아이들이 창호지를 뚫고 엿보는 건 물론 마당의 세숫대야를 걷어 차고 다니는 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언제나 입술을 빨갛게 칠하고 여치가 우는 것처럼 목소 리도 가늘어서 왠지 만만하게 느껴졌다. "뚜껑례네 엄마아, 밥 조옴 주시요오!" 단단히 용기를 낸 우리는 사립을 기웃이 들여다보며 약간 사정조의 이부합창으로 처량하 게 외쳤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우리는 다시 한번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뚜껑례네 엄마아, 밥 조옴 주시요옹!" 그런데 벌컥 문짝이 내던져지며 웬 옷감 찢어지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뭔 누무 새끼들이 밤새내 지랄이냐 말여. 이노무 새끼들 잡히기만 해봐라!" 기겁을 해서 도망치다 돌아보니 제남이가 그 자리에 선 채로 발을 구르고 있었다. 놀라서 양재기를 내쳐버린 모양이었다. 그대로 나뒀다간 뚜껑례네한테 금방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나는 양푼을 내던지고 돌아가서 제남이를 무조건 잡아당겼다. 그러나 제남이는 오히려 으아 악 울음통을 벌려버렸다. "으아앙, 내 밥그릇, 내 밥그르읏!" 드디어 고무신을 제대로 돌려 신은 뚜껑례네가 무얼 찾는지 뱅글뱅글 토방 밑을 더듬더니 긴 막대기를 쳐들며 쫓아나왔다. "누 집 새끼들이여! 너그들 누 집 새끼들이냐!" 나는 뚜껑례네가 그렇게 큰 소리로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잘못했어라. 잘못했어라우!"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너무나 무서운 나머지 발을 동동거리며 무조건 잘못했다고 소리쳤다. 그때였다. 바락바락 울어대던 제남이가 갑자기 발을 구르며 노래를 부 르기 시작했다. 깔다구야 깔다구야 올 여름 깔다구는 뚜껑례네 집으로 다 가거라 되야지 꼬리가 부른다아! 제남이가 훠이훠이 팔까지 내저으며 소리치자 뚜껑례네가 나는 듯 쫓아왔다. 제남이가 잡 힐까봐 나는 너무나 겁이 났다. 그런데 제남이는 나보다 잽싸게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그리 곤 다시 발작하듯 두 팔을 들어올렸다. 말똥구리 소똥구리 뚜껑례네 집으로 다 가거라! 뚜껑례네 집으로 다 가거라! 역시 제남이는 사람을 놀리는 데 천재였다. 제남이가 너무나 멀리 도망가는 바람에 포기 하고 돌아서던 뚜껑례네가 다시 나를 쫓아왔다. 나는 죽어라 도망을 쳤다. 나는 고백하건대 원래 유명한 굼벵이 사촌이었다. 아무리 발을 높이 올려서 멀리 뛰려 해도 땅바닥이 내 발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제남이가 다시 고래고래 노래를 부르며 뚜껑 례네를 쫓아왔다. 그러나 뚜껑례네가 제남이 쪽으로 다시 몸을 돌린 순간에야 나는 내 발바 닥이 차가운 맨흙을 밟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나다를까, 갑자기 몸을 휘며 엎드린 뚜 껑례네가 무엇인가를 연거푸 주워올리고 있었다. "오냐, 누 집 새끼들인지 몰라도 신발이 아깝거든 밝은 날에 에미 애비를 보내라아!" 뚜껑례네는 또 오냐 오냐, 하면서 제남이와 내가 내던진 양푼과 양재기까지 주워 놀리고 있 었다. 제남이도 단숨에 넋이 빠져버렸고 나도 그대로 주저앉고 싶었다. 할머니오ㅘ 엄마와 언니들의 머리칼을 모아서 바꾼 양재기와 양푼도 물론이지만 내 운동화, 그것은 내 발바닥 보다도 더 아까운 것이었다. 고기눈깔처럼 발등에 하얀 고무줄이 들어간 까만 운동화, 그건 자나깨나 꿈꾸며 소망하다 지난 설빔으로 얻은, 바로 내 보물 1호였던 것이다. 나는, 아니 내가 알고 있는 친구들은 누구나 먹고무신을 증오했다. 남녀 공용인 그것은 생 긴 모양부터 너무나 무지한데다 평생 닳지 않을 것처럼 질기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먹두 리'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작년 추석에 선희는 면도칼로 그것을 몰래 찢다 들켜서 더 질기고 까만 새 먹두리만 얻어 신게 되었다. 나와 미란이는 시간만 나면 담벼락에다 신발바닥을 갈았다. 한꺼번에 많이 갈 면 금방 표시가 나기 때문에 조금씩 살살 자주 갈았다. 운동화 아니면 꽃신이라도. 운동화는 너무나 황송하고 꽃신이 바로 우리의 꿈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설빔으로 나비가 달린 흰고무신을 사오자 나는 그대로 돌아버릴 것 같았 다. 나는 정말 흙마당에 벌렁 누워 발버둥치며 목뼈를 돌려놓은 풍뎅이처럼 붕붕 돌아버렸 다. 흰고무신은 색깔이 희고 고무나비가 달렸다는 것뿐 발등이 두루뭉실 펑퍼짐하기는 먹두 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고작 그것을 얻어 신자고 그토록 공을 들였겠는가. 돼지막에다 새 짚을 깔아주던 아버지가 무슨 짓이냐고 소리쳤다. 그리고 돼지똥이 묻은 장홧바람으로 쫓아오려고 하자 나는 간신히 흙마당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나는 저녁밥을 눈 물 콧물에 말아먹을 정도로 서러움을 여읠 수 없었다. 십년 공이 도로아미타불이라더니 그 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 밤. 자리를 깔다 말고 엄마가 아버지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내 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전날 밤 앞니가 옴싹 빠져버리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서 너무나 허망한 나머지 엄마를 흔들어 깨우며 내 이가 아직 붙어 있는지 확인까지 했던 것이다. "얼마나 소원을 했음 이런 실망을 겪을 줄 미리 알고 어린 게 그렇게 영한 꿈을 꿨으까 이." 엄마가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 누웠다. 엄마야 내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더라도 할머니가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을 것이다. 할머니의 십팔번이 바로 계집아이는 천하게 길 러야만 팔자가 순탄하다는 것인데, 싸고 질긴 먹두릴 놔두고 비싸고 빨리 닳는 운동화를 엄 마 마음대로 사 신길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방문 쪽에 붙어 앉아서 아무 소리도 들리 지 않는 사람처럼 조용히 밤참 꽁초를 태우던 아버지가 앞가슴으로 떨어진 재를 털다 말고 엄마 쪽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무심히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 장날 내가 바꿔올 팅께 신문때기에 싸두소." 기적은 그렇게 무심한 듯한 아버지의 말 한마디로 이루어졌다. 나는 닷새 내내 밤마다 꽃신 꿈을 꾸었다. 어느새 나는 꽃신을 양손에 들고 신작로를 달 리기도 하고, 장닭이 내 꽃신을 신고 지붕으로 올라갔다고 해서 사다리를 타다가 떨어지기 도 하고, 꽃신이 떠내려갔다는 사천을 따라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그런데 아버지는 꽃신 아 닌 운동화를 사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게 된 운동화는 막상 설날 하루쯤이나 신어보았을까. 꿰매고 또 꿰맨 두꺼 운 양말을 포개 신어야 하는 겨울이기 때문에 운동화는 아직 노리개일 뿐 알맞게 늘어난 먹 두리를 기꺼이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겨울방학이 끝난 개학 때 신고 보름밥 때문에 흥 분한 나머지 오늘 밤길에 그만 신고 나와버린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효자손' 꼭대기에 달린 스프링인형처럼 두 손을 모아쥐고 팔딱팔딱 뜀만 뛰었다. 나는 뚜껑례네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무엇보다 제남이 가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 "깔다구 노래를 대이고 부르면 으치케 할라고 그러냔 말여!" 나는 뜀뛰던 기세로 쥐어박을 듯 발을 굴렀다. "무담시 작대기부터 들고 쫓아온께 그랬제." 제남이가 뉘우치는 기색도 없이 부어터지는 소리를 했다. "밥을 안 준께 그랬제." 제남이가 낼름 다시 정정했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뚜껑례네는 분명 처음부터 방문짝 을 내던지며 화부터 냈던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뚜껑례라고 오늘 이 열나흘 보름전야라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보름밥 얻으러 다니는 풍습이 그렇게 싫은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게 분명했다.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고 머리핀으로 흙을 파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선희가 슬며시 다가 와 곁에 앉았다. 볼을 물고 있는 게 자기 엄마한테 된통 혼이라도 난 모양이었다. 선희와 분 옥이와 복덕이도 간밤에 밥그릇과 신발을 뺏겼다고 했다. 뚜껑례네를 놀리다가 아리대미로 내려가서 민대갈네를 놀렸다는 것이다. 어젯밤 차마 맨발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선희를 만나서 들은 이야기였다. "뚜껑례네 엄마아, 밥 좀 주시요용 하고 첨부터 놀렸지?" "이." "점쟁이 이름이 바로 뚜껑례라는 걸 알고도?" "이." 선희는 전혀 후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이름이 뚜껑례가 뭔가 뚜껑례가. 밤새 놀림 을 당해도 싸지. 나는 뚜껑례가 바로 사십대 과부 점쟁이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 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 집을 뚜껑례네라고만 불렀기 때문에 나는 그 집 아이들 중 누군가 의 이름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밤새 아이들로부터 이름을 불리며 놀림을 당했으니 우 리가 갔을 때 뚜껑례는 이미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새 삼 웃음이 터져나왔다. "히히히." "킬킬킬." 선희도 킬킬 따라 웃었다. 뚜껑례의 이름 때문이었다. 뚜껑례네 아버지는 참채장수였는데 엄마도 솥단지를 이고 따라다니면서 밥을 해먹었단다. 그러다가 엄마가 남의 논둑 밑에서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얼른 솥뚜껑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이름이 붙 었다는 것이다. 선희도 복덕이한테 얻어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민대갈네는 뭐라고 놀렸냐?" "민대갈네 엄마아, 밥 좀 주시요옹!" "히히히히, 노래 안 부르고?" "불렀제에, 포대기 처네에 제도 하고요 보국이 말국이 민대가아리!" "히히히힛." "킬킬킬킬." 선희가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자 우리는 또 배꼽을 그러쥐었다. 우리 동네만큼 재밌는 사 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 세상에 또 있을까. 들판이 넓고 갯벌이 기름지다는 자랑만큼, 삼백여 호가 모여사는 큰 마을인만큼 별의별 사람들이 다 끼여사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참 행복한 아이들이었다. 민대가리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구십삼세 할아버지의 별명이었다. 머리를 통째로 빡빡 밀어버린 알짜 민대가리인 것이다. 임금님이 나라를 다스리던 아주 옛날부터 '사람이 곧 하 늘'이라는 별쭝난 종교를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씨 성을 붙여서 이대갈 네 아니면 민대갈네라고 불렀다. 민대가리 할아버지는 일제 때 면장을 지낸 아들을 몹시도 싫어해서 사랑방 문을 꼭꼭 걸 어잠근 채 바깥마당으로 통하는 뒷문만 사용했다. 그래서 손녀딸이 밥상을 갖다드릴 때도 안마당과 대문과 바깥마당을 뱅 돌아다녔다. 바로 그 바깥마당에서 땅따먹기를 하다보면 민 대가리 할아버지의 주문 외우는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그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포덕천 하 제도중생 보국안민'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는 아이들은 음만 따 서 포대기 처네 보국이 말국이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민대갈네 엄마라고 부르면서 밥 좀 달라고 해도 대꾸가 없자 그 노래를 불렀는데 면장 할아버지가 그만 고래땅 같은 소 리를 내지르며 작대기를 들고 온 골목을 쫓아다니더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뚜껑례를 놀릴 생각이었다면 겁이 많은 나는 지레 무서워서 집밖에도 못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뚜껑례네한테 된통 혼이 나고 운동화까지 뺏기는 바람에 뜻밖에도 나는 아이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분옥이도 춘희도 미란이도 복덕이도 모두들 걱 정하는 얼굴이 되어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신발을 되찾을 방도를 가진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검정 먹두리를 잃었기 때문에 되레 시원하다는 눈치였다. 그나마 아이들은 곧 동네마당으로 관심을 돌려버렸다. 굿 차릴 준비가 거의 되어가는데다 드디어 앞머리가 홀딱 까진 대머리 소자가 나타난 것이다. "아 비로 쓸지 말고 주섬주섬 줏으랑께! 줏어서 불을 싸질러야제 흙뒤발로 쳐박아두지 말 란 말여. 동티 나! 아 헌식그릇은 그대로 두고! 들짐승들 오매가매 줏어묵으라고 헌식그릇은 그대로 두랑께!" 누덕누덕 옷을 몇겹으로 껴 입은 소자가 손가락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바쁘게 설치고 다녔 다. 간밤에 동제를 지낸 제상과 덕석을 치우는 일뿐인데도 소나기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다 급하게 과장된 몸짓을 해대는 것이었다. "아 제상은 각자 임자들 보고 가져가락 하고 덕석은 공출미 걷을 때도 써야단께! 자자 이 쪽으로, 아 한쪽으로 모아!" "니미, 아직도 일제시대냐, 공출미 걷게. 저리 못가 이 소자야! 손구락 육갑도 안하는 주제 에 입만 살아갖고 그냥. 혼자 어른 났어 응? 큰어른 났다고!" 마을 청년이 대빗자루로 때리는 시늉을 하며 눈을 부라렸다. 제상을 치우고 무거운 덕석 들을 일일이 털어서 마느라 있는 대로 기운을 쓰는 데 거치적거린 것이다. 그래도 소자는 눈을 마구 깜박여서 위기를 모면하고는 금방 다시 누더기를 펄럭거리며 겅중겅중 뛰어다녔 다. 소자는 공자 맹자처럼 지식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정말로 일제 때 동경유학까 지 다녀온 인물이라고 했다. "놔둬라 소자 빠진 굿잔치도 있다더냐. 저도 지 소임을 다하느라고 허는 짓인께 곱게 봐 줘." 기어이 소자를 쫓아가서 한 대 쥐어박으려는 청년을 마을 어른이 말렸다. "소자 소임이 뭣이간디라." "아 틈새구마다 끼여서 설레발레 흥 돋우고 양념 노릇 허는 게 그게 어딘디?" 어른이 손을 젓자 말문이 막힌 청년이 그만 하늘을 향해 허허 하며 몰래 웃었다. 그리고 어른이 얼굴을 저쪽으로 돌리는 사이에 대빗자루 끝으로 소자의 엉덩이를 퍽 쑤셔놓고 얼 른 마당 쓰는 시늉을 했다. 뜻밖의 구경거리에 숨을 죽이던 우리는 그만 킬킬킬 웃음을 터 뜨렸다. 대보름 굿잔치가 시작되기도 전에 의외로 더 신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흰 한복 에 빨강 파랑 노랑 삼색띠를 두르고 고깔을 쓴 마을 어른들은 마당 한쪽에 모였다. 각기 �� 씩 풍물마다 징게징게 쿵탁쿵 쿵탁쿵 저마다 기억 소그이 가락을 꺼내어 손을 푸느라 정신 이 없는데 아이들은 엉뚱한 데서 흥바람을 일으켰다. "소자 대가리 민대가리!" "소자 대가리 민대가리!" 대보름 굿잔치는 이렇게 아이들이 앞질러서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 틈에 끼어 이 리저리 밀려다닐망정 관심은 한시도 뚜껑례네한테서 떠날 수가 없었다. 더더구나 아침밥도 안 먹고 집을 나온 죄 때문에 아버지나 집식구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아주 조심해야 했다. 드디어 굿잔치가 시작되고 우리 아버지는 여느때처럼 장구를 잡았다. 아버지는 원래 유명 한 장구잡이였다. 일년 열두달 일밖에 모르는 농투성이지만 대보름 굿마당에서 일단 장구만 멨다 하면 한다는 한량만큼 걸판지게 잘 놀았다. 같은 장단도 아버지의 것엔 어깨춤이 절로 나는 흥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과묵한 아버지를 어려워하던 사람들도 아버지의 장구 솜씨에 그만 마음이 풀어진다고 하였다. 자기 아버지나 삼촌이 굿패에 들어 있으면 아이들은 더욱 기가 살아서 팔팔 신나게 뛰어 다녔다. 제남이도 벌써 머리통을 아무데나 쑤셔대며 여기 번쩍 저기 번쩍 뛰어다니고 중학 생인 오빠는 뒷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안 보는 척 슬쩍슬쩍 아버지를 훔쳐보곤 했다. 하루 종일 따라다니기 위해서 할머니는 좀더 느직이 집을 나올 것이고 엄마는 굿패가 우리 집을 다녀간 다음에나 따라나설 것이다. "행남아, 너 운동화 뺏겼다고 일러부렀다. 빨리 와서 아침밥 안묵으믄 죽인다더라. 배고프 지, 뽀옹!" 나를 발견한 제남이가 혀를 한발이나 빼서 내흔들었다. 같은 일을 당해놓고도 제남이는 어느새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망할눔의 가시낭년 따라댕기다가 내 새끼만 고생 오 지게 했다'는 할머니의 위로라도 톡톡히 받은 모양이었다. 할머니의 그런 무조건적인 옹호 때문에 제남이의 배반은 무시로 자행되곤 했다. 그럴수록 다시는 제남이와 놀아주지 않겠 다는 다짐을 하고 또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관계를ㄹ 일일이 간섭하고 지배하 는 힘은 다른 데에 있었다. 나는 한풀 기가 꺽일 수밖에 없었다. "너!" 기어이 오빠마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나를 발견한 오빠가 바람처럼 달려와서 주먹 을 들이대며 발을 굴렀다. "너 어쩌다가 운동화 뺏겼어. 뚜껑례 놀리다가 그랬지?" 처음부터 뚜껑례를 놀린 건 아니지만 나는 할말이 없었다. "어이구 모지리, 빨리 가서 찾아와 빨리. 못 찾으면 집에 영 못들어올 줄 알아!" 나한테 어떤 잘못이 있을 때 오빠는 그 기회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어떤 잘 못을 저지를 때마다 앞뒤 전말을 까다롭게 추궁하고 캐다가 괜히 발을 구르면서 화를 냈다. 자신의 권위를 확인시키고 지나친 간섭도 합리화하는 묘한 방법이었다. 나는 눈에 보이기만 해도 부모의 부아를 돋우는 '가시나'의 존재이기 때문에 오빠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멸시할 특별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빠의 서릿발 같은 엄포에 기가 질려서 굿패를 따라다닐 의욕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배도 고프고 너무나 추웠다. 따뜻한 태양이 함뼘씩 가까원지고 있었지만 얼어버린 맨발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굿패마저 뚜껑례네나 말집네는 들어가지 않았다. 지신을 밟아주면 마을 의 공동기금이 될 쌀바가지라도 보답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집주인들이 거절한 것이다. 대왕신 조왕신 삼신을 다 찾고 굿패가 앞마당 부엌 우물 외양간 변소까지 굿패를 따라서 아 리대미까지 내려간 나는 다시 혼자 슬며시 동네마당을 찾아가보았다. 뚜껑례가 마실이라도 가지 않았을까 해서였다. 그런데 뚜껑례는 안방 앞에는 되레 장정들의 신발이 여러 켤레로 늘어나 있었다. 절망이었다. 나는 담벼락에 등을 붙인 채 주르를 미끄러져 주저않아버렸다. 아무래도 운동화를 찾을 길은 없는 것 같았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박고 시린 발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커다란 그림자 하나 가 다가와 나를 가렸다. 찢어진 먹두리를 헝겊으로 꿰맨 신잘이 나란히 다가와 있었다. 먹두 리조차 꿰맨 신발이 나란히 다가와 있었다. 먹두리조차 꿰매 신는 사람은 우리 마을에서 수 자밖에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치어다보았다. 역시 자기 몸뚱이 몇배나 되는 커다란 솔가릿짐을 머리에 인 수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귀신이 씌었다는 수자네 오빠 수 걸이도 갈퀴를 손에 들고 바짝 붙어서 있었다. 아이 어른 누구나 배부르게 먹고 신나게 노 는 대보름날 수자는 새벽같이 거멍숲으로 달려가서 솔가리를 긁어온 모양이었다. 북어처럼 빼빼 마른 자기 엄마를 대신해서 커다란 무롱이도 거뜬하게 이고 다니는 수자였다. "양푼 뺏겼다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운동화도?" 수자가 코와 입과 턱을 밑으로 길게 잡아당기며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푸르죽죽 얼 어버린 내 발등과 수자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수자는 한참 뜸을 들이며 무엇인가를 궁리하 는 것 같았다. 나는 새삼 발이 시려서 미칠 것 같아싿. 수자는 뮌가가 굉장히 버거운 존재였 다. "내가 찾아줄까?" 수자가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낄낄 웃었다. 나는 수자가 왜 웃는지 그리고 어떻게 찾아주 겠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수자라면 어쩌면 그런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 다. 학교에서는 나하고 같은 반이지만 수자 나이는 벌써 중학생이 되는 열다섯살이었다. 소 문에 젖가슴이 나왔다고도 했다. 그러나 여자는 물론 사내아이들도 수자한테는 꼼짝을 못했 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수자에게는 어떤 비밀한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 연한 느낌이 그 순간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내가 찾아주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수자가 계속 낄낄거렸다. 내가 찾아주겠다는 그 한마디에 나는 주 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수자를 따라나섰다. 수자는 울타리도 없는 집마다 구석에 나뭇짐을 부려놓고 부엌으로 들어가서 고구마 두 개를 들고 나왔다. 하나는 수걸이에게 주고 하나는 자기가 천천히 갉아먹었다. 나는 침만 꿀꺽꿀꺽 삼키면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였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가짜 점쟁이!" 수자가 고구마를 먹다 말고 갑자기 뚱껑례네 쪽을 노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증오심이 가득 찬 목소리였다. 나는 이유없이 등줄기가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나는 수자의 그 증오심 이 왠지 든든하게 느껴졌다.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수자의 그 증오심이야말로 내 운동화를 찾을 수 있는 원동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운동화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난느 수자가 시 키는 대로 어떤 일도 다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굿패를 따라간 아이들이 하나둘 동네마당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부잣집에서 어른들 술상 대접은 해도 아이들 먹을 것은 나눠주지 않기 때문에 그만 싫증이 난 모양이었다. 고구마를 다 먹고 부엌 옹기동이에서 물까지 한 바가지 퍼다 마신 수자가 쓰윽 입술을 훔치면서 우리 를 휘둘러보았다. "자기가 진짜 점쟁이람 우리가 이렇게 쳐들어가는 것쯤 미리서 환하게 알고 있겄제. 어디 보자." 수자가 다시 씹어뱉듯 말하며 내 허리만큼 높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앞장섰다. 수자의 자 신감에 압도된 아이들은 기러기떼처럼 저절로 줄을 맞춰서 따라갔다. 덩치가 큰 수걸이도 그 소처럼 커다랗게 벌어진 눈을 끔벅거리며 말없이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수걸이처럼 잘생긴 미남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덩치도 좋은데다 반듯한 이마와 코, 그리고 탐스럽도록 굵은 눈썹과 커다란 눈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생겼다는 신성일이나 최 무룡도 저리 가라였다. 뜯어볼수록 흠 잡을 데가 없어싿. 그럼에도 수걸이는 누가 보아도 한 눈에 바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표정 때문이었다. 수걸이는 얼굴을 항상 동전 찾는 사람처 럼 처박고 다녔다. 사람을 볼 때만 굵은 눈썹 밑에 숨겨둔 눈을 치뜨고 수줍은 미소를 머금 으며 눈길을 다시 비켜버리곤 하는 것이다. "가짜 점쟁이, 화냥년 주제에 뭘 안다고." 수자가 또 불쑥 씹어뱉었다. 수걸이 때문에 잠깐 방신했던 나는 또 등줄기를 조그맣게 오 므렸다. 전이된 수자의 증오가 전율처럼 등줄기를 싸늘하게 훑어내린 것이다. 갑자기 뚜껑례 네 건넛방에 쳐진 빨간 휘장이 떠올랐다. 그 안에 호랑이를 탄 산신이 있다고 했다. 어떤 아 이들은 투명한 귀신이 붙어 있는 방울과 징과 부채 같은 무구들도 보았다고 했다. 우리 마 을에서 뚜껑례네 안방을 훔쳐보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할머니에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일곱 이나 되는 형제들의 층층지하에서 사는 나말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은 셋방 사는 엿장수 총각이 밤마다 뚜껑례를 찾아가서 포개지는 모양을 훔쳐보았다. 말총머리를 짧게 깍 은 엿장수 총각은 땅딸보에 성질도 아주 무서웠다. 엿가락을 훔쳐먹다 들킨 아이들은 길가 나무에 묶어놓았다. 돌변한 뚜껑례와 엿장수에 대한 두려움에다 운동화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나는 두루 마음이 복잡했다. 하지만 수자만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우처럼 고양이처럼 사납고 영리하고 날쌘 애가 바로 수자였다. 모든 것이 그 반대인 나 에게 수자는 정말로 경이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뿐이 아니었다. 운동시간만 되면 우 리는 누구나 만능선수인 수자를 숭배했다. 달리기를 하거나 공놀이를 하거나 우리는 　조아 반대편이 되면 그것으로 그만 풀이 죽어서 당연히 지게 되는 것이었고 같은편이 되면 저절 고 기세가 등등해서 이기게 되곤 했다. 쉬는 시간에도 수자가 '너!너!너!'하고 지목을 해주는 아이들만 놀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거의 참여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수자의 눈에 띌 만한 아무 특징도 없는 아이들과 함께 초라한 놀이밖에 할 수 없었다. 그 런데 오늘 나는 뜻밖에도 수자와 한편이 되는 행운을 얻은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돈치기 단추치기 등으로 여기저기 구멍을 파놓은 뚜껑례네 담벼락에 찰 싹 달라붙었다. 지난 가을에 이엉은 새로 얹었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는 담벼락 틈으로 뚜껑 례네 하얀 마당이 내다보였다. 그러나 아뿔사,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뚜껑레네가 부 엌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안방 앞에 즐비한 신발의 주인들에게 점심을 대접할 모양이었다. 삼월이면 엿장수가 군에 입대를 한다더니 송별식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자가 중 얼거렸다. "엿장수 동무들이 화투 치는갑다." 나는 더욱 절망하고 말았다. 어른들이 그토록 경계하고 혐오하는 노름꾼들이 바로 저 방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노름꾼은 도둑놈과 마찬가지로 몸에 찾 달라붙는 가죽옷을 입었 으며 눈은 가늘고 길게 찢어져서 반짝반짝 및나고 몸뚱이는 족제비처럼 날쌔게 생겼다고 나 는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은 귀도 밝을 것이고 아이들의 잘못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 이다. 내가 그런 상상을 하며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데 수자가 쓱 마당으로 들어섰다. 뚜껑례가 부엌 아궁이 쪽으로 고개를 들이민 같은 순간이었다. 수자는 사뿐사뿐 고양이처럼 빠르게 양푼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대로 튀려던 수자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잠시 멈칙하더니 양푼 속의 양재기를 꺼내서 슬며시 내려놓았다. 소리가 난 모양이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려싿. 뚜껑례네의 네살짜리 막내 아들이었다. 나는 두 다리에 힘을 잃고 곧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수자는 얼른 양푼을 머리에 쓰고 주저않앗다. 막둥이는 아직 수자를 발견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방에서 쫓겨나온 듯 볼이 잔뜩 부은 막둥이는 비비적거리며 마루를 내려오더니 곧 어른들 의 신발에 정신을 팔기 시작했다. 고무신을 둥그렇게 구부려 다른 신짝에 말아넣고 이애앵 자동차 소리를 내는가 하면, 시커먼 농구화 속에 주먹을 넣고 칙칙폭폭을 부르다 말고 막둥 이가 마당의 움직이는 물체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혼겁을 한 둣 소리를 내질렀다. "엄마아 엄마아, 양푼이 걸어가요오!" 그러나 뚜껑례는 계속 뭔가를 달그락거릴 뿐 아무 반응이 없었다. 막둥이도 계속 숨이 넘 어갈 듯 소리쳤다. "엄마야, 양푼이 걸어간다께라우!" "그래, 그런 것 구경함시롱 놀아라아." 뚜껑례네는 바쁜 일손을 놀릴 뿐 막둥이의 말은 관심 밖인 것 같았다. 나는 가슴이 떨리 기도 했지만 웃음을 참느라 가슴에서 붕붕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당을 절반 이상 걸어온 수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 태연한 걸음으로 사립을 빠져나왔다. 수자는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담력과 재치를 가진 아이였다. 왜 아이들이 고구마나 양파 같은 군것질감은 물론 고무줄이며 옷핀, 단추 같은 귀한 물건까지 바쳐가며 수자 가까 이에서 맴돌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수자는 정말 뭔가를 바쳐가며 의지해도 좋을 우 리의 여왕이었다. 수자가 양푼을 껴안은 채 동네마당을 다 빠져나오도록 나는 말없이 졸졸 따라 걷기만 했 다. 나는 수자가 어떤 조처를 내릴 때까지 어디까지라도 따라갈 작정이었다. 수걸이는 물론 담벼락에 눈을 받은 채 숨죽이고 있던 아이들도 무엇에 압도되었는지 줄을지어 따라왔다. 잿등 쪽으로 내려와 골목의 방앗간 앞에 이르자 수자가 드디어 몸을 돌리며 멈춰섰다. 움 죽움죽 따라오다가 움찔 멈춰선 수걸이는 슬그머니 수자의 등뒤로 비켜섰다. 우리가 이 세 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방앗간 앞에서 왜 하필 발을 멈추었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 은 너무나 수자다워 보였다. 어떻게 나와 내 친구들이 발이 보이지 않도록 뛰지 않으면 도 깨비들이 얼굴을 외운다는 방앗간 앞에 서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순전히 수자 때문이 었다. 드디어 수자가 고개를 약간 수그리며 속삭였다. "그 여편네 가짜 점쟁이 맞지? 자기 집에 돋구이 들어가도 모름시롱 워치케 노므 아부지 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아느냔 말여. 미신을 팔아묵는 순 사기꾼!"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가 방금 확인했다시피 구국절절 옳은 말이었고 어른 들이 쓰는 여편네라는 말도 수자한테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미신은 공 부하는 학생이라면 당연히 부정해야 할 얼마나 저급하고 부질없으며 망년된 것인가 말이다. 우리들 사이에선 뱀한테 손가락질 하면 손가락이 썩기 때문에 그 뱀을 끝까지 쫓아가　 죽여야 한다거나 눈병 앓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침을 세 번 뱉어야만 전염이 되지 않는다는 등 수많은 지식과 정보들이 떠돌았다. 우리는 시시때때 순간적으로 흘려버린 일들을 가지고 공포에 지질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용기있는 누군가가 그건 다 미신이여, 하고 한마디만 하 면 그 모든 율법의 힘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리곤 했다. 우리는 누구나 귀신이라든가 점이 라든가 그런 것이 다 미신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싿. 물거품처럼 부질없는 것, 나는 뚜껑례 가 무서원 벌벌 떨었던 일이 너무나 우습게 생각되었다. 나는 앞으로 뚜껑례를 더욱 경멸할 것을 결심했다. "그 여편네가 울아부지 죽었다고 하는 바람에 울어매 병났단 말여. 가짜 점쟁이 순 사기 꾼이. 그 여편네 눈앞에 당장 벌어진 일도 모르는 거 느그들 두 눈으로 똑똑히 봤지?" 수자가 못 박듯 치묻자 우리는 더욱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자네가 말집네로 불리는 것은 수자네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말수레를 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수자네 아버지는 없다. 전쟁 직후 수자를 잉태만 시켜놓고 사라져버린 이후 아 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말집네는 매년 정초마다 연례행사처럼 남편의 생사를 물으러 다니는 데 점쟁이들의 점괘에 따라 병이 들기도 하고 얼굴이 뽀얗게 피어나기도 해 서 어른들이 늘상 입에 올리는 이야깃거리였다. 그런데 나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심상하게 들어넘긴 남집네의 이야기가 바로 저토록 절절해지는 수자의 슬픈 사연이었다니, 나는 속으 로 아하 하며 수자가 왜 날이면 날마다 엄마 말집네가 왜 뚜껑례네 사립을 나오다 말고 담 벼락에 가슴을 마구 문지르며 헉헉헉 숨을 몰아쉬다가 쓰러져버렸는지도 알 수 있을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우리 아버지를 생각하자 더욱 슬퍼졌다. 할머니의 표현으론 우리 판남매를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는 등골이 빠진다고 했다. 정말이 지 사시사철 아침에 깨어나 밤이 되도록 한시되 쉬지 않는 아버지가 만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수자네보다 더 가나나뱅이가 되고 말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싫어했다. 아침마다 늦잠으로 집안을 시끄럽게 하기 때문이었다. 뿐인가, 나는 마당이건 골목 담 밑이건 가리지 않고 소꿉을 놀다가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다. 심지어 는 학교에서도 두 번이나 잠이 드는 바람에 1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업어다주었고 2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이 농번기라 연락을 받은 제남이가 리어카로 실어오기도 했다. 그래서 내 가 태어날 때 딸이라는 소리를 듣고 도로 방을 나간 이후 단 한번도 안아준 적이 없던 아버 지는 지금도 꾸중할 때만 빼놓고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는 법이 없다. 내가 당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잊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운동화를 사다주셨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 가 없으면 나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토록 만사에 경이롭기만 한 수자가 새삼 가 여워서 견딜 수 없어싿. 나는 하루 밤낮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을 겪고 또 너무나 많은 것 을 이해한 기분이었다. 우리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 쓰윽 돌아보던 수자가 드디어 가슴에 대고 있던 양푼 을 우리의 눈높이로 내려 보였다. 양푼 속에는 먹빛처럼 새까만 내 운동화가 두 눈을 반짝 이며 앙증맞게 나린히 놓여 있었다. 나는 순간 마음이 너무나 복잡해졌다. 아니 수자가 양푼 을 들고 뚜껑례네 마당을 무사히 빠져나오던 순간부터였다. 수자가 과연 운동화를 제대로 돌려줄 것인가 하는 의문 때문에 마음 밑바닥이 너무나 불안했던 것이다. 수자가 한 짝은 자기가 가지겠다고 하면 그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나는 선뜻 내 운동화를 집어들 수가 없었다. "지금쯤 이것이 없어진 줄 알면 그 여편네 귀신이 가져갔다고 곡을 할 거이다." 수자가 깔깔깔 웃어젖히자 나도 덩달아 수자처럼 웃어보았다. 그렇게 웃자 확실히 뚜껑례 를 경멸한다는 느낌이 들어싿. 아이들도 웃었다. 모처럼 이빨까지 드러나게 웃던 수걸이는 내 눈과 마주치자 얼른 입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이곳은 도깨비들이 얼굴을 외우는 방앗간 앞이 아닌가. 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어버려싿. 그러나 수자의 다음 말은 너무나 의외여싿. "나 한번만 만져보자, 응?" 햇빛을 등진 수자의 눈에서 번뜩 어떤 광채가 스치는 듯했다. 그리고 수자는 더욱 간절한 눈빛이 되ㅐ어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내 마음이 저절로 환하게 열렸다. "그래 만져봐, 발에도 신어보고." 수자는 조심스레 운동화를 꺼낸 다음 양푼은 나에게 건네주고 그것을 이쪽저쪽 자세히 만 져보았다. 그리고 뺨에도 대어본 다음 발에도 꿰어보아삳. 그러나 수자의 발은 나보다 휠씬 커서 잘 신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2. 어른도 길을 잃는다. 보름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동네마당으로 달려나가 수자네 집을 기웃거렸다. 수자는 언 제나 우리가 가장 흐임로워하는 일만 했다. 우리가 낮이나 밤이나 틈만 나면 담 밑에 쭈그 리고 앉아 흙놀이를 하면서 지치지도 않고 흉내내는, 밥하고 빨래하고 물긷는 바로 그 일을 실제로 하는 것이다. 새둥지처럼 부스스한 쇳소리를 지르며 수자를 마구 부려먹기 때문이었 다. 그렇게 바쁜데도 겨울만 되면 수자는 연을 만들었다. 물론 해마다 겨울이 되면 아이들은 누구나 연을 만들었다. 우리 아버지도 해마다 겨울이 오면 할머니의 언니가 사는 대섬에 가서 낭창낭창 바람을 타는 가장 유연한 시누대를 베어 왔다. 오빠와 제남이의 참연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아버지가 대를 다듬고 참종이를 오리면 엄마는 부엌에서 풀을 쑤고 할머니는 물감집에 가서 빨강 파랑 노랑 물감을 사왔다. 삼태 극을 그려붙인 참연에 빨강 파랑 귀를 달기 위해서여싿. 그리고 제남이가 겨우내 남의 보리 밭을 뛰어다니며 귀때기가 얼어터지도록 하늘 높이 띄우다가 보름을 쇠고 난 새벽이면 할머 니가 그것을 다시 짚불 위에 던져서 태우는 것이다. 그러나 회종이로 만든 어마어마하게 큰 수자의 가오리연은 보름을 쇠고 나서도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수자는 언제나 가오리연 복판에다 커다랗게 '서수자'라고 제 이름을 써넣었다. 하 늘 높은 곳에서 펄럭이며 춤을 추는 기나긴 꼬리에는 제 이름은 물론 오빠 '서수걸', 엄마 '이봉심'까지 빼곡이 써넣었다. 그것을 비바람 눈보라만 피해서 날이면 날마다 해가 떠서 질 때까지 하늘 높이 뜨워놓는 것이었다. 지나가다 그것을 본 어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네미랄, 제길 죽을 때 만장을 미리서 띄우는갑네 그랴." "가시나가 국회의원 나갈라고 벌써부터 선전하고 있구마!" 그러나 수자는 누가 뭐라 하건 아랑곳하지 않았다. 보름을 쇤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수자가 잠시 물을 긷느라 맡겨 놓은 연을 수걸이가 그 만 놓쳐버렸다. 어느새 보았던지 수자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물동이를 길바닥에 팽개쳤다. 머리 위의 똬리를 바통처럼 움켜쥔 수자는 쿨럭쿨럭 고개짓을 하며 멀어져가는 연을 쫓기 시작했다. 꼬불꼬불 논둑길을 달리고 도랑이 나타나면 장애물 경기처럼 건너뛰기로 내달렷 다. 도대체 얼마나 빠르고 치열한지 가물가물 눈이 시질 때쯤 해선 빛 속으로 사라졌다 나 타났다 요슐을 부리는 것 같았다. "시방 저것이 사람 새낀가 들짐승인가?" 보름 윷을 노느라 동네마당에 나와 있던 어른들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넋을 놓았다. 술 공장에 불이나 나버리라는 홀어머니와 밤새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던 주만이 아저씨와 밤마 다 우리 시쩌니한테 연애편지를 쓰느라 얼굴이 하얗게 바래버린 색소폰 아저씨도 모처럼 고 개를 들고 있었다. 주만이 아저씨는 아직도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색소폰 아저씨는 항상 비 맞은 사람처럼 푹 수그리고 다니던 고개를 곳꼿이 쳐든 채 먼 들판의 초점을 놓치 지 않으려고 안경 속의 눈알을 새우처럼 모으고 있었다. 그 때 어른들 중의 누군가가 불쑥 소리쳤다. "허참, 씨도둑질은 못한다등마 서금석이 그 사람 판박일세, 판박이!" 아주 드높고 돌연한 탄식이었다. "아무리 판박이라고 보름 쇤 걸 좇아가는 건 또 어느 세상 법이래?" "아, 그것이사 본시 저질러서 당하는 내림인께 그라제." 그러나 저절로 터져나온 탄성들이 서로 엉기려다 말고 거기서 뚝 끊겨버렷다. 하다 말고 그대로 조용해져버린 것이다. 출렁출렁 공기를 가르는 긴 장대를 흔들며 눈에 파란 불을 켠 노인이 그 옆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 서서 멍석 위로 윷종지를 던지며 모야! 큰 소리에 무릎까지 치고 있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느닷없고 짦은 그 몇마디 때문에 나는 아주 얼떨떨해졌다. 그 짧은 순간 어른들은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두런거렸지만 단지 나는 몇마디만 알아먹은 것 같은 착 각이 들었던 것이다. 깜박깜박 조는 사이 길고 나지막한 할머니의 옛날이야기가 다새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수자는 들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 옹기 굽는 마을까지 쫓아가서 연을 찾아왔다. 연은 찢어 져 망가졌지만 유릿가루를 먹여 서릿발이 선 연실과 연의 뼈대인 대살은 찾아온 것이다. 다음날 수자는 다시 연을 만들었다. 나는 비료를 다 써버린 회부대와 병뚜껑 같은 그릇마 다 색색이 물감이 담긴 오빠의 물감곽을 훔쳐갔다. 대살에 회종이를 붙이고 크레용 대신 물 감으로 이름을 선명하게 쓰라는 것이었다. 향이 달콤한 그 물감을 수자는 몹시 만족스러워 했다. 수자는 그 대가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한테 연을 맡겼다. 다행히도 수자에겐 할 일이 많앗다. 수자네 엄마 말집네가 병이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봄방학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밥만 먹으면 아예 동네마당에 나와 살았다. 나는 연을 날리다 오빠한테 붙들려가기도 하고 장차 동네각시가 될 참이냐는 어른들의 훈 계도 귀가 아프게 들었다. 언니들은 나 때문에 창피해서 못살겠다며 더욱 발을 굴렀다. 무얼 하고 놀건 동네마당에서 놀다보면 흙투성이에 쑥대머리가 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마을 총각 들이 그런 나를 보고 언니들까지 평가해버릴까봐 그게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제남이도 마찬 가지였다. 갖은 수단으로 떼놓고 다니는 나한테 앙심을 품고 심술을 부리기 일쑤였다. 그래 도 나는 말집네와 동네마당의 매력에서 놓여날 수 없었다. 뚜껑례한테서 내 운동화를 찾아 주고 방앗간 앞에서 그것을 다시 뺨에 대어보던 수자의 눈빛에 완전히 홀렸던 것이다. 나는 어쩌면 단순히 수자한테 홀렸다기보다는 얼굴에 커다란 동굴이 숨겨진 것 같은 수자 네 엄마와, 수자가 오히려 누나인 것처럼 끔찍이도 아끼는 바보 수걸이까지 통틀어서 말집 네 자체의 사연에 홀린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수자네 집에 얽힌 거라면 뭐든지 수수께끼 같 았다. 말집네가 뚜껑례네 담벼락을 붙들고 쓰러지던 날 우리는 바로 그 옆에서 흙놀이를 하고 있었다. 뚜껑례네 변소 뒤켠 양지쪽에는 겨울에도 빨간 갓잎이 무성히 자라고 있었는데 그 걸 뜯어다가 조개껍질마다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윗골목 아랫골목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대 며 각자 생일 잔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 아이들은 아무도 집에서 생일상을 차려주지 않기 때문에 흙놀이만 하게 되면 각자 생일상을 차리거나 무지개떡이며 수수팥떡 같은 온갖 생일떡을 돌려 먹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끄응! 하고 힘쓰는 소리가 나서 쳐 다보니 말집네가 뚜껑례네 담벼락을 끌어안고 있었다. 처음엔 말집네가 그 담벼락의 뿌리라 도 뽑으려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말집네는 담벼락에 자신의 가슴을 마구 문지르기 시작했 다. 그러더니 그만 눈을 허옇게 까뒤집으며 힘없이 쓰러져버리는 거였다. 그날 나는 보리밭에 북주러 간 아버지와 엄마가 대문을 들어서기 바쁘게 말집네의 그 사 건을 이야기했다. 결국 엿장수의 리어카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가던 말집네의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쟁이를 꺼내놓고 씨종자를 가리며 점심이 늦는다고 내낸 고시랑대던 할머니가 느닷없이 손을 마구 내저었다. "보릿고개도 아닌디 작년 가뭄에 못 묵어서 벌써 솟증이 났는갑다. 가슴애피가 달리 난다 더냐, 몸속에 기름기가 떨어지믄 바로 오장에 불이 붙어분께 그리되는 것이제!" 이야기를 하느라 흥분상태인 내가 깜짝 뛸 만큼 느닷없고 거친 목소리였다. 그러나 엄마 의 목소리는 그냥 심상한 것이었다. "닭 한 마리만 고아묵어도 수월할 틴디라." "글씨, 구렁이 한 마리만 구워묵으믄 씻은 듯 할 것인디 말여. 하제만 곧 해동이 된다 해 도 새 풀 돋을라믄 아직 멀었는디 어디 가서..." 그러나 절구통 옆으로 연장을 세우며 끼여들던 아버지가 채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입에 물고 있던 쭉정이 팥을 퉤 뱉어내며 할머니가 '아서!' 하고 나섰다. "아나, 구렝이에 닭! 구렝이 닭이 아니라 하다 못해 갯벌에 내려가서 바지락만 부지런히 파다가 삶아묵어도 수월하고말고야. 한여름엔 천지사방에서 시끄럽게 개골대는 임자 없는 개구락지, 가슬엔 나락 포기마다 숭글숭글한 메뚜기만 잡아다 묵어도 배 뚜드리고 살 것이 다. 그란디 허연 쌀 퍼다가 뚜껑례네 보태줄 것은 있어도 새끼들하고 묵을 양식은 없어서 솟증이 났다고 하믄 누가 곧이듣겄냔 말이다!" 할머니는 탁 소리가 나도록 마룻바닥까지 쳤다. 그리고 할머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집 모퉁이를 돌아가버린 아버지는 뒤안에서 벌써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솟증에 구렁이가 어쨌다는 말인가. 일을 시작하고 끝내는 것은 아버지가 결정하는 데도 아버지 배고프게끔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고 엄마만 탓하는 할머니의 잔소리를 내내 듣 고 있다가 엄마가 나타나자마자 나는 말집네 이야기를 했던 것뿐이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닌 남의 일에 땅바닥까지 치고 나서는 할머니도 할머니지만 할머니의 그 정도 잔소리에 그토록 불손한 아버지의 태도도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에서 들어 도 말집네 이야기는 그토록 복잡하기만 했다. 어쨌건 솟증에 구렁이 같은 그런 얘기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만 소용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 되려 하는 열다섯 살짜리 수자는 날마다 물때를 맞춰 바닷가로 내려 가서 바지락을 캐왔다. 말집네는 그 바지락 삶은 뽀얀 국물을 마시고 오그라든 가슴을 조금 씩 편다고 했다. 눈에 파란불이 켜진 그 노인과의 만남은 정말 뜻밖이엇다. 동네마당 한켠에 쌓아놓은 볏 짚가리 밑에 쭈그리고 앉아 수자의 연을 날리다가 나는 드디어 그 노인과 딱 마주치게 되었 다. 노인은 우리 할머니보다 나이가 많다고 하니까 적어도 칠팔십년은 우리 마을에서 살고 있 는 셈이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나서도 십년이 넘도록 변화라곤 없는 마을에 함께 살아왔다. 그럼에도 노인과 정면에서 마주치기는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 노인은 처음부터 호호백발에 숱 좋은 굴레수엽을 한뼘이나 늘어 뜨린 파파 늙은이였다. 우리 할머니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였다고 느껴지듯이 내가 태어나 서 처음으로 사람을 구분할 수 있었을 때 노인 역시 이미 늙은 할아버지가 되어 있었기 때 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어렸을 적 나물 캐던 이야기나 새색시 때의 고된 시집 살이를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노인에게도 전설 같은 젊은 시절이 있 었다고 했다. 마을 앞 사장나무 그늘에는 용의 알처럼 까맣고 반질반질한 커다란 들독이 하 나 놓여 있는데 바로 젊은 시절의 노인이 청오산 너머 마을에서 들고 왔다는 것이다. 노인 이 그것을 들고 온 이후 어느 마을 장사도 다시는 뺏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노인은 지금도 장사처럼 보였다. 무명바지를 달달 걷어붙이고 긴다리로 나룻배만한 먹고 무신을 부걱거리며 젊은이처럼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노인의 손에는 언제나 긴 장대가 들려 있는데 낚싯줄이 감긴 그 장대는 어른 키의 두세 배로 무게도 닷근을 넘는다고 했다. 출렁 출렁 물결치는 긴 장대의 움직임 때문에 노인은 언제나 춤추는 사람처럼 일정한 리듬을 타 고 성큼성큼 걸어다녔다. 그중에도 신비한 것은 노인이 거멍숲에 사는 도깨비와 친구라는 이야기였다. 새벽 물때문 노인은 누구보다 먼저 바닷가로 나가서 모닥불을 피우고 몸을 녹이는데 그때마다 도깨비랑 아주 재밌게 이야기를 나눈 다는 것이다. 날이 밝을세라 숲속에 숨어 있던 도깨비가 '이제 나오는감!' 하면 '어-이!' 하고 그물이나 낚싯대를 꺼내며 노인이 목을 길게 뽑아서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준비가 끝난 노인이 '오늘은 어느 목이 좋을꼬?' 하고 물으면 도깨 비가 '귀바구 끝이 좋을걸!'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노인은 정말 깎아지른 절벽 아래 귀바위 끝으로 가서 조각배 가득 생선을 잡아온다는 것이다. 도깨비가 '사자바구께가 좋을걸!' 하면 노인은 정말 물살이 휘돌아서 누구나 사자밥이 되고 만다는 사자바위께로 가고, '만여머리가 좋을걸!' 하면 썰물 때에야 모습을 드러내는 커다란 암초머리로 가서 나뭇잎처럼 조그만 목 선 가득 생선을 잡아온다는 것이다. 바닷길에 이골이 난 능숙한 어부라면 더욱 고개를 설레 설레 흔드는 그 위험한 곳에서 말이다. 노인은 바로 살아서 걸어다니는 전설이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노인의 눈 속에는 항상 퍼런 불길이 일렁인다고 생각했다. 들판이 휘어 지도록 먼 사천둑을 걸어가는 까마득한 모습이거나 우리가 놀고 있는 사장나무 그늘을 막 벗어나는 모습이거나, 일직선으로 앞만 보고 걸어가는 그 모습에서 나는 항상 타는 듯한 불 길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노인이 벙어리, 귀머거리라고 믿고 있었다. 누구한테 듣거 나 물어서 알아낸 사실이 아니라 아무 이유없이 그냥 굳어버린 생각이었다. 먼발치에서나마 노인이 누구를 상대한다거나 말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마을에서 가 장 특별한 외톨이, 아주아주 신비한 존재였다. 그날은 삽자루를 둘러멘 수자가 수걸이한테 양철통을 들려서 미꾸라지를 잡으러 가고 없 었다. 얼어붙은 논고랑을 삽으로 파올리면 겨울잠을 자던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다고 어른 들이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나는 연을 날리는 것으로 수자를 도울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가 슴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혼자서 얼레를 붙들고 있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시도 쉴새 없이 바람결을 살피며 얼레를 당기고 풀어주는 게 여간 긴장되는 일이 아닌데다 그것마저 대강 익숙해지자 몹시 심심했다. 얼레를 붙들고 못생긴 가오리연과 유리알처럼 맑고 차가운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눈이 감기면서 머릿속의 의식도 가물가물 흐려 지곤 했다. 언제 어디서나 나는 공상하기를 즐기는데 그러다가 학교에서도 곧잘 잠에 떨어져버리곤 했다. 깊은 잠에 빠져서 깨워도 정신을 못차릴 때가 있었다. 장날 팔려가는 새끼 돼지들처럼 덜컹거리는 리어카 속에서 머리통을 찧고 마구 흔들거리며 돌아오던 그 참담한 기분. 잠만 아니라면 나도 인생을 좀더 자신있게 살 수 있을 텐데... 나는 숨박꼭질도 잘 못했다. 숨자마자 금방 들킬 것만 같은 두려움에 숨이 차오르고 급기 야 기침을 터뜨리며 포기하고 마는 거엿다. 그네도 떨어질까봐 무서워서 타지를 못하고 오 자미놀이라면 나는 무조건 밥이었다. 남들처럼 한번 신나게 달려보기도 전에 어디선가 퍽 소리가 나버리곤 했다. 그래서 질근 감았던 눈을 떠보면 바로 내 가슴을 때린 오자미가 내 발등 위로 구르곤 했다. 그 무참하고 허망한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러나 얼레를 잡으면 깊은 잠엔 빠지지 않았다. 손목에 고리를 건 얼레와 팽팽하게 연결 된 연실의 긴장감이 쉴새없이 나를 흔들고 깨우며 성가시게 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반수 면상태의 의식 속으론 대개 슬프거나 걱정스런 일들이 떠오르곤 했다. 도대체 수자네 아버 지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말채찍을 흔들며 끝없이 이어진 하얀 신작로를 따라가다가 길 을 잃은 걸까. 주만이 아저씨처럼 술고래일까. 색소폰 아저씨처럼 폐병쟁이일까. 그렇지 않 다면 어른이 왜 길을 잃었을까. 하긴 어른이라고 길을 잃지 말란 법은 없겠지. 밤중에 길을 잃지 말란 법은 없겠지. 밤중에 길을 걷다 호랑이 귀신 도깨비를 만난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정말 뚜껑례의 점괘대로 죽어버린 것이라면 말집네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정말 그렇다면 지금 이연을 하늘 높이 띄운들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정말 수자는 어 디선가 아버지가 이 연을 발견하고 길을 찾을 거라고 믿는 걸까. 생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폐병쟁이 아저씨는 왜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이 불거 나 궂은 날에도 꼭 색소폰을 부는 건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아마 별쭝난 가계 때문일 것이다. 색소폰 아저씨는 바로 민대가리 할아버지의 손자인 것이다. 지금도 추수가 끝난 늦 가을이면 민대가리 할아버지는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늙은 몸에 머리를 새로 밀고 어디론가 멀리 제사를 지내러 다닌다고 했다. 어쨌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을 하늘 가득 색소폰 소 리가 흐르면 우리는 이불 속에서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걸 느끼곤 했다. 그런 날은 어 김업이 마음이 슬퍼지고 몸동작도 느려지는 바람에 학교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주만 이 아저씨의 엄마인 앞집 할머니는 그런 날엔 마당 한가운데 서서 고래고 래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부리곤 했다. "아이고오 듣기 싫어. 저누무 술 재촉하는 소리이. 아이고 몸서리야! 참말로 날궃이를 해 도 괴상하게 한다께로오! 워째서 민대갈네 저노무 씩시풍은 쌀을 한 섬이나 주고 샀는디도 방구만 풍풍 뀌기 아니면 온 동네를 초상집으로 만드느냐고 글씨이!" 앞집 할머니는 색소폰 소리를 꼭 '술 재촉하는 씩시풍 소리'라고 했다. 날이 궂은 날은 주 만이 아저씨가 하루 종일 눅눅한 이불 속에서 꼼짝을 하지 않거나 술집으로 달려가서 고주 망태가 되도록 마시거나 둘 중에 하나가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주만이 아저씨의 그런 행동 이 순전히 색소폰 소리 때문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정반대였다. 아니 그중에서 나는 특히 색소폰 소리를 아주 좋아했다. 때로 붕붕 방귀소리를 내는 건 틀림없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들어본 어떤 소리보다 황홀한 것이었다. 때론 무화과나무 아래 뽀얗게 고여 있는 비안개처럼 나직이 떠돌고 때론 해질녘 미루나무에 쓸리는 노을처럼 금방 사라져버릴 듯 애타게 떠도는 선율들이 그렇게도 감미러 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특히 색소폰 소리가 하늘을 메운 날에 엄마와 아버지는 꼭 들일을 멈추고 집에서 휴식을 하는 것이다. 휴식이랬자 아버지는 헛간의 연장들을 꺼내놓고 여기저 기를 손보거나 한도 끝도 없이 새끼줄을 꼬는 것이었고 엄마는 장롱을 모두 뒤져 우리의 양 말짝이며 옷을 깁느라 두 소은 더욱 바빴다. 그런데다 우리 아버지는 날만 궂으면 양쪽 옆 구리가 간지러운 이상한 병을 앓고 있었다. 피가 나도록 긁다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으면 손바닥에 침을 뱉어 바르거나 뜨거운 수건 찜즐을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더러 여유를 가지 고 담배연기를 길게길게 내뿜으며 평소와는 다른 눈길로 하늘자락도 바라보았고, 엄마는 우 리를 무릎에 뉘어놓고 머리 속의 이를 잡아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집안일은 모두 언니들 몫이기 때문에 엄마는 사시사철 아버지 의 발꿈치를 쫓아다니며 바람 센 거침 들판에서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엄마는 이미 아버지를 따라 들판에 나가버렸고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도 해가 지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 았다. 그 때마다 가장 외로운 사람이 바로 나였다. 할머니는 나를 쏙 빼놓은 채 면전에서 고 추들한테만 꿀단지를 긁어 먹이는 것이었고 이미 처녀인 언니들은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말 을 하며 수를 놓거나 라디오를 들으며 놀았다. 그렇지만 날이 궂으면 엄마가 하루 종일 집 에 있는 것이었다. 집밖 모든 것을 차단하는 빗소리와 바람소리만큼 감미로운 게 또 있을까. 엄마의 무릎에 엎어져서 머리카락 젖히는 손길을 따라 솔솔 황홀한 잠결에 들 때면 하늘에선 언제나 그 색 소폰 선율이 들려왔다. 하지만 색소폰 소리가 좋다고 폐병쟁이 아저씨가 우리 시찌니를 좋아하는 것까지 좋다는 건아니어싿. 할머니가 '고봉녀'라 부르고 오빠와 제남이는 '시찌나'라고 부르며 호적이름은 '조인희'인 시찌니는 서울의 일류대학에 다니는 여대생이었다. 딸을 외지로 내보내서 대학공 부를 시킨다는 건 집안을 망칠 징조라며 할머니는 죽자살자 반대했지만 아버지 역시 고집을 꺾지 않았다. 딸 중의 하나라도 제대로 교육을 시켜놔야 아버지가 늙어서 힘이 없어졌을 때 오빠나 제남이의 든든한 빽이 된다는 게 아버지의 계산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우리 아버지를 마을에서 가장 트인 개화된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자그마치 팔 남매 밥그릇만으로도 허리가 휘면서 딸한테 대학교육이라니, 하며 헛물켠다고 비웃기도 했 다. 어쨌건 시찌니는 우리 마을에 단 하나밖에 없는 너무너무 이쁘고 똑똑한 여자 대학생이기 때문에 우리의 커다란 자랑거리였다. 그런데 서울의 뒷골목에서 바람난 여자들을 위해 색소 폰을 불었다는 폐병쟁이 아저씨가 시찌니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고민은 지난 겨울에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들어버린 것 때문에 시작되었다. 입주 가정교사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한다는 시찌니는 언제나 방학이 되기 무섭게 짐을 싸 들고 돌아오곤 했다. 지난 겨울, 집에 온지 겨우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시찌니가 갑자기 커 다란 보자기로 내 머리통을 꽁꽁 싸매고 황금색 단추가 달린 오빠의 헌 교복까지 포개입히 며 아무 말 말고 자기를 따라가자고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따라나섰다. 본등과 우대미 골목을 다 빠져나온 시찌니는 동네마당조차 지나치고 있었다. 나는 이유없 이 가슴이 조금씩 떨려왔다. 윙윙 소리를 내면 가로 세로롤 사납게 휘몰아치는 칼바람에 먼 지 같은 눈발마저 시야를 마구 어지럽혀싿. 그런데 입을 꾹 다문 시찌니는 그 끝에 바다가 있는 들판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 이 세상의 모든 꿈과 환상에서 공포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뒤섞여 꿈틀거리는 그 바다에 대해서 언제쯤에나 설명을 다 할 수 있을까. 나는 동네마당에 서서 바다 쪽을 바라 보기만 해도 가슴 가득 차오르는 어떤 열망과 흥분을 느겼다. 그러나 시찌니는 왜 이렇게 눈가루까지 휘날리는 을씨년스런 날에 길을 나선 것일까. 이유없이 더럭 겁이 났다. 그래서 더욱 시찌니에게 대놓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바다에 이르는 길은 너무나 험했다. 황무 지인 큰벌과 터널처럼 햇빛이 들지 않는 소나무 울창한 거멍숲 때문이었다. 큰벌과 거멍숲 의 사잇길을 지나야만 바다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큰벌은 이름 그대로 숨낳은 모래구릉들이 널널하게 펼쳐진 삭막한 벌판인데 한때는 문둥 이들이 진을 치며 살았고 6.25 때는 수많은사람들이 죽어 묻혔으며 이후엔 천막을 치고 살 던 피난민들조차 다시 떠날 만큼 척박한 곳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 없이는 그 곳을 잘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렇게 날씨가 흐리거나 비바람이 부는 날엔 피난민들이 파묻고 떠난 애기 부덤들 에서 응애응애 귓속을 에는 듯한 울음소리가 터져나오곤 했다. 그리고 거멍숲은 그보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바람난 처녀 총각들이 데이트하러 가거나 닭서리한 것을 그슬 리러 갔다가 도깨비며 귀신한테 홀리는 건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 을씨년스런 날씨에 시W 니가 바로 그 길을 향해 나선 것이다. 나는 시찌니를 이해해보려고 머리를 핑핑 돌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유는 한 가 지인 것 같았다. 시찌니는 바다가 몹시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하 시찌니도 나처럼 바다 를 못 견디게 좋아했던 모양이구나.' 내려오자마자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부랴부랴 길을 나선 시찌니를 나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찌니, 서울에는 바다가 없지라이?" 친근감이 느껴진 나는 시찌니의 마음을 넘겨짚어서 물어보았다. "그럼, 바다도 들판도 없어. 그래서 갯바람 갈바람을 쐬지 않으니까 서울 사람들은 얼굴이 하얀 거야. 하지만 행남이 너야말로 세수만 자주하면 그 사람들보다 더 하얄걸?" "히히, 그래도 나는 학교 갈 때마다 세수한께로 우리 집 까마귀 대표는 제남인디라우." "맞아, 제남이 그 자식 까마귀가 보면 아저씨 아저씨, 할거야. 어쨌건 행남아, 오늘 이야기 아무한테도 하면 안되애, 알았지?" 시찌니가 갑자기 눈을 엄하게 하며 다짐을 두자 나는 선선하게 야, 하고 대답했다. 언니들 은 장날마다 가설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친구집에 마실을 가거나 일단 대문 밖으로 나갈 때는 제남이나 나 중에 누군가는 꼭 데리고 다녔다. 엉뚱한 곳에 가거나 쓸데 없는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받는 방법이었다. 시찌니도 단지 바다를 보고 싶었 을 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를 데리고 허우적허우적 바람을 헤쳐가는 것이다. 그리고 우 리야말로 어디건 안 데려가서 한이지 이런 일은 전부 횡재에 속했다. 제남이가 저는 왜 안 데려가느냐고 생떼라도 부리면 어쩌려고 뭐하러 이런 횡재를 함부로 떠들어 말하겠는가. 우리는 드디어 논밭이 펼쳐진 놀미대미 들판을 지나 쓸쓸한 황무지 모래벌판에 이르게 되 었다. 큰벌의 바람소리는 더 거칠고 황량했다. 더구나 센 바람에 모래까지 휘날려 시찌니와 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가슴까지 파묻고 게처럼 옆으로 걸어야 했다. 그래도 내 가슴은 맑고 화창하던 날보다 휠씬 높게 고동치는 것 같았다. 하늘도 땅도 뭔가 몹시 슬픈 듯한 날 씨 때문에 보이고 들리고 내 몸을 스쳐가는 모든 것들이 아주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지난 여름 우리 키를 넘도록 납작하게 쓰러져 있었다. 함부로 꺾인 꽃대궁이들도 무참했다. 나도 몰래 핑 하고 눈물이 돌았다. 나는 바람소리처럼 엉엉 신나게 울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시찌니의 목적지는 바다가 아니었다. 바람소리가 요란한데도 공기는 아주 훈훈해 서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보니 우리는 어느새 바다가 아닌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한 거멍 숲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에 내 혼이 한뼘이나 빠져나가 머리 위에서 휭휭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평평한 모래땅인 거멍숲에서 길을 잃으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둘레가 몇십리라는 캄캄한 숲속에는 그만그만한 모래구릉들뿐 길눈에 표식이 될 만 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갑자기 시찌니가 우리 언니가 아닌 거멍숲에 소속된 누 구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럴수록 나는 시찌니의 손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왜, 무섭니?" 나는 시찌니의 얼굴은 쳐다보지 않은 채 고개만 끄덕였다. 만약에 시찌니의 눈알이 휑하 게 둟렸거나 피를 흘리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나는 이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뻥 뚫려버린 것 같았다. "오늘 이야기 아무한테도 하면 안돼. 절대로! 알았지?" 시찌니가 새삼 다짐을 두었다. 시찌니도 목소리를 떨고 있었다. 아,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일까. 나는 너무나 무서워서 고개만 더욱 크게 끄덕였다. 발등으로 하얀 눈송이가 떨어지 고 있었다. 어느새 눈발이 망초꽃만큼 굵어져 있었다. 나는 많은 것을 그만 포기해버려야 할 까보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거멍숲 입구 구부러진 소나무 뒤에서 웬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소나무는 마을 처녀들이 명절마다 그네를 뛰러 다니던 그 소나무가 틀림 없는데 그 그림자는 너무나 새카맣고 낯선 것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무조건 시찌 니의 손을 잡아끌며 몸을 버팅겼다,. 그리고 끝내 감당할 수 없는 공포 때문에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 빨리 가! 빨리 집에 가잔께로. 아 무서, 무서워!" 나는 눈뜨는 일이 너무나 무서웠으므로 무작정 몸을 흔들며 발버둥을 쳤다. "이러지 마, 행남아 이러지 마 응? 잠깐만, 잠깐이면 돼. 저 사람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니까 잠깐이면 돼." 저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시찌니의 목소리는 너무나 간절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그러니까 언니는 도와줘. 잠깐이면 된다니 까." 시찌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울음이 섞인 것도 같았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시찌니의 등뒤로 몸을 숨겼다. 원래는 아버지 것이었지만 큰언니가 고쳐준 시찌니의 털오버는 감촉이 푸근했다. 나는 거기에 얼굴을 파묻고 시찌니의 다리만 죽어라 끌어안았다. 주로 시찌니가 무슨 말인가를 끝없이 하는 것 같았다. 그 그림자한테는 목소리가 없는 것 같았다. "가자." 드디어 시찌니가 돌아서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번엔 시찌니가 더욱 허겁지겁이었다. 어 찌나 빨리 걷는지 나는 금방이라도 엎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모래땅은 딛었다가 떼려고 하 면 곧 무너져버려 빨리 걷기에는 너무나 힘이 들었다. 그런데다 나는 머리통을 꽁꽁 싸맨 보자기 때문에 더욱 숨이 막혔다. 헉헉 저절로 빠져나온 혓바닥 위로 눈송이가 마구 몰려들 어왔다. 그대로 숨이 끊어져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그만 주저앉아 캑캑거리자 시찌니가 나 를 얼른 둘러업었다. 그리고 우리가 큰벌을 미처 빠져나오기 전이었다. "인희야아 인희야아아아아!" 거멍숲을 잘못 빠져나온 바람소리인지 아까 그 그림자의 울음인지 창자가 끊어질 듯 애통 한 그 목소리는 사나운 바람을 타고 머리칼처럼 마구 휘날렸다. 그것은 틀림없이 젊은 남자 의 것인데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같았다. 도망치듯 언니는 발을 더욱 빨리 놀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아우성처럼 더욱 세게 따라왔다. "인희야아아아 인희야아아아아아!" 시찌니는 힘이 풀리는지 등에서 나를 풀썩 떨어뜨려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눈이 쌓인 움 푹한 곳을 피해서 털썩 주저않았다. 빨갛게 상기된 시찌니의 양볼에 웬 물줄기가 줄줄 흘러 내렸다. 보자기가 벗겨진 시찌니의 머리에서도, 헉헉 숨을 몰아쉬는 입에서도 하얀 김이 모 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시찌니의 힘은 그렇게 완전히 빠져버린 것 같았다.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시커먼 거멍숲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때 나는 문득 폐병쟁이 아저씨가 저 눈보라를 헤쳐나올 수 있을까. 그 거멍숲을 나오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어떻게 되나 하는 난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환청이었을까. 바람을 타고 마구 휘 날리던 그 울부짓음은 우리가 들길을 다 건너고 동네마당에 들어서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시찌니는 이후로 오빠 방에서만 지냈다. 낮이나 밤이나 샬라샬라 하면서 오빠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리고 설을 쇠자마자 서울로 올라가버렸다. 어쩌다 골목에서 마주친 폐병쟁이 아저씨는 얼굴이 더욱 하얘진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색소폰 소리도 더욱 구슬프고 음울했다. 폐병쟁이 아저씨만 눈에 띄면 나는 무작정 가슴이 콩콩 뛰었기 때문에 골목길을 피해 다니곤 했다. 우리 집 순둥이인 니찌니와 오빠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텃밭 구석에 서 있는 뽕나무 밑에서 오빠가 손위 누나인 니찌니를 당장 때리기라도 할 듯 을러댔다. 니찌니가 시 찌니의 새 주소를 폐병쟁이 아저씨한테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모두 어른들은 모 르는 우리들만의 비밀이었다. 나는 동네마당에서 폐병쟁이 아저씨만 발견하면 몰래몰래 훔쳐보았다. 그 죄로 수자의 가 오리연을 띄워놓고 하늘만 쳐다보면 그날 거멍숲에서의 울부짖음이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나 폐병쟁이 아저씨만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내 걱정거리나 관심거리가 그 것만은 아닌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걱정거리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정작 봄방학 동안 나의 최고 관심거리는 3학년 때 여섯 반 중에서 상냥하고 예쁘 고 풍금을 잘 치는 유일한 여자 담임이었다. 선생님은 무엇보다 노처녀로 유명했다. 키도 호 리호리하고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상냥한 선생님이 왜 마흔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갔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죽도록 사랑하던 애인이 전쟁 때 죽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미국 유학을 가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속아서 결혼을 했는데 본부인이 있어서 돌아왔다느니 장관 아들한테 시집을 가서보니 정작 신랑은 정신병자여서 몰래 도망 쳐왔다느니 아주 흉측한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떠도는 소문은 다 그런 법이다. 중요한 사실 은 우리반 아이들만이 방과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있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 래서 우리는 3학년이 끝나는 날 종례시간에 졸업생들처럼 슬프게 울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더욱 슬펐다. 나에게 '알프스 소녀'와 '햇님과 달님'의 동화구연을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그 선생님이었던 것이다. 고내 대회에서 내가 이야기에 스스로 몰입되어 '그 러니까'라고 발음해야 될 것을 정신없이 '그란께로' 한다거나 '멈춰라!' 할 것을 '머커라!' 하 고 사투리를 남발할 때마다 다른 선생님들은 고개를 저으며 웃어젖혔다. 선생님은 그것을 정정해주려고 무던히 애쓰셨다. 그러나 내가 정작 학교대표가 되어 군대항 어린이 동화구연 대회에 나가는 날에는 엄지손가락을 빳빳이 세우며 속삭였다. "이야기만 실감나게 해라. 네 혀 짧은 사투리는 매력만점. 일품이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버스를 타고 툴툴거리는 돌밭길을 한 시간이나 달린데다 낯선 읍내 풍 경 때문에 어지러워서 뱃속의 것을 한 바가지나 토하기까지 했던 나는 그런대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생전 처음으로 먹어본 자장면. 국수도 아니고 라면도 아닌 그 것이 뒤집어쓰고 있던 그 시커먼 곤죽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나는 제남이 앞에서 자꾸 만 말더듬이가 되버리곤 했다. 어쨌건 선생님은 나의 완벽한 후견인이었다. 정말이지 선생님이 영영 전근을 가버린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나는 선생님이 방학 동안 가 있는 청오산 너머 선생님네 고향 쪽을 쳐다보았다.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아 청오 산 꼭대기 바위벽들이 발그레해져 있었다. 저 꼭대기 바위벽들이 발그레해지고 나면 곧 날 이 저물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서쪽으로 돌려 할머니의 친정 마을이 있는 저너머 쪽을 쳐 다보았다. 커다란 홍시처럼 새빨개진 태양이 어느새 저너머재를 반쯤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있던 볏짚가리 밑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따라 수자는 미꾸라지 요 리에 시간이 걸리는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곧 불안해졌다. 저녁때마다 나에 게는 중요한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고시랑쟁이 우리 할머니의 요강을 깨끗이 부셔다가 윗 방 윗목에 얌전히 놓아두어야 하는 것이다. 요강을 부시는 일만큼 모욕적인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더더구나 고추 달린 자격으로 할 머니에게 선별되어 윗방에서 기거하는 제남이가 내가 부셔놓은 요강에다 일을 본다는 것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집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것은 우리 집의 당연한 질서였다. 때때로 반발하 는 내가 오히려 내림에 없는 별종, 장차 뭐가 될지 알 수 없는 문제아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늘 계집애가 뒤꼭지에 피도 안 마를 때부터 따따부따하는 꼴을 보느니 일찌감치 남의집 식 모삭이나 보내버리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가오리연 때문에 수자의 종이라느니 그 집에서 아예 수걸이 동생이나 하면 서 살라느니 밥상머리마다 여기저기서 쥐어박는 소리에 귀가 따가울 지경인데 큰일이었다. 나는 재빨리 얼레를 가랑이 사이에 끼워놓고 몸단장부터 하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부터 다 리 밑에서 주워왔다거나 고무줄장수한테서 얻은 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으려면 동네마당에서 놀았다거나 볏짚가리 밑에서 연을 띄웠다는 눈에 보이는 증거만큼은 말끔히 없애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온몸에 달라붙은 지푸라기와 흙먼지를 털어내고 쑥대머리 속에 두 손을 쑤셔넣어 마구 빗질을 해대고 있을 때였다. 한순간 공기를 가르는 듯한 어떤 거대한 움직임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정체도 없이 느닷없고 맹렬했다. "아가." 맙소사! 그것은 분명 나를 향한 부름이었다. 머릿속이 돌덩이가 되어버린 듯 나는 멍청하 게 고객만 쳐들었다. 노인이었다. 그 때 그 순간에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노 인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노인이 들고 다니는 장대의움직임이 바로 느닷없고 맹렬 한 그것의 정체였던 것이다. 노인은 덜퍽 등짐을 내려놓고 그 구덕 속에서 길고 묵직한 무엇인가를 쑥 들어올렸다. 너 댓 마리가 한 줄로 꿰어진 구렁이였다. 손목만큼이나 굵고 회백색인 그것들은 아직 살아서 몸을 마구 꼬고 뒤틀며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느그 어메 생각하고 역부러 낚았은께 토장 풀고 푹 고거라. 알겄지야?" 어느새 가랑이를 빠져나온 얼레가 툴툴툴 보리밭을 지나고 냇둑을 건너 저만치 혼자 달려 가고 있었다. "아니 그라고 봉께 너는 낙천이 딸이 아니냐? 본등 조낙천이." 두 손을 등뒤로 감추고 혼이 빠져 있는 나한테 노인이 하늘을 다가리며 얼굴을 들이밀었 다. 노인은 벙어리가 아니었고 또 눈에더 파란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지금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그것을 가릴 방법이 없었다. 노인의 얼굴을 덮고 있는 탐스러운 수염이 금방 내 얼굴을 덮어버릴 것 같았다. 담뱃내 같기도 하고 비릿한 바닷내 같기도 한 냄새.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더구나 노인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고 있었다. 나는 무조건 뒷걸음질을 쳤 다. "그놈 참, 눈이 검실검실 느그 물색이 틀림없구나. 이름이 뮛이냐?" "해 행남이라, 조행남이." "허 참, 똑똑하고 이삐다. 옛다 어머니보고 할머니 밥상에 지져 올리라고 해라." 노인의 손에는 어느새 구렁이가 아닌 작달막하고 통통한 생선 꿰미가 들려 있었다. 배때 기가 노오란 황돔이었다. 노인이 구덕에서 어느새 바뀌치기를 한 것인지 그냥 요술을 부린 것인지 눈 깜짝할 사이였다. 그때 발자국 소리도 없이 다가온 수자가 사납게 눈을 빛내며 그 광경을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물속처럼 무겁게 손을 들어 어스름 저녁 하늘 속 으로 사라져가는 가오리연을 가리켜 보였다. 휙 나는 듯 몸을 돌리는 수자의 팔을 노인이 덥석 움켜잡았다. "아서라 놔둬! 그래야 올 한해 액땜이 되는 게다. 그것도 너무 늦었어. 아나, 자!" 노인이 다시 구덕에서 손을 뽑아올리고 있었다. 그 구렁이 꿰미였다. 두 말 없이 돌아서서 내달리기 시작한 나는 우리 집 대문을 걷어차다 말고 잠시 기절해버 렸다. 노인과 수자가 낄낄거리며 놓아준 구렁이들이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쫓아와 내 발꿈치 를 물어버린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저녁 집에서 나는 완전히 공주 대접을 받았다. 내 손에는 여전히 살려주면 무엇이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던 동화 속의 그 황금 물고기처럼 예쁜 황돔 꿰미가 들 려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명절이나 제삿날 아니면 누군가의 생일에나 구경할 수 있는 고급 생선이었다. 내가 늦은 것을 알고 슬쩍 대문을 걸어버린 제남이만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실 컷쥐어박혔다. 내일모레면 드디어 초등학생이 된다고 요즘 온통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설치 더니 쌤통이었다. 노인의 선물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할머니와 아버지였다. 도대체 네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기에 노인의 눈에 띄었는가, 하고 할머니는 몇번이나 다시 물었다. 그리고 솔직한 내 대 답에도 관대했다. 사실 나는 그날 아침에도 식구들의 집중공격을 한몸에 받은 처지였다. 늦잠을 자던 나는 다짜고짜 샘가로 들려 갔다. 찬물로 세수하고 정신을 차리기 전에는 밥먹을 생각을 말라는 거였다. 그러나 차디찬 대얏물에 손을 담그고 보니, 마을 앞 웃뫼산이 그렇게 무거울까. 식 구들이 밥을 먹느라 안방의 숟가락 부딪는 소리가 요란해도 나는 물에 담근 손이 빨갛게 얼 도록 들어올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넋이 빠져 있었다. 나는 악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뭘 잘했다고 우느냐' '가시나 저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니 아예 거멍숲에다 갖다버려라' '사흘망 굶겨라,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나 보게'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어른들이 저마다 밥도 굶은 나한테 십팔번 한두 마디씩 했던 거였다. 하지만 할머니와 아버지는 아침일 같은 건 벌써 잊어버린 것 같았다. "허 참, 자식을 여럿 기르다봉께 벨일이 다 생긴다께!" 아버지는 헛웃음을 치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몹시 기쁜 얼굴이었다. 작년에 내가 동화 구연대회에 나가서 입상을 했을 때와 같은 얼굴이었다. 아마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나를 확 실히 바보로 포기했던 게 틀림없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몹시 놀란 얼굴이었던 것이 다. 아버지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내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또 한번 내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본 것이었다. 3. 우렁이 색시 할머니와 아버지의 그 기쁨이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얼마 후에야 알게 되 었다. 우선 나에 대한 할머니의 태도가 백팔십도로 달라졌다. 새 학년이 되고 심은희 선생님도 전근을 가지 않고 수자도 다시 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는 학교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을 새 담임으로 맞게 되었다. 성함 이 지호기여서 별명이 '쥐고기'였는데 훈육주임으로 전교에서 벌써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심은희 선생님이 새로 맡은 3학년 3반 교실을 창문으로 들여다보며 얼쩡거리다 풀이 죽어서 돌아오곤 했다. 할머니는 우리 담임보고 똑똑하다고 기회만 있으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할머니 는 제남이의 입학식 이후 날마다 제남이와 함께 등하교를 했는데 조회 때마다 우리 담임이 마이크를 잡고 전교생한테 훈계하는 걸 보고서였다. 그러나 우리 담임 이미 결혼했다는 사 실은 할머니를 상당히 실망시키고 말았다. 첫눈에 손녀사윗감으로 점찍었었다는 것이다. 나 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마다 1학년 교실 앞 양지쪽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그다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치마를 걷어올리고 고쟁이에 붙여놓은 주머니에서 연초봉지를 꺼낸 다음 그것을 헌 종이에 말아 피울 때는 도망이라도 가버리고 싶었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국어공책에 필기를 하느라 여기저기서 가끔씩 코 들이마시는 소리뿐 쥐죽은 듯 조용한 때였다. 어느 순간 기척도 없이 교실문이 드르륵 열렸다. 우리는 놀라기도 했지만 이 숨막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 너무나 반가워서 일제히 문 쪽을 돌아보았다. 선 생님도 분필 든 손을 칠판 위에 그대로 둔 채 얼굴을 돌렸다. "안녕하신가라?" 얼굴만 삐죽 내민 사람은 뜻밖에도 할머니였다. 그 사이 나를 돌아보는 아이들도 몇 있었 다. 나는 웬일인가 싶어 이유도 없이 가슴이 금방 콩콩콩 뛰었다. "쩌어기 쩌어기, 오라 쩌기." 할머니는 손을 들어 교실 안을 마구 휘젓더니 내 얼굴 위에서 딱멈추었다. "저어기 행남이, 조행남이가 바로 내 손주딸이요. 선상님 우리 손주딸 공부 갈차주시니라 고 얼매나 고생이 많으신가라." "예예, 아 이예." 할머니가 갑자기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인사를 하자 슬리퍼짝을 딸딸거리며 쫓아간 선생 님도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그 사이 할머니가 무엇인가를 쑥 내밀었다. "운동장에서 달려댕김시롱 소리지르랴 교실에선 분필가루 마심 시롱 공부 갈치시랴 얼매 나 목이 아프시겄소이. 그란께 이것 하나깨 잡수시고 하시시요이. 오늘 아침 둥지에서 뜨뜻 한 걸 꺼내왔은께요." 할머니가 내민 것은 노란 달걀 두 개였다. 선생님은 엉겁결에 할머니의 두 손을 잡았다가 민망해서 그걸 다시 밀어내려고 했다. "궨찮습니다." "아따 참말로, 이 핵교에서 제일 잘생기고 똑똑한 선상님이 바로 우리 손주딸네 선상님이 랑께 나도 재미가 나서 며느리 몰래 숨카갖고 왔는디 그러세라, 서운하게. 장가만 안 갔으믄 내가 손녀사위 삼을락 했단께 그냥." 할머니가 눈 흘기는 시늉을 하자 선생님도 할 수 없이 따라 웃었다. 선생님의 손에는 어 느새 달걀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행남아, 정신 바짝 차리고 선상님 말씀 잘 들어라아. 그라믄 선상님 이만실례할란께로 고 생 많이 하시시요이." 할머니는 정색을 한 얼굴로 나한테 일갈을 던진 다음 선생님한테 다시 허리를 반으로 꺾 어서 인사를 하고 드르륵 문을 닫았다. 달걀 두 개를 받아들고 돌아선 선생님은 몹시 난처 한 얼굴이었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었다. 할머니는 그 달걀 두 개로 그동안 나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대해서 사과가 되었다고 생각 하는 것 같았다. 일요일이었다. 전에 없이 다감하게 나를 불러세운 할머니가 서운한 데가 없는지를 요모조 모 꼼꼼히 살폈다. 오빠와 제남이의 인물평을 할 때마다 '서운한 데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가 할머니의 입버릇인 것이다. 할머니는 동백기름을 발라 머리를 다시 빗고 거기에 두어 됫박쯤 하얀 연초 봉지가 담긴 　지를 이고 있었다. 새로 풀먹여 다듬은 무명치마를 허리끈으로 동동 치켜서 묶었는데 엉 덩이가 방게처럼 둥실하게 부풀어 있었다. "가자." 어떤 설렘 같은 것이 느껴질 정도로 낮고 짧으나 탄력있게 말한 할머니가 내 손을 끌었 다. 나하나테 황돔꿰미를 건네주던 하얀 수염의 그 벙어리 노인에게 가자는 말인 줄 단박에 알아챘던 것이다. 수자가 그 구렁이들을 정말 토장물에 고아 먹었는지, 나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만 꿈속에서 있었던 일처럼 잊어버리고만 싶었다. "아, 개 잠 묶어라!" 제가 먼저 좋아라 발길을 어지럽히는 방울이를 가리키며 할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찌니 대신 마루 위에서 구르듯 달려온 아버지가 방울이의 목걸이를 거머쥐며 할머니의 발 길을 비켜드렸다. 할머니가 그만 화를 내며 다찌니를 노려보자 다찌니도 지지 않고 아버지 몰래 혀를 날름날름하면서 할머니를 놀렸다. 나는 노인이 우리 마을 어디쯤에 살고 있는지를 아직 모르고 있었다. 쌀바가지를 머리에 인 할머니는 본등 골목을 다 돌아서 잿등을 타고 다시 아리대미로 향했다. 그러나 아리대미 어느 집으로도 들어설 기미가 아니었다. 방게처럼 부푼 엉덩이를 실룩이며 한 손은 머리 위 의 쌀바가지를 붙들고 또 한 손은 골목이 좁다고 휘저으며 끝없이 걷기만 했다. 그리고 나 는 할머니가 아리대미를 다 빠져나올 때에야 속으로 세상에!하고 탄성을 질렀다. 마을 뒤께, 사천이 굽이도는 둑 아래 버섯처럼 나직이 엎드린 조그만 외딴집, 나는 그 집 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 키 큰 미루나무 한 그루가 사시장철 씽씽거리며 바람소리를 내는 조그마한 그 오막살이는 내가 사천둑으로 염소 풀 뜯기러 다닐 때마다, 그 리고 사천 서답내로 멱감으러 갈 때마다 바라보던 것이었다. 버섯 같은 지붕으로 박넝쿨이 올라가고 굴뚝엔 연기가 피어오르며 더러는 낮은 탱자나무 울타리에 하얀 빨래들이 널리는 것도 보았지만 사람이라곤 그림자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시사철 생선 말리는 장대가 깃발처 럼 하늘 높이 서 있었지만 나는 그것이 노인의 집이리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기분이 아주 묘해졌다. 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그 오막살이를 바라볼 때마다 두 뺨이 불그레한 아주 이쁜 새각시와 그에 걸맞은 휜칠한 새신랑을 연상하곤 했던 것이다. 외딴집의 대나무 사립은 비스듬히 젖혀져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한번 돌아본 다음 치맛 자락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마당 한가운데까지 쑥 들어섰다. "성님, 기시오?" "......" "성님! 시숙님! 아무도 안 기시요오?" 조심하느라 모깃소리처럼 조그맣게 외치던 할머니가 빈집의 고요한 겁이라도 먹은 듯 문 득 심호흡을 했다. 무엇인가를 단단히 결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니임! 시숙욱! 성니임! 성니임!" 조심하느라 모깃소리처럼 조그맣게 외치던 할머니가 빈집의 고요에 겁이라도 먹은 듯 문 득 심호흡을 했다. 무엇인가를 단단히 결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니임! 시수욱! 성니임! 성니임!" 할머니가 갑자기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 심하게 굴신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발작하 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야 기겁하듯 놀라며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발작 때문이 아니라 할머니가 외치는 말의 뜻, 벙어리 노인이 집을 향해 할머니가 분명 '시숙'이 라 외쳤던 것이다. 그러니까 할머니는 바로 벙어리 노인한테 시숙님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 리고 형님은 또 무슨 소리인가. 벙어리 노인한테도 아내가 있었더란 말인가. 나는 아버지의 외가나 우리의 외가 쪽말고는 친척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버 지가 삼대 독자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숙이라면 촌수는 정확히 모르지만 어쨌든 친족에 게 붙이는 호칭이 아니던가. 몇마디 외침만으로 그만 배가 고파진 사람처럼 할머니는 아예 토방마루로 다가가 쌀바가 지를 내려놓고 거기에 척 걸터앉았다.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 모양이었다. 나는 어 서 돌아가고 싶었다. 아니, 벗어나고 싶었다. 마당이 너무 잘 다져지고 깨끗해서일까 아니면 쥐죽은 듯한 고요 때문일까. 마당에 어른거리는 아침 햇살이 너무 부셨고 나는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이었다. 이 이상한 수수께끼 같은 빈집에서 자고 말면 다시는 못 깨어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아무 말 없이 슬그머니 돌아가버릴까 아니면 빨리 가서 숙제를 해야 된다고 말 씀을 드릴까 속으로는 여러 가지 궁리를 하면서도 할머니의 시야를 어슷하게 벗어난 부엌 앞 절구통 위에 가만히 걸터앉았다. 문틈으로 내다보인 부엌은 아주 정갈했다. 부뚜막의 가 마솥이며 물동이는 물론, 얼마나 오랜 세월의 빗질에 닦였는지 울퉁불퉁한 흙바닥에서도 반 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문득 노인의 아내는 우렁이 각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반짝 맑은 빛이 튀는 부엌살림이 그런 환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 누구하고도 잘 어울리지 않는 노인에게라면 우렁이 각시가 정말 제격일 것 같았다. 구덕 가득 생선을 잡아 짊어지고 낚시장대를 출렁이며 젊은이처럼 성큼성큼 돌아오던 노인이 "이 괴기를 다 누구랑 묵으가?" 하고 혼잣말을 하니까 "나하고 묵제" 하며 우렁이 각시가 따라왔을 수도 있는 것이다. 노인 이 낚시질을 가고 나면 껍질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물을 긷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쌀을 씻어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하얀 쌀밥을 짓는 우렁이 각시! 정말 그럴듯했다. 나는 살강 아래나 아궁이 속이 아니면 나뭇단 밑 어딘가에 숨어있을 우렁이를 찾아보려고 슬며시 절구통에서 내려섰다. 그때였다. 우렁이 각시보다 더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마당에 서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새색시처럼 눈을 내리깐 채 쉴새없이 입술을 달싹거리는 '쫑알댁' 이 보름달만한 물항아리를 이고 비스듬히 젖혀진 대발 사립으로 쓱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전설 속의 살아 있는 주인공, 늙은 진돗개가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 들어선 것이다. 얼마나 야위고 늙었는지 늘어진 가죽 속의 등뼈며 엉덩이뼈의움직임이 낱낱이 드러나 보이 는 그 개는 바로 실성한 쫑알댁의 그림자 벅구였다. 쫑알댁은 눈을 내리깐 채 무엇인가를 중얼거리느라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쫑알 댁은 언제나처럼 말갗게 빨아 손질한 치마 저고리에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을 한올 흐트러 짐이 없이 곱게 빗어 쪽을 찌고 있었다. 동그란 물항아리 역시도 햇빛이 마구 부서져 튀길 정도로 반질반질했다. 나는 이내 터질 듯한 풍선이라도 껴안은 기분이 되어버렸다. 할머니의 새된 외침에도 귀 먹은 듯 괴괴하기만 하던 오막살이가 갑자기 어떤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뻑적지근해지고 있 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쫑알댁이 바로 우렁이 각시였더란 말인가. 나는 입을 벌린 채 넋이 빠져 있었다. 먼길을 다녀오느라 지친 것인지, 낯선 사람이 들건 나건 아무 상관 없는 것인지 벅구는 한없이 게으른 걸음으로 느릿느릿 닭장 옆의 제집으로 들어가버렸다. "성님, 나요. 나 본등 저너머댁이요. 이렇게 일찍 어디 댕겨오는 길이요?" "큰벌 거멍숲에 비손 댕겨오는 길이네." 언제 마루에서 내려온 것인지 할머니가 성큼 길을 막아서며 묻자 언제 한번 쳐다보기라도 했던 것인지 쫑알댁은 슬쩍 비켜가며 심상찮게 대꾸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날이면 날마다. 도대체 시숙님은 삼시 세 끼를 워치케 하고 사신다요?" "끼니를 못 때웠으믄 아즉 살아 있겄능가?" 실성한 쫑알댁은 하루에도 몇번씩 항아리에 맑은 물을 받아 이고 큰벌 황무지를 지나 거 멍숲까지 용왕님께 제사를 지내러 다녔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거멍숲의 가장 큰 소나무 아 래에 항아리를 받쳐놓고 그 항아리 속의 용왕님께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다. 용왕님이 데려간 아들들을 돌려달라고 기도를 드린다는 얘기도 있고 쫑알댁이 바로 무 슨 일로 용궁에서 쫓겨나온 공주였다는 황당한 얘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속으로 그 황당한 이야기 쪽을 믿고 있었다. 언젠가 추석에 송편이랑 우린 감이며 대추 등을 싸들고 거멍숲으로 그네 타러 간 적이 있는데 아이들을 따라 처음으로 쫑 알댁이 기도한다는 소나무 밑에까지 가보았다. 그때 쫑알댁은 허리를 반듯이 펴고 앉아 항 아리 속이 아닌 바다 멀리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보았는데 쫑알댁의 얼굴엔 기도하는 간절함보다는 사무친 그리움 같은 것이 휠씬 절절하던 것이다. 어쨌건 아이들은 정신병자나 동냥치 같은 행려들만 보면 돌멩이를 던지며 따라다니기를 좋아했는데 쫑알댁만큼은 어림도 없었다. 쫑알댁이 두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달싹이며 항아 리를 이고 가면 어른들도 저만치 길을 돌아갔다. 쫑알댁은 일부러 사람이 뜸한 길로만 다니 지만 어쩌다 길에서 사람을 만날 경우 그 길로 다시 돌아가 항아리에 새 물을 받아왔다. 이 른바 부정을 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쫑알댁의 기도를 방해하려 들지 않았 다. 그것은 철없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엿다. 마을의 불문율인 셈이었다. 더더구나 쫑알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벅구는 나보다 네 살이나 많은 열다섯살이라 던가, 개로서는 파파할아버지 나이인데 젊었을 때부터 주인을 살려낸 개로 아주 유명했다. 그 시절에 쫑알댁은 정신이 나갈 때마다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게 일이었는데 그때마다 벅구 가 쫓아가서 쫑알댁을 건져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비록 늙었지만 느릿느릿 벅구가 지나가면 한없이 경외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학교에서도 우리 마을 벅구를 자랑할 정도였다. 그런데 벅구와 쫑알댁이 바로 도깨비와 친구인 그 노인의 가족이었다니. "성님, 언제까지 이렇게만 살 생각이요? 인자는 지발 늙은 영감님 생각도 잠하고 그러씨 요." "저너머댁하고는 아무 할 이약이 없은께로 아무 상고나도 말더라고이." 중얼중얼 쉴새없이 달싹거리는 입술 사이로 언뜻 모진 듯한 소리를 던져놓고 쫑알댁은 어 느새 집 뒤안으로 사라져버렸다. 만사에 거침이라곤 없던 우리 할머니도 뮌가가 몹시 조심 스러운 듯 망설이더니 뒤안으로 따라갔다. 나도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몸을 가리며 살며시 따라갔다. 뒤안은 제법 넓었다. 돌틈에서 새나오는 조그만 바가지샘은 키 큰 미루나무 밑에 있고 무 엇을 심었는지 알 수 없는 텃맡 한쪽에서 엉성한 모란나무 몇그루가 서 있는데 그 아래 붓 끝처럼 뾰족한 새싹들이 흙껍질을 뚫고 올라오는 게 보였다. 쫑알댁은 항아리를 샘가에 내 려놓고 물을 끼얹은 듯 뒤 지푸라기를 뭉쳐서 만든 노란 수세미로 쓱쓱 닦기 시작했다. 작 년 가뭄으로 마을마다 우물이 말라서 해군 함대까지 동원되고 대전에서 이 땅끝까지 식수차 가 날라다준 물을 먹느라 난리여삳. 마을이 생긴 이래 물 걱정을 해본 적이 없다는 우리 마 을도 우물마다 두레박 끈을 두 배나 늘이고도 밤을 새워야 겨우 먹을 만큼의 물을 긷는데, 쫑알댁의 바가지샘은 앉아서 허리도 구부리지 않고 푹 떠올릴 수 있었다. "하늘에 가뭄이 들믄 선녀들이 땅으로 물 길러 온다등마 바로 성님네 그 바가지샘이었든 갑소." 할머니가 말을 걸어도 쫑알댁은 못 들은 체했다. "우따메, 그라고 봉께 이것이 시방 솔뿌리 아니요." 무엇인가 더 할말을 찾아 망설이던 할머니가 탱자나무 울타리 앞으로 우르르 달려갔다. "그랑께 이것이 시방 본등에서 갖고 온 그 솔뿌리가 맞지라? 하이고 우리 용남이 애비는. 아니 낙천이는 지금도 밥맛만 없으믄 옛날 성님네 솔김치 노래를 그렇게도 부르는디, 이것 이 아직도 이렇게 영락없이 살아 있었고만이라." 부추싹인 듯 바늘처럼 가늘고 촘촘한 파란 싹이 그렇게도 반가운지 할머니는 흙바닥에 엎 어지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쫑알댁은 듣는 척도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다시 풀이 죽는 듯 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무슨 일에나 서슴없고 당당하던 할머니의 이상스레 조심스럽고 풀죽은 모습이었다. 쫑알댁이 부엌 뒷문의 고리를 풀고 부엌으로 들어가자 할머니도 따라 들어갔다. 부엌은 나까지 따라 들어가기에는 좁은 것 같아삳. 나는 문짝 옆 소금동이 곁에 가만히 붙어섰다. 항아리를 살강 밑에 엎어놓고 아궁이 앞으로 다가가던 쫑알댁이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 리고 다시 유심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야는 맹회 동생인가." "하이고 성님. 우리 맹회를 워치케 기억했등갑소이. 그 그란디 맹회는 맏인께로 지금 스물 네살 되았고 쟈는 일곱째, 딸로는 막내요. 그라고 봉께로 맹회가 쟈만 했을 때 성님이랑 시 숙님이 업어주고 코닦아주고 오죽 이뻐했소. 그 , 그란디 벌써 큰애가 되어 여읠 일이 태산 같소. 지금은 쟈 밑에도 아들이 또 하나 있은께로 자그만치 야닯이라 야닯, 아들 둘에 딸이 여섯이나 돼삐리요. 우리 낙천이 등골 휘어지는 사정을 그 누가 알까라." "그래" 내가 명회 동생이냐고 묻는 쫑알댁의 반응이 그렇게도 반가운지 할머니는 말까지 더듬었 다. 할머니가 그 와중에도 아버지 등골 빠진다는 십팔번을 기어이 집어넣자 쫑알댁이 나를 또 한번 슬쩍 건너다보았다. "모두 한 물색으로 자그만치 야닯, 뭐라 해도 저너머댁이 원풀이 했구마." 나는 누군가를 바로 쳐다보는 쫑알댁의 눈빛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엷은 물기가 도는 맑은 눈이었다. 실성한 눈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할머니도 처음부터 여간 조심하 지 않았지만 실성한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나는 하얀 수염의 노인도 벙어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그 눈속에서 파란 불길이 일렁 이는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네마당 볏짚가리 밑에서 노인ㅇ느 구렁이 꿰미를 건네주며 분명 말을 했던 것이다. 본등 조낙천의 딸이 아니냐며 나를 알아보는 눈에서 파란 불길은커녕 오히려 쫑알댁처럼 어떤 물기 같은 것을 나는 분명 보았었다. 그렇다면 내가 알 고 있다고 믿는 것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뮌가가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정말 난치병자 같은 낮잠쟁이인데다 제남이 같은 바보는 아닐까 하는 평소의 의심이 또 생겼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까만 무쇠솥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쫑알댁은 노오란 솔가리를 갖다놓 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잠깐 부엌 옆에 붙어 잇는 광으로 들어가더니 망치자루만 한 것 세 개를 들고 나왔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궁금해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어싿. 그런제 쫑알댁이 그것에 물기를 묻힌 다음 무쇠솥 뚜껑을 열고 그 속 한 귀퉁이에 슬그머니 집어넣는 게 아닌가. 쫑알댁은 도끼비 방망이처럼 막대기를 삶아먹고 살았더란 말 인가. 나는 또다시 깃을 치듯 속으로 놀라고 있어싿. 그때 어느새 나갔었는지 할머니가 마루 에 내려놓았던 쌀바가지를 들고 와서 조심스레 쫑알댁 곁에 앉았다. "성님, 실은 시숙님이 저아를 워치케 알아보시고 귀한 괴기를 보내싰길래, 아참에 우리도 차장보는 것이 도리겄다. 생각하고 그냥 이렇게, 낙처이는 지가 직접 찾아 뵙고 그동안 격조 했든 것 용서도 빌고 그랄란다고 합디다만..." "낙천이가 뮛 땀시 용서를 빌고 말고 한다등가?" "에라 참말로 성님, 우리가 울타리도 없는 한집이나 같은 디서 자식 기름시롱 니 것 내 것 따로 가렸습디여. 자랄 때는 그래놓고 정작 어른이 되아서는 나 몰라라 하고 살려니 심 정이 오죽하겄소오." "그런 말 말게. 지지난해 사라호 태풍 불었을 때 지붕 고치라고 이엉나람 실어다논 것도, 해마다 새 이엉에 새끼줄통 갖다논 것도, 해마다 이쌀 나오면 이쌀, 보리쌀 나오면 보리쌀 퍼다논 것도 다 낙천이 짓이란 것 우리도 알고 있어. 우리고 사방까지 곡식 끼니 허고 사는 것이 다 낙천이 덕인 것 다 알고 있어. 하제만 아는 척하믄 그아성미에 더할께미 우리도 그 냥 입 꾹 다무는 것이여. 용서를 빌라믄 우리가 빌어사제." "하이고 성님은 뮌 그런 말씸을, 명절 때마다 제사 때마다 안 잊어불고 우리 대문간에다 제일 좋은 상품으로만 민어에 조기에 준치까지 귀한 괴기꿰미만 걸어온 사람은 누군디 그럼 말씸을 하신다요?" 할머니가 따지듯 말하며 살금살금 쫑알댁의 등뒤를 돌아 살강 선반 위에 어ㅠ어진 바가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바가지에다 연초와 쌀을 슬쩍 부어놓고 돌아섰다. 가장 중요한 일을 마친 듯 할머니는 한결 가뿐한 몸짓이었다. 쫑알댁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타들어 가는 솔가리의 맑은 불길만 무연한 눈길로 바라보며 이따금씩 부지깽이를 젓고 있었다. 너무나 열심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싿. 두 사람의 이야 기대로라면 아버지와 노인의 서로 상대방의 집에다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갖다놓는다는 것이 다. 그것도 서로 몰래. 그리고 서로 몰래 갖다놓지만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는 빤히 알고 이 싿. 왜 그러는 건가. 어른들이 왜 그런 빤한 장난을 하는 걸까. 콩 한조각만 얻어먹거나 나 눠줄 일이 생겨도 우리 집에서는 할머니가 밥상머리마다 재삼 재사 방송을 해서 우리는 귀 가 아프도록 그 사실과 이유와 평가를 들어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손수 엮고 꼰 이엉과 새끼줄을 남의 집에 그냥 주는데 그것이 보통 일인가. 쌀을 퍼주어야만 사먹을 수 있는 고 급 생선이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대문간에 그냥 매달려 있는데 그것이 보통 뉴스거리인가. 그런데도 나는 아직 그런 일에 대한 이야기라곤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 중에 상대방의논에다 서로 볏단을 져다놓은 의좋은 형제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버지와 노인이 정말 삼촌과 조카 사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그런데 왜 무슨 사연으로 서 로 모른 척하며 사는 걸까.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아버지는 세상이 다 아는 삼대 독자이니 까. 어쨌건 할머니의 말을 분석해보면 명희 큰언니가 나만 했을 무렵까지 두 집안이 아주 가깝게 지낸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수자네만큼이나 복잡하고 이상한 이야기가 바로 우리 집에도 있었더란 말인가. 드디어 김이 펄펄 솟는 무쇠솦에서 뜻밖에도 달콤한 고구마 냄새가 나싿. 언제 고구마를 씻어 안쳤는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쪼알댁은 마지막 솔가리를 숙 밀어넣고 빗자ㄹ로 싹싹 부엌바닥을 쓸었다. 그리고 솔가릿ㄷ짐 옆에서 나무로 짠 상자를 꺼내더니 뚜껑의 먼 지를 털었다. 그때 할머니가 재빨리 치마를 걷어올리고 고쟁이의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쑥 끄집어내었다. 연초를 싸기 좋도록 알맞게 자른 종이뭉치였다. 그중에 두 장을 부뚜막 위에 펼치자 쫑알댁이 상자 소그이 연초를 한줌 올려놓았다. 두 사람은 그것을 하나씩 들고 열 손가락을 교묘히 움직이며 고르게 말더니 끝부분을 혀 끝의 침으로 붙였다.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킬킬킬 웃음을 터뜨렸다. "영감 죽고 담배가 낙일 때, 괜한 성님이 따라 피우다가 시숙님한테 쫓겨난 일 생각나요? 생각하믄 그래도 그때가 좋았소. 무서운 중모리고 죽자사자 일해도 자고 나면 개운하고." 대꾸 없이 눈살을 찌푸리며 엎드려서 솔가리가 타버린 잿불을 헤집고 연초말이에 불을 댕 긴 쫑알댁이 그것을 깊숙이 빨아 마셨다. 할머니도 갑자기 갈증이 난 사람처럼 연초말이를 입에 물고 조급하게 집게손을 벌렸다. 이윽고 빨갛게 달아오른 쫑알댁의 담배를 받아든 할 머니가 걱기에 입을 대고 허겁지겁 불을댕겼다. 할머니가 깊숙이 빨아든인 연기를 푸우하고 내뿜자 쫑알댁도 다시 한번 깊숙이 빨아 마셨다. 그리고 연기 대신 한숨처럼 말해싿. "나는 딴 세상 사람일세." "......"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쫑알댁이 난데없는 한마디에 할머니는 놀란 붕어처럼 담배 빨려던 입만 쫑긋 내밀었다. "나는 몸뚱이만 이승에 있제 딴 세상 사람이네. 이러지 않는다고 내가 자네 맘을 모르겄 능가, 그러믄 됐은께로 우리 그냥 딴 세상 사람겉이 잊어불고 살드라고. 날 생각커등 지발덕 분, 낙천이한테도 그렇게 이르고." "성님, 지가 뭣을, 아니 우리가 뮛을 많이 서운케 했는가라?" "뮌 말인지 다 암시롱 그러능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벌써 이승을 떠난 사람일게. 단지 이승에 붙잽힌 몸뚱이 땀시 못다 한 넋풀이 허느라고 눈앞에 왔다갔다할 뿐이네, 그랑께로 지발 다시는 이러들 말더라고." "성님, 그 심정이사 백번 알고말고라. 안께로 지금까지도 모른 드끼 살아왔고라. 하제만 사람이 위치케 이렇게만 살 수가 있다요? 성님이랑 시숙님 이 동네서 사시는 것 빤히 알고, 다 늙은 몸으로 의지가지없이 사시는 것 빤이봄시롱 워치케 모른 척 이대로만 살 수가 있겄 냔 말이요." 할머니가 아침에 손목을 걷어붙이며 덤벼들 듯 말했다. 그러나 쫑알댁은 조용히 그러나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 심정 알 수 있으믄 됐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그것 한 가지만 알아주소. 그러고 그걸 안다믄 내가 왜 이러는 중도 다 알겄제? 제발 저너머댁이 이해를 하소." 그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는지 귀밑의 턱과 뺨에 솜털이 부스스 일어난 채로 발딱 일어선 쫑알ㄷ개이 김이 잦아진 솥뚜껑을 살짝 젖혔다. 솥뚜껑에 눌려 있던 뜨거운 김이 다시 한번 솟구쳐올랐다. 그런데 아까까지는 분명 고구마 삶는 냄새가 났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눈 깔사탕이며 사이다며 껌의 향기에 버금할 만한 냄새가 바로 그 가마솥에서 나는 거엿다. 바 다 냄새, 작년 가을소풍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본 마른오징어와 비슷 한 냄새였다. 나는 쫑알댁이 말한 것 이상으로 어떤 사연의 아우성이나 울부짓음 같은 것을 들은 기분 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직 그 맛있는 냄새가 도대체 무엇인지, 나도 먹어볼 수 있을지 하는 의문만으로 머릿속이 꽉차버렸다. 그 냄새에 그냥 정신이 홀려버렸다. 나는 쫑알댁의 손짓 하나 발길 하나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쫑알댁은 나무청 솔가릿단 밑에서 지푸라기 들을 주섬거리다가 다시 광으로 들어가서 회종이를 찢어왔다. 무엇을 하려 고 그러는지 꼼꼼하게 들여다보며 탁탁 먼지를 털고 그것도 모자라 행주로 싹싹 닦아내더니 부뚜막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부뚝막에 한쪽 발을 척 올려놓더니 가마솥에서 뜨거운 것을 꺼내려고 얼굴을 뒤로 젖히며 한참이나 손을 까닥거렸다. 드디어 무엇인가를 쑥 들어올렸다. 개뼈다귀를 길게 늘여놓은 것 같은 아까 그 막대기였다. 나머지 두 개까지 집어 올린 쫑알 댁이 그것을 회종이에 곱게 싸며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는 너무나 의외인데다 수줍어서 쫑 알댁을 맞이해야 할 것인지 외면해야 할 것인지 모른 채 허리만 비비 꼬았다. "안즉 뜨겁다아." 호호 부는 시늉을 하며 다가온 쫑알댁이 내 키에 맞추려고 엉거주춤 주저않았다. "아무리동기간이라고 맹희랑 꼭 찍어놨구나. 너는 이름이 뭣이냐?" "행남이라, 조행남이." 나는 동네마당에서의 노인에게보다 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뭔가가 몹시 두려웠지 만 이번에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수줍고 부끄러웠다. "이것은 쩌어기 만여바다에서 잡은 상어로 포 떠서 말린 거다. 혼자 다 묵으믄 물 켠케로 동생이랑 사이 좋게 나눠서 꼭꼭 씹어묵어라." "아이고 성님, 그것이 바로 옛날에 임금님한테 진상했다던 귀한 상어포가 아니요. 얼릉 두 손으로 받고 잘 묵겄습니다, 인사해사제." 마당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피던 할머니가 어느새 구르듯 달려오며 나한테 발을 굴렀다. 먹이를 가로채려는 매 같은 얼굴이었다. 하긴 이렇게 맛있는 냄새에다가 그렇게 귀한 것이 라면 할머니가 내 손에 통째로 맡길 리는 절대로 없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서 얼른 할머니 한테 내밀어버렸다. "효녀 심청이가 따로 없구나. 그래야제, 늙은 핼미한테 달해야 복받고말고. 그것은 그럼 집에 가서 핼미한테 나눠달라 하고 너는 이것 하나 묵어라." 다시 무쇠솥으로 다가간 쫑알댁이 고구마 한 개를 골라왔다. 그리고 할머니가 오빠와 제 남이한테나 그러듯이 그것을 호호 불어가며 껍질을 잘 벗겨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너무나 친절하고 정성스러워서 몸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고구마를 워치케 간수했길래 아직까지 그렇게 성하다요?" "등겨에 묻었드라네. 자네도 하나 묵을랑가?" "아니 아니라, 나는 생목이 올라와서 당최. 그나저나 그것이 성님네 점심인 것 같은디, 보 릿고개 넘을라면 인제도 목 늘어지게 한참이 남았는디 벌써부터 그렇게 잡수시믄 시숙님은 그 체격에 워치케 사신다요?" "구식에는 보리죽에 풀만 뜯어묵고도 모두들 잘만 살데. 워치케 해도 우리 세 식구 굶어 서 죽는 일은 없을 팅게 걱정일랑 말게. 그리고 자, 아까 내가 한 말 잊어불지 말고 인자 가 보게. 아가, 행남이라고 했드냐? 어서 할머니 모시고 가거라" 쫑알댁이 갑자기 손을 쳐내며 씻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할머니가 뭐라고 한마디를 꺼내 려고 하자 쫑알댁이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접신된 무당이 갑자기 딴사람으로 변하는 것처럼 급작스럽고도 단호했다. 물기가 도는 맑은 눈빛은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쫑 알댁은 입술까지 달싹달싹하며 어느새 실성한 그 쫑알댁의 얼굴로 돌아가버렸다. 졸지에 내몰리게 된 할머니가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을 차릴 틈도 주지 않고 빗자루를 찾 아든 쫑알댁이 부엌바닥을 싹싹 쓸어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빗자루에 쓸리듯이 부엌을 쫓겨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쫑알댁은 물항아리를 들고 다시 뒤안 샘가로 나가는 것 같앗다. 무람해진할머니는 상어포 가 든 　지를 든 채로 뒷짐을 지고 연신 하늘과 땅만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때 쫑알댁의 세 식구 중 하나인 벅구가 슬며시 제집에서 나오더니 비틀비틀 사립 쪽으 로 다가갔다. 구덕을 지고 장대를 출렁이며 마침 노인이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또 이유없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아이고 시숙님!" 할머니가 조상이라도 만난 듯 소리쳤다. 그리고 허겁지겁 나를 끌어당겨 앞으로 세우더니 내 뒤통수를 밀며 인사부터 시켰다. "아침 물 댕겨오시는갑서라이." "야." 날마다 서로 아침인사를 나누는 사람처럼 노인ㅇ느 할머니의 인사에 맞절을 하느라 허리 를 굽히며 심상한 한마디뿐이었다. 긴 밭둑길을 걸어옴녀서 이미 우리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사립까지 마중나와 늘어진 꼬리를 흔들며 끄덕끄덕 고개짓하는 벅구한테 사 람에게 하듯 오냐 오냐 했다. 벅구는 다시 슬렁슬렁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할머님 따라서 마실 왔냐?" "야." 아까 내 인사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나는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베어먹은 고구 마를 급하게 삼켜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오오냐. 참 거 이삐다. 그란디 할마씨가 게우 그 물고구마 하나 주고 말더냐?" "아이고 시숙님 무신 말씸을, 이렇게 귀한 괴기포까지 주싰는디라. 그라고저라고 시숙님 저번에 말이라. 워치케 우리 이 아를 알아 보시고 귀한 괴기를 보내싰길래 잘 묵었구만이 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한테서까지 내쫓기지 않을까 하고 할머니는 상어포를 꺼내 보이 고 새삼 절을 하고 노인의 얼굴을 쫓아가며 허둥지둥했다. 그러나 노인ㅇ느 여전히 심상한 얼굴로 장대를 지붕 처마에 기대어 세우고 부엌 앞 절구통 옆에다 구덕을 덕퍽 내려놓았다. "첨에는 연을 날리고 있길래 금석이 딸인 중 알았소. 즈그 어메 솟증에 고아먹이라고 장 어 한 두름을 꺼내줌시로 봉께 허참 그놈, 검실검실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는디 내 얼굴 에 구멍이 나겄드란 말이요. 그래서 다시 봉께로 꼭 옛날 명희가 아니겄소." "맹희라믄 알아보시고말고라. 그렇게도 이뻐하시고 다 키우다시피 하싰는디. 시숙님!" 할머니가 새삼 정색을 하며 노인의 턱밑으로 다가들었다. 할머니는 담판이라도 짓겠다는 듯 주먹까지 불끈 쥐고 있었다. "그 맹희가 인자 다 커서 처녀가 되았소. 내알 모레 시집보낼 나이가 됐단 말이요. 그란디 이 세월 동안 얼굴 한번도 안 쳐다보고 우리가 워째서 이러쿠름 살아야 하는가라? 허허벌판 바람따지에 터잡고 서로가 의지함시로 삼대째 뿌리를 내렸는디, 그것이 보통 인연이요? 그 란디 인자 와서 그 의리를 작파하자니 참말 사람 할 짓이 아니랑께라." 할머니는 쫑알댁에게 그랬던 것처럼 노인에게도 매달리고 있었다. 노인은 시종 똑같은 얼 굴로 할머니를 슬몃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눈빛에 애처로워하는 것도 같고 곤란해하는 것 도 같은, 설명이 잘 안되는 감정이 들어 있었다. 노인은 성큼성큼 부엌으로 들어가서 통나무 로 깎은 커다란 통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다 구덕 속의 것을 부었다. 와르르 쏟아진 내 팔뚝만한 장어들이 서로 몸을 비비고 꼬리를 쳐대며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다. 서로의 몸을 감고 꼬는 구렁이떼처럼 너무나 징그러워 나는 얼른 얼굴을 돌려버렸다. 그러나 지난 번 동네마당 볏짚더미 앞에서 노인이 수자에게 전해준 것이 바로 저 장어였다는 사실은 인 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자와 노인에게 비로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구렁이를 건네주 었고 그 구렁이를 고아먹었을 거라는 오해 때문에 그동안 두 사람에 대한 나의 상상은 얼마 나 어둡고 끔찍했던가 말이다. "제수씨 이렇게 오랜만에 오싰은께 장어나 몇마리 들고 가시오. 낙천이도 인자 몸보신을 잘해야 힘쓰고 농사를 지을 나이가 안되았소. 그러고 서로가 꼭 오거니 가거니 해야만 정은 아닌께 그렇게 너무 서운해 맙시다. 저 사람 저러는 것 누구보다 제수씨가 이해하세야제라." 담판이건 하소연이건 할머니의 이야기에는 그 이상 의미가 없다는 듯 노인은 한결같은 어 조로 단호히 말했다. 노인은 이야기를 듣고 또 하면서도 그 큰 몸을 쉴새없이 움직였다. 대 가 성한 지푸라기를 골라온 노인이 미끄러운 장어의 머리통을 꽉 움켜쥐자 장어는 몸부림치 면서도 아야! 하듯 아가미를 쩍 벌렸다. 노인은 재빨리 그곳에다 지푸라기 꿰미를 집어넣었 다. "아이고 그만, 그만 하시시오. 시숙님도 괴기를 팔아야 식량에 담배, 비누, 석유도 사고 가 용을 쓰시제라. 아, 그만 하시란 말이요." "제수씨가 또 언제 우리 집에 오시겄는가라. 걱정 마시오. 오늘 못팔믄 내일 또 잡아다 팔 믄 되니께라." 이내 장어에 눈이 팔려버린 할머니와 노인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쫑알댁이 집모퉁이를 나 오고 있었다. 머리에는 그 동그란 물항아리가 이어져 있고 눈을 내리깐 채 언제나처럼 입술 을 달싹달싹 쉴새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닭장 옆의 벅구도 슬그머니 일어서더니 금방 헐어져버릴 듯한 온몸의 뼈다귀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움직거리며 따라가고 있었다. 쫑알댁 은 또 큰벌 거멍숲으로 비손을 가는 모양이었다. 나는 쫑알댁의 그것이 절대로 실성한 행동 이 아니란 걸 이제는 알게 되었다. 4. 또딸이 우리가 고무줄놀이를 할 때 부르는 노래처럼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 되었다. 음력으로 춘 삼월이 된 것이다. 그러나 촉촉한 꽃대궐로 피어나야할 산과 들이 뿌연 먼지 속에 잠포록하 게 잠긴 채 잠을 깨지 않았다.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논바닥마다 보랏빛 자운영이 닥지닥 지 야윈 꽃을 피우다 자지러졌고, 청오산에 주렁주렁 매달린 야산들이 기를 쓰고 피워낸 핏 빛 진달래 때문에 천지는 그야말로 불질러놓은 형색이었다. 먼 들판을 배암처럼 한도 끝도 없이 휘감아 도는 사천둑에도 질기고 강인한 민들레가 가뭄이라는 위기를 만나 더 극성스럽 게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이 피어났다. 그 위를 나비가 날고 산과 들과 마을 위로 아리아 리하게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에 세상이 한뼘쯤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제비도 돌아오긴 했으나 새 집을 짓지 않고 안방 앞 처마밑의 옛집에 정착할 모양이었다. 너무나 반가운 할머니는 당장 똥받침을 해주라고 했다. 아버지는 장날 철물점에 가서 나사 못을 사다가 해주겠다고 했다. 제비똥이 마루밑 신발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마다 새 판자조 각을 받쳐주어야 하는데 어느 해던가 못질을 탕탕 하다가 그만 제비집을 떨어뜨린 불상사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날마다 학교만 다녀오면 들판으로 나갔다. 가뭄 아니라 가뭄 할애비라도 끄떡없다는 듯 기어이 제철을 찾아나온 쑥이며 미나리며 달래며 냉이 같은 나물들을 캐러 다닌 것이다. 정말 햇볕 아래 소복이 돋아 있는 새 쑥을 만지는 기분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차가운 듯 손 끝에 감치는 미나리의 그 싱그러운 감촉은 또 어떻고. 끊어질 듯 가냘픈 줄기에 따라 조심조심 파 내려가다 저 끝에 대롱대롱 매달린 달래를 무사히 파올릴 때의 그 기분은 정말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캐온 나물이 밥상에 오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우선 내 손끝은 그 풀잎들 을 좋아만 했지 너무 서툴렀다. 내 손에 짓뜯긴 나물은 너무 볼푼이 없는데다 한 접시를 만 든기에도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할머니는 내 바구니 속을 들여다볼 때마다 쯧 혀를 찼고 언니들은 바구니를 여지없이 두엄더미에 부어버렸다. 그리고 빗금처럼 갈라터진 내 손발을 꼬집으며 다시는 들판에 나가지 않겠다는 억지 약속을 받아내곤 했다. 들판으로 나가지 않으면 나는 양지쪽에 쭈그리고 앉아 꾸벅꾸벅 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런데 들판에 들려 학교가 끝나기가 바쁘게 달려다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하 지만 언니들은 내가 하는 짓이라면 어떤 것도 그냥 보아줄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동네북이었다. 아니 돌쇠였다. 나에게는 손톱만큼의 자유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나만큼 억압을 심하게 받는 사람도 아마 드물 것이다. 저마다 한마디씩만 해도 나에게는 산더미처럼 쌓이는 그 층층시하의 간섭과 구박 때문이었다. 나에게는 머리에서 발 끝까지 내 몸도 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없었다. 여중고를 졸업하고도 우글우글 집안에만 갇 혀 지내야 하는 언니들 때문이었다. 직장이나 밖으로 나돌지 않고 집안에서 살림을 배워야 좋은 데로 시집을 갈 수 있다는 통 념 때문에 언니들은 꼼짝없이 집안에만 갇혀 지내야 했다. 특히 큰언니는 바느질 솜씨가 뛰 어나서 여학교 때 배운 양재기술로 마을 여자들의 옷을 도맡아 만들었다. 큰맘 먹곡 새터거 리 큰길가에 양장점만 차린다면 돈을 갈퀴로 긁을 수 있다고 했다. 정말 큰언니만 돈을 벌 어도 아버지 등골 빠진다는 할머니의 타령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말은 일 언지하에 잘라버렸다. 여작 손끝 재주를 내세우게 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는 것이다. 큰언니 역시 부잣집 멋있는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진짜 꿈이기 때문에 군말이 없었다. 그래서 시찌니를 밴 언니들은 모두 신경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밤새 이슬 마신 마신 싱 싱한 풀만 먹고 자란 제주도 말한테 전족을 시킨다고 상상해보라. 바로 언니들이 그짝이어 싿. 제주 말처럼 싱싱하게 물오른 언니들이 전족한 중국 여자들처럼 일년 열두달을 하루같 이 집안에서만 뱅뱅 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언니들은 날이면 날마다 안채와 사랑채를 박칵 뒤집어서 쓸고 닦고 앞마당과 뒷마당은 골이 패도록 비질을 하는가 하면, 광과 부엌과 장독대는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극성을 부렸다. 그러고도 남아도는 시간을 어쩌지 못해서 날밤을 새우며 바느질감과 수틀에서 바늘만 뽁뽁 뽑아댔다. 하지만 언니들의 관심대상이 그 런 것뿐이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해마다 겨울이면 언니들은 물론 엄마와 할머니까지 동원된 털실 감기가 연례행사였다. 새 로 산 장미표 505 순모로는 언니들과 얼느들의 겉옷을 짰다. 그리고 다 떨어진 털옷을 풀어 서 뜨거운 김을 쐰 헌실로는 어른들의 속바지나 아이들의 옷을 짰다. 그런데 할머니를 비롯 한 여자들의 옷을 푼 실로는 절대로 오빠나 제남이의 옷은 짜지 않아싿. 여자의 몸에 걸쳤 던 것으로는 남자의 옷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마다 헌실로 짠 옷은 전부 내 몫이었다. 언니들은 색색의 그 헌실로 온갖 솜씨를 다 부렸다. 바지부터 모자가 달린 덧옷까 지 온통 얼룩말 무늬를 만드는가 하면 호랑이 가죽을 만들고 토끼가죽을 만들었다. 겨울옷 뿐이 아니었다. 마을 여자들의 옷을 만들어주고 남은 자투리 옷감은 온갖 디자인의 봄 여름 가을 겨울옷을 만들었다. 그러나 언니들이 만들어준 옷은 옷감도 모양도 까다로워서 대부분 자유럽지가 못했다. 함 부로 입으면 주름이 망가지거나 풀물과 흙자국이 선연하고 이슬비만 맞아도 풀기가 가셔버 리곤 했다. 나는 선희나 미란이처럼 허리에 고무줄을 넣은 다우다 치마 같은 게 소원이었다. 여름날 입은 채 서답내나 사천 물속으로 들어가 헤엄을 치고도 둑길을 걸어오다 보면 어느 새 고실고실 말라서 아무 흔적이 나지 않는 그런 옷이 미래세계, 신세계의 옷만 같았다. 그 러나 언니들은 그런 옷을 경멸했다. 싸구려 나일론이라는 것이다. 나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 까지 언니들 손아귀에만 맡겨져 있었다. 언니들은 아침마다 자신들의 미적 감각에 대한 한없는 자부심을 가지고 내 머리를 빗기고 숯불로 다린 새옷을 입혀 내보냈다. 아침마다 저쟁을 치르듯 이쪽저쪽을 쥐어박히며 머리를 빗고 묶고 땋아 옷에 맞게 쪽을 찌기도 하고 길게 늘어뜨리기도 해서 학교에 가는데, 하루 일과가 끝나기도 전에 그 머리는 쑥대머리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언니들은 나만 보면 창피 해서 살 수가 없다고 발을 굴렀다. 그리고 나를 쥐어박으며 계모들처럼 못살게 굴었다. 나는 한 번도 언니들을 고맙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아무것도 공짜로 얻은 적이 없기 때문 이다. 내 옷을 짜고 만드는 동안 나는 온갖 심부름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집은 여자가 발 끄는 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는 이유로 집에서도 슬리퍼는 금물이었다. 그래서 언니들은 특별한 외출 때말고는 촌스러운 고무신을 신어야 하는데 그 고무신을 닦는 게 내 몫이었다. 뿐 아니라 걸레도 빨아다주고 깎아먹을 고구마도 꺼내다 주고 아버지에게 용돈 타는 것까지 한도 끝도 없었다. 그중에서 아버지한테 돈 타는 일과 라디오 심부름은 완전히 내 몫이었다. 언니들은 내외를 하다 못해 아버지와도 직접 대화를 하려 들지 않는 것이었다. 사실 큰언니는 아버지가 열아홉살일 때 태어났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들은 부녀간이라기보 다는 큰오빠와 막내동생 정도로 오해하기 일쑤였다. 그래서 똑같이 내성적이 아버지와 큰언 니는 서로 아주 어색해했다. 큰언니는 그게 더욱 심했다. 언젠가 무슨 일로 집안에 큰언니와 아버지만 있게 되었는데 밥상을 차려놓고도 식사하시라는 말을 못해서 우리들 중의 누군가 를 찾으러 마을을 온통 헤메고 다닌 적도 있다. 그 사정을 빤히 아는 아버지는 슬그머니 방 으로 들어가서 식사를 마친 다음 큰언니가 돌아오기 전에 얼른 논으로 물을 대러 갔다. 그 러니까 큰언니는 사춘기부터 지금까지 아버지를 직접 불러본 적이 한번도 없는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 탓도 있었다. 큰언니가 막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교복을 입고 농림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딸이 태어났다는 사실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우울증에 걸릴 정도였다고 했 다. 할머니를 따라 동네마당에 놀러 갔던 큰언니가 친구들과 엿치기하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부지 빠빠!' 소리치며 달려가 바짓자락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런데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그냥 서 있던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이불을 치며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아버지가 우리 팔남매 중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은 아마 크넝ㄴ니일 것이다. 큰언 니도 시찌니 못잖게 공부를 잘했는데 너무나 소중하고 아까워서 사고무친한 도시로 차마 대 학유학을 보내지 못할 정도였다. 큰언니 역시 아버지의 뜻이라면 손톱만큼도 거역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 집 여자들의 대변인은, 딸이어서 정말 서운하다고 서운이, 그외에도 백여시 촉새 때 까지 칠면조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방년 열일곱살 조상희, 다찌니였다. 생김새며 성격이 할 머니 탁본이면서도 할머니완 서로 상극인 다찌니는 무슨 일에나 옆구리를 트고 나와 따따부 따 문제를 몰고 다니는 우리 집 벌통이었다. 그러나 정작 정면으로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 제에서는 가장 말발이 서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여고 진학을 못한 것에 포한이 wu서 온 집안 식구를 원수로 삼는 말투와 행동 때문에 아버지가 아주 미워하기도 했지만 우선 다섯 째 딸이라는, 별볼일 없는 그 서열이 문제였다. 그리고 그 서열의 결정적인 희생자는 바로 니찌니였다. 삼대 독자의 넷째 딸로 태어난 것 이다. 본명은 조용희지만 그냥 '그만이'라고만 불리는 니찌니는 순한 것인지 못난 것인지 있 는 듯 없는 듯 조용해서 식구들로 하여금 그 존재를 항상 까먹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농림학교를 다닌데다 다소 낭만적인 데가 있던 아버지는 우리가 태어날 때마다 기념으로 나무 한그루씩을 심었는데 팔남매 중에서 딱 한 사람 빼먹은 것도 바로 니찌니의 것이어싿. 첫딸이 태어났을 때는 시집갈 때 농을 짜주기 위해서 벽오동을 심었고 두 번째로 아들이 생 겼을 때는 은행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들은 두 돌을 넘기지 못한 채 골골하다 가 죽어버렸다. 그래서 그 은행나무는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에 베어졌다. 그리고 둘째딸이 태어났을 때는 부귀다복 하라고 살구나무를 심었으며 시찌니 것으로는 그 열매처럼 불알 달 린 동생을 보라고 무화과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니찌니가 태어나자 그만 지쳐버린 아버지는 더 이상 나무심기를 팽개쳐버렸던 것이다. 그랬다가 다찌니가 태어나자 크게 고무된 아버지 는 엄동설한에도 붉게 꽃피는 동백을 세 그루나 심었다. 그리고 나더러는 비단 짜는 얌전한 여자가 되라고 뽕나무를 심었으며 제남이의 몫으로는 어른 주먹만한 장두감나무를 심으셨 다. 우리는 각자 자기 나무와 자신을 따로 구분하려 들지 않았다. 시찌니가 직접 지은 것인지 남의 것인지 '저는 무화과라고 해요/ 가슴 속으로 꽃피는/ 남몰래 타는 불이예요.' 하는 요염 한 시까지 외우며 무화과 예찬에 열을 올리는 바람에 우리는 서로지지 않으려 기를 썼다. 그 대표가 바로 다찌니였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고 몸에 좋은 과일이 바로 대추라고 꾸 역꾸역 우기는 것이다. 오빠도 물론 동백나무를 무척 사랑했다. 동백꽃을 좋아하는 동박새가 날아오면 쌀을 몰래 훔쳐다가 뿌려주기도 했다. 제남이도 감꽃이 필 때부터 열매가 익어 까 치밥을 남길 때까지 자기의 나무는 쳐다보지도 얼씬 거리지도 못하게 했다. 자기 나무에 별 애정이 업슨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버지는 왜 열매도 꽃도 별볼일 없는 뽕나무를 내 나무로 심었는지 원망스럽기만 했다. 제남이가 나를 약올릴 때마다 '뽕!' 하며 놀리는 것이다. 다투다가 말문만 막혀도 '뽕!' 하면 서 도망가고 어떤 때는 한쪽 다리를 들면서 '뽀오옹' 하거나 '뿡' '뻥' '쁭' 발음도 가지가지로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약이올라 즉각 방 구들을 파든지 지붕으로 솟든지 해야만 분이 풀 릴 것 같았다. 엄마는 들어도 못 들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체해야 놀리지 않는다며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그것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르니까 하는 소리였다. 누에를 치는 할머니가 뽕잎을 다 따내고 나무를 온통 발가벗겨버려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빨갛게 물 들다가 까맣게 농익을 즈음엔 제법 먹음직한 오디조차도 나는 불만이었다. 엄마 젖꼭지도 아니겠다. 이왕에 열린 거면 딸기 크기라도 되든지 포도처럼 송이라도 만든다면 얼마나 좋 겠는가 말이다. 그 많은 나무 중에 하필이면 뽕나무일 바에야 나는 아무것도 없는 니찌니가 차라리 부러 웠다. 최소한 놀림감은 안될 것이 아닌가 말이다. 니찌니 역시 그 점은 나와 생각이 비슷한 것 같았다. 텃밭 울타리로 서 있는 쥐똥은 임자가 없으니까 자기 것으로 정하라고 해도 쥐 똥은 싫다는 것이다. 니찌니는 나중에 자신이 직접 포도나무를 심을 거라고 했다. 송알송알 맺힌 포도처럼 환상적인 과일이 또 있을까. 니찌니가 너무나 확신에 찬 소리로 말했기 때문 에 우리는 금방 눈으로 포도송이라고 확인한 것처럼 저절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나무 이야 기라면 아무리 시끄러워도 니찌니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딴청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미 래의 그 포도나무를 정말 니찌니의 몫으로 떠올리곤 했다. 니찌니는 학교도 초등하교밖에 다니지 못했다. 연년생인 언니들이 전부 학교에 다닐 때라 한해만 숨을 돌리자고 쉬게 했는 데 그해에 엄마가 막내 제남이를 낳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바람에 영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 다. 경제적인 문제도 컸지만 할머니가 팔을 삐는 바람에 무엇보다 애보개가 필요했던 것이 다. 다찌니도 중졸로 그치고 말았지만 니찌니의 상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니찌니 는 자신의 문제를 겉으로 드러내본 적이 없었다. 다찌니가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것에 포한 이 져서 아무나 물어뜯듯 말썽을 일으켜도 니찌니는 조용히 등에 업은 제남이만 한번씩 추 스를 뿐이었다. 그리고 제남이가 더 이상 업어줄 필요가 없은 만큼 자라자 니찌니는 집을 나간 적이 있었다. 공부를 시켜준다는 아주아주 부잣집으로 식모살이를 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가 니찌니가 니찌니의 나무를 빼먹고 중학교에 보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충분한 앙갚 음이 되었다. 아버지 엄마는 물론 할머니까지도 충격으로 밥을 먹지 못하고 드러누울 정도 였다. 시찌니가 수소문하고 아버지가 직접 데리러 갔을 때 손이 부르튼 니찌니가 서럽게 흐느꼈 다고 한다. 어쨌건 돌아와서도 니찌니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러나 도시의 부잣집에서 보 고 들은 것만큼은 엄청난 듯했다. 우리가 어떤 주제를 놓고 입씨름을 한다거나 함부로 떠들 면 가끔씩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냥 느껴지는 코웃음을 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마을 첫머리, 사천과 만복천이 갈라지기 전의 서답내를 건너면 커다란 팽나무 아래 허름 한 대장간이 하나 있는데 교회는 바로 그 곁에 있었다. 니찌니의 신앙심은 교회에서 꽤 인 정을 받고 있었다. 가끔 우리도 따라 다니는 어린이반 예배 지도도 하고 전도사 부인한테서 배운 풍금솜씨로 예배시간의 찬송가 반주도 멋지게 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은 어쩌다 우 리가 직접 보고 듣는게 전부였다. 니찌니는 어떤 것도 자신의 입으로 전하는 법이 없었다. 다찌니는 심심하면 가끔 따라가는데 그때마다 열두 가지가 넘는 이야깃거리를 건져왔다. 전 도사가 탁 설교대를 치는 순간 전도사의 포마드 머리에서 파리가 낙상하더라는 거짓말에서 부터, 전도사는 울면서 기도 인도를 하는데 엎드려서 몰래 밤을 까먹던 어떤 여자가 틀림없 이 저너머 현리에 사는 자기 남자동창생의 어머니 같더라는 둥, 헌금채가 자기 앞으로 다가 오자 방앗간집 여자가 빈주먹을 넣었다 빼면서 돈 넣는 시늉을 하더라는 둥, 다찌니가 그런 흉내를 내면 우리는 배꼽을 잡고 굴러다녔다. 부흥집회에서는 귀신을 눈으로 보았다고도 했 다. 초청목사가 안수기도를 하자 남포 옹기장수 마누라의 몸에서 봄날 아롱아롱한 아지랑이 같은 형체가 분명 도망을 가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거짓인지 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기 때 문에 우리는 더욱 그 말에 귀기울이며 으스스 몸을 떨었다. 그럴 때도 니찌니는 아무 소리 도 안 들리고,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멀쩡한 얼굴이었다. 얼른 아랫방으로 건너가서 성 경책을 읽기도 했다. 그래서 아버지도 다찌니한테는 가시나가 방정맞게 어디를 쏘다니며 밤 낮 호령이지만 니찌니가 하는 일은 뭐든지 내버려두었다. 아버지 대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니찌니의 그 마음은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다시 집을 나가 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드디어 우리 두찌니를 말하려 한다. 우리 집 뒷방에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찐빵처럼 부푼, 아니 돌하르방처럼 온몸이 부푼 어떤 존재가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이야기 보따리처럼 배는 청오산만한데 입이 바늘 귀처럼 작아서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는 바로 그 아귀의 화신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 리가 끊어질 듯 배가 고픈 병, '허천병'이라고 했다. 끼니 때의 밥만으론 충분치가 않아서 고 구마를 한 가마솥씩 삶아먹고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우리 식구의 며칠분 식량으로 살마 아놓은 보리쌀을 다 먹어버리고 광 속 항아리의 생쌀도 씹어먹고 심지어는 시궁창에 떨어진 풋감이나 떫은 무화과까지도 주워먹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우리 집 뒷방에 살고 있지만 우리와 생활을 함께 하는 것도 아니고 식구들 이 그냥 무슨 물건처럼 '뒷방것'이라고만 지칭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본명이 조숙희지만 또딸이로 알려져 있었다. 별난 모습에 너무나 어울리는 이름이 어서 눈에 띌 때마다 아이들은 돌을 던지고 또딸이! 또딸이! 환호성을 지르며 쫓아다녔다. 돌에 맞을 때마다 겁에 질린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서서 질금질금 오줌을 지렸다. 나도 아 이들을 따라다니며 돌을 던지고 또딸이 또딸이! 소리치며 혀를 내흔들었다. 그런데 그 곤욕을 치르면서도 그녀는 왜 자꾸 집밖을 나서는 것일까. 금족령을 어기고 집 밖의 곤욕을 치를 때마다 그녀는 엄마한테 곱으로 매질을 당하곤 했다. 집 뒤안에서 매타작 을 퍼부으며 내뱉는 그 비탄의 함숨소리. "죽어라! 제발 죽어, 이 웬수야! 전생의 앙갚음이 라면 지금까지도 충분하다! 하루라도 빨리 죽어! 어서 죽어!" 이를 악문 엄마는 매번 그녀를 정말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서둘렀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도 않고 되레 애무나 안마라도 받는 양 쌀자루처럼 무겁고 둔한 몸뚱이를 내맡기곤 했 다. 왜 매 맞는 사람보다 때리는 사람이 더 고통스런 신음소리를 뱉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삼년 전 어느날이었다. 시찌니가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러 가기 위해 안방에서 자다가 새 벽 일찍 등잔불을 밝히던 순간이었다. 엄마도 두런거리며 일어나 웃옷을 찾아 입는데 어디 선가 찌익! 신새벽의 고요를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시찌니가 갑자기 비명 을 지르며 샛문으로 뛰쳐나갔다. 찌익 찍, 하늘을 찢는 것인지 새벽을 찢는 것인지 몹시도 사나운 소리와 시찌니의 욕설 섞인 비명소리가 뒷방께에서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다. 새빨간 엑스란 내복 차림이던 엄마가 갑자기 불을 뿜듯이 한숨소리를 내뿜으며 두 주먹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그때 아버지가 이불자락을 훽 젖히며 엄마를 노려보았다. 그때야 정신을 차 린 엄마가 소리없이 다급하게 샛문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툭탁툭탁 쌀자루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나면서 뒷방께는 이내 조용해졌는데 엄마를 따라 돌아온 시찌니의 손에는 갈기갈기 찢긴 바지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교복이면서 단벌 외출복인 시찌니의 보물, 미제 군복지에 물을 들여 만든 질 좋은 '사아지 쓰봉'이었다. 시험 보는 데 입고 가려고 어느 때보다 더 날 카롭게 줄을 세워 다려놓은 것이었다. 시찌니는 튀어나온 이마에 골만 새기고 입은 꾹 다문 채 보리밭 맨 것처럼 엉덩이와 무릎 이 튀어나온 코르덴바지 차림으로 새벽길을 떠났다. 이후 나는 꿈을 꾼 것인지 이상한 상상 을 했던 것인지 아리송해졌다. 그건 분명 뒷방의 반란 또는 가당찮은 행패라고밖에 볼 수 없는 신새벽의 엄청난 사건이었지만 이웃은 물론 우리 가족 중에도 다른 방 식구들은 까맣 게 모르도록 조용히 묻혀버린 것이다. 이후로 나는 가끔 뒷방의 수수께끼에 골몰하곤 했다. 또딸이, '뒷방것' 그녀가 도대체 누구기에 우리 집 대표로 출전하는 시찌니의 앞길을 내놓고 해코지하는 그런 행패를 묵인받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생각도 느낌도 감정도 없는 줄 알았던 그녀의 깊은 원망과 슬픔의 눈길. 그악스런 아이들 틈바귀에서 질세라 혀를 내흔들다가도 그 눈길에만 부딪치면 나는 저절로 팔다리에 힘이 빠져버리곤 했다. 아이들이 나를 '또딸이 동생'이라고 놀릴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렇지 않다고 빡빡 우겼다. 우기다가 밀릴 때마다 울음보를 터뜨리며 울오빠 울언니한테 일러준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심드렁 심드렁 몸을 흔들며 돌아온 나에게 식구들이 아무리 이유를 물어도 나는 절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 마디만 꺼내도 엄마는 열번도 더 가슴을 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헌천병의 아귀는 바로 엄마가 또 낳았던 천하디천한 딸이었다. 아니 그에 앞서 조씨네 가문의 장손인 아들이 태어났었다고 한다. 그런데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찌니한테 치여 골골 하다가 두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녀는 바로 천금처럼 귀한 아들을 치 어놓고 미움 속에서 자라도 그나마 병고에 치여벌인 어둠의 딸이었다. 인간 이하 아귀 같은 먹보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시샘 질투 그런 것으로나마 자신의 건재를 확인하는 우리의 또 하나 자매였던 것이다. 어쨌건 언니들과 아버지 사이의 교통은 기대조차 않는 게 좋았다. 문제는 나였다. 안방에 서 기거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게 문제였다. 아랫방은 전족한 말 같은 언니들만으로도 그 득했고 윗방에선 할머니가 고추만 데리고 잤으며 사랑채의 건넌방은 무롤ㄴ이고 안방과 아 랳방 사이를 하루에도 몇번씩 오가며 이런다고 아뢰오 저런다고 아뢰오를 해야 하는 것이 다. 돌쇠 역할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나 역시 아버지를 대하는 일을 몹시 힘들어한다는 사실도 있지만 그들의 답답한 대화방법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영양크림 한통 값을 타내는 데 왔 다갔다를 대여섯 번도 하는 것이다. "아부지, 언니들이 이백원만 타갖고 오라는디라." 나는 언제나 언니들이 시키는 대로, 나하고는 무관하지만 언니들의 요구에 대한 타당성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 사정조로 시작했다. "어디에 쓴다더냐?" 아버지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물었다. 그러면 나는 다시 마루를 건너 아랫방으로 갔 다. 아버지의 반응은 언니들이 먼저 엿듣고 있었다. 나는 언니들이 다시 가르쳐준 대로 아버 지에게 건너왔다. "영양크림을 다 써부러서 새로 산닥 하요." "뭔 노무 화장품은 그렇게 한달이 멀다고 떨어진다더냐?" 아버지는 돈에 있어서만큼은 절대로 단번에 여기있다, 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돌아가 언니들이 가르쳐준 뻔한 답을 가지고 다시 건너왔다. "얘껴서 써도 여럿이가 같이 쓴께로 금방 떨어지고 또 또딸이가 다 퍼가부렀닥 하요." "다음 장날 돼지새끼 팔아서 사다준다고 그래라." 이런 식이었다. 밤새 마루를 왔다갔다해야 하는 나의 수고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럴 수 있겠는가. 라디오 심부름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부지, 언니들이 라디오 잠 갖고 오락 하요." "뉴스 들어야 한께 안된다고 그래라." 그러면 나는 마루로 나가서 아랫방을 향해 소리쳤다. "아부지 뉴스 들으신께로 안된다요!" "뉴스 할 때까지 연속극만 듣고 갖다드린다고 그래!" 그러면 나는 아버지도 빤히 들었을 그 말을 다시 옮겨야 했다. 날이면 날　 연속극과 뉴 스와 음악시간마다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것이다. 팔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배치해서 부리는 게 우리 집 가풍이라 나로서는 도저히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문제는 아버지보다 엄마 쪽에 있는지도 몰랐다. 아버지보다 한 살 연상이면서도 엄마는 아버지한테 꼼짝을 못햇다. 아니, 꼼짝할 생각을 전혀 안했다. 마을 사람들은 찰떡궁 합이니 잉꼬부부니 하며 부러워하기도 하지만 사소한 푼돈에 대한 권리도 없는 것이 엄마의 실정이었다. 그래서 딸들이 쓰는 사소한 용돈 관리까지도 전부 아버지 몫이었다. 엄마는 낮 이나 밤이나 키 큰 아버지만 졸졸 따라 다니며 만사를 은근 슬쩍 그런 식으로 떠넘겨버렸 다. 그래서 언니들은 자기들끼리 몰래 엄마를 경멸했다. 엄마를 감히 산란율이 좋은 레그혼 닭에 비유하며 흉을 보는 것이다. 자식들만 부지런히 낳았지 어머니로서의 권리나 의무행사 를 전혀 안한다는 것이다. 딸들을 기르는 어머니가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겸손 부리느라 직 무유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언니들은 아버지 같은 남편을 만나 엄마처럼 살기를 꿈꾸기도 했다 나만 골치가 아팠다. 제남이는 꼴찌로 태어났지만 아들이라는, 언니들보다도 확고한 지위가 보장되어 있었다. 언니들은 수틀을 보듬고 앉아 오색 비단실을 퐁퐁 소리가 나도록 뽑아올리며 열심히 꿈꾸었 다. 머잖아 아주 멋진 남자들이 나타나서 차례차례 어디론가 따뜻하고 향기로운 곳으로 데 려가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 지위도 보장도 없는 나는 어디론가 떠날 것을 꿈꾸 는 일은 너무나 아득히 먼 일이었다. 나는 아무 희망이 없었다. 내가 맥아리 없이 아무데나 코를 박고 잠이 들어버리는 이유가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순전히 나만의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있었다. 그 시작은 이미 우리 집의 대표로 밥을 얻으러 나간 지난 보름날부터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때 수자를 만나 특 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노인이 수자에게 준 것이 구렁이가 아닌 장어였다는 사실이 명 백해지자 수자에 대한 친화력이 다시 샘솟게 되었다. 노인과 우리 아버지가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고 하자 나에 대한 수자의 태도는 완전히 바 뀌어버렸다. 노인과 우리 아버지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몰래몰래 갖다나르는 사실을 말 했을 때 수자는 그야말로 꿈꾸는 눈길이 되어 주먹으로 가슴을 꼬옥 눌렀다. 수자는 학교에서도 놀이를 할 때마다 나를 언제나 자기 편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놀이 를 너무나 못하기 때문에 잘하는 자기와 짝을 맞춰야 균형이 맞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할 때마다 이기는 게임, 그것은 정말 신바람이 나는 일이었다. 나는 이미 두어 달 전의 내가 아니었다. 줄넘기할 땐 내 몸을 걸어 나동그라지게 하고 말 것 같던 그 공포의 새끼줄 속으로 뛰어들어가. '꼬마야 꼬마야 땅을 짚어라!' 하며 겁없이 땅을 짚고 만세를 부르라면 만세를 부르고 인사도 하고 춤도 추었다. 워낙 박자를 못 맞추 다보니 두세 번의 고비를 넘기지 못해 새끼줄을 걸고 엎어지기 일쑤지만 그래도 그런 놀이 에 끼여볼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도둑 잡기'에서 순경한테 쫓기면 심장이 멎을 듯 무섭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렇게 큰 걱정은 없었다. 잡히더라도 금방 수자가 달려와서 손 터치로 살 려주기 때문이었다. 나는 학교만 다녀오면 책가방을 아무데나 던져놓고 들판으로 나갔다. 아니 수자에게로 달 려갔다. 식구들 몰래 바구니와 호미를 담장 밖에 던져놓고 멀쩡한 걸음으로 대문을 걸어나 와 그것들을 주워들고 내달렸다. 그것조차 여의치 않을 때는 언니들이 라일론실로 뜨개질해 서 방울까지 달아준 책가방을 대문턱 밑으로 슬그머니 밀어놓고 도망쳤다. 그러나 그날은 몰래 도망갈 필요가 없었다. 일요일 아침, 늦잠을 자다가 여기저기를 쥐어 박히며 일어나서 부새머리로 밥을 먹는데 아버지가 우리 밥상을 건너다보며 이르는 것이다. "행남이는 싸게싸게 묵고 엄마랑 동네마당 말집네 잠 갔다 오니라. 가서 수걸이 모친보고 수고스럽더라도 수걸이 잠 데꼬 오시라고 그래라." "야." 요즘의 마실 버릇 때문에 뭔가를 벼르는 소리로 듣고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문 채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대답했다. 언니들도 동시에 숟가락을 멈추고 벙한 표정들을 서로 나누었다. 뭔 가 비밀한 내용을 주고받는, 금방이라도 킬킬 웃음소리가 터질 것 같은 그런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이르는디 숟갈을 물고 대꾸하는 버르장미는 어디서 배웠으까?" 아버지가 벼락치듯 소리를 지르자 나는 얼김에 숟가락을 꿀꺽 삼킬 뻔했다. 그런데 나를 노려보며 호령하던 아버지가 금방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슬쩍 외면해버렸다. 내가 너무 지 질리자 아버지도 놀란 모양이었다. 언니들은 벙하게 쳐다보던 얼굴을 얼른 지우고 밥그릇에 얼굴을 박는 시늉을 했다. 숨이 막힐 듯한 이상한 공기가 방안을 휘돌았다. 나는 어리벙벙해 졌다. 아버지는 가끔 변죽을 쳐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도 하는 것이다. 너무나 놀란 나는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서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들어 식욕이 왕성해진 나를 두고 언니들은 내내 구박을 하는 중이었 다. 날씬하고 이쁘게 자라려면 지금부터 주의를 해야 한다는 거였는데 '늦잠은 종신할 때까 지 자거라 밥벌레야' '저렇게 퍼먹다간 뒷방것 하나 또 생기겄네' '그 부새머리 그대로 가면 청오산 반란군이 동지 왔소 하겄다'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나는 오리처럼 튀어 나온 입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뽕' 하면 부아부터 치밀지만 '뒷방것' 어쩌고 하는 말에는 저절로 숨이 죽는 것이다. 그때 엄마가 얼른 자기 밥을 움푹 떠서 내 밥그릇에 옮겨주었다. "울지 마라. 시끄러 뚝. 아침부터 가시낭년이 밥상머리에서 우는거 아니다아." 울어보았자 나를 이해해준다거나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 기 때문에 어떻게든 울음을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엄마가 퍼준 밥은 너무나 따뜻하고 고소 했다. 누군가 자기 밥을 다 먹고 더 달라는 사람이 있을까봐 엄마는 언제나 숟가락을 살살 놀리며 위쪽만 갉아먹었다. 나는 눈물 콧물을 훔치고 아직 서러운 제지기로 턱을 경련하며 따뜻한 밥을 한입 떠넣었다. 그것은 지켜보던 엄마가 쓰게 입맛을 다셨다. "야도 부쩍 크느라고 이렇게 먹새가 커지는 것인디, 이 벼락맞을 년들아 밥그릇을 바꿔주 란 말이다." 엄마가 우리 밥상에서만 들릴 낮은 소리로 말하며 다찌니를 노려보았다. 밤참으로 물고구 마를 한 바구니씩 깎아먹는 언니들은 자신들의 식성과 정비례하는 체중 때문에 갈등이 많았 다. 그래서 영양뿐이 없는 음식으로 뱃구레만 키워준 부모를 원망했다. 두찌니가 허천병에 걸린 것도 헛배만 키워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와 할머니는 무슨 말인지 모 르겠지만 엄마는 그때마다 할말을 잃곤 했다. 그래서 언니들은 내 뱃구레만큼은 애초에 키 우지 않는다는 구실로 밥그릇을 아예 반찬종지만한 것으로 못박아놓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 밥을 상습적으로 뺏어먹는 처지였다. 그런데 엄마의 낮은 말소리에 비위가 상한 다찌 니가 발작하듯 고개를 쳐들었다. "뱃구레를 키워야 할 쪽은 머시마들인께 사실 우리 집 밥상은 바뀐 셈이여. 쌀밥만 믹인 께로 머시마새끼들이 맨날 밥맛이 없네 똥이 맥히네 그런 소리나 하제." 다찌니와 그 당돌하고 돌연한 말뜻을 얼른 알아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집은 삶은 보리쌀을 가마솥 바닥에 깐 다음 그 위에 쌀을 안쳐서 밥을 했다. 그리고 밥이 다 되 면 쌀밥은 걷어서 할머니와 남자들이 먹고 밑의 보리밥은 찰지게 이겨서 여자들이 먹었다. 지금 다찌니는 감히 그걸 문제삼고 나온 거였다. 우리는 물론 할머니와 겸상한 남자들도 일 제히 숟갈을 멈추고 다찌니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다찌니는 계속 거칠 것이 없다는 듯한 멀 쩡한 얼굴을 바꾸지 않았다. 그런데 다찌니 옆에서는 니찌니가 마침 길게 찢은 김치를 하늘 높이 쳐들어서 밥이 한입 들어 있는 입에 맛깔스레 집어넣고 있었다. 큰언니가 얼른 니찌니 의 옆구리를 찔벅이자 아버지가 외면했다. 한참 동안의 이상한 침묵 속에서 수젓가락 부딪 는 소리만 들렸다. 일찍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문득 다찌니를 불렀다. "상희는 가서 숭늉부터 떠온나." 뜻밖에도 젖은 듯 낮고 부드러운 소리였다. 의외의 반응에 놀란 다찌니가 어리둥절 일어 서더니 황급히 샛문을 나갔다. 다찌니가 가마솥을 득득 긁어서 엄마의 누룽지와 숭늉 주전 자를 만들어오자 니찌니가 슬며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것을 본 다찌니가 밥그릇에 박아 놓은 자기 숟가락도 얼른 내려놓으려고 누룽지 그릇을 내치고 있었다. 설거지 당번은 큰언 니한테 넘기려는 수작이었다. 그것을 보고도 아버지는 말없이 밥그릇에 숭늉을 받아 오래도 록 입을 가셨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벌로 들으믄 안된다. 조상님네가 뼈를 깎았던 고생 덕으로 우리 는 시방 중농 이상 부자 소리도 듣고 밥 걱정은 안하고 산다." 춥고 쓸쓸한 겨울도 다 지났는데 아버지가 난데없이 조상타령을 또 시작할 모양이었다. 우리 집안이 들판 넓고 산 높고 갯벌 기름진이 금온면 금하리에 정착을 한 것은 증조할아버 지 때였다. 그러니까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외아들인 할아버지를 데리고 월출산 아래 영암에 서 땅끝 해남하고도 여기 금하리까지 새벌 뻘땅을 개간하러 오신 이래 삼대째가 된 것이다.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지게로 일일이 돌을 날라 보를 막고 짠물에 전 뻘땅을 쓸모있는 농토로 직접 개간했다는 이야기는 귀가 아프도록 들은 것이었다. 친척이 없어서 외로움에 한이 맺힌 아버지는 가을 추수만 끝나면 조상의 원적지인 영암으 로 시제 지내러 가는 일에 온통 들뜨곤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가을마다 시제 당일까지는 밥 상머리마다 이곳에 가문을 일으키려 애를 썼던 조상들의 이야기로 제사를 올리다시피 했다. 그리고 목욕재계 후 새옷을 갈아입은 아버지가 사오일 시제마당을 돌아온 이후부터는 겨우 내 아늑하고 자리 좋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는 창녕 조씨네 집성촌 이야기를 물리도록 듣곤 했다. "단지 단족한 것 그것만 한이다가 느그 때에 와서는 인자 그 한도 풀 만하게 안되았냐? 하제만 말만한 딸을 여섯이나 두고 봉께 물위를 걷는 것맹키로 조심스런 것이 참말 한두 가 지가 아니다. 뭔 일이 생겨도 들고 나서줄 친척 하나 없는 디서 느그들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도록 아들딸 차별한다고 불만이 많은 것 같은디 나는 생각이 안그렇다. 이제야말로 우 리 집안이 여기서 제대로 뿌리를 내리느냐 마느냐는 다 느그한테 달렸다 그것이여. 딸이건 아들이건 그 집안을 열고 닫는 것은 다 윗자식들이 하기 나름이다 그 말이다. 느그들이 좋 은 혼처를 얻은 것 그것이 바로 금하리 조씨네가 제대로 평가받는 길이라는 그 말이다." 사십년 만에 처음이었다는 작년 가뭄보다 더 지독한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날마다 들 샘을 파러 다니다보니 새삼 조상들의 모습이 그리워진 걸까. 아니면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물줄기가 시원찮아 뭔가가 불안해진 것일까. 아버지의 새삼스런 조 상이며 가문 타령이 무슨 대단한 발언의 서론인 줄 알았다가 논조가 슬며시 훈계 쪽으로 돌 자 다찌니는 내놓고 염증이 난 얼굴을 했다. 그런 말이라면 우리 집에서 제일 귀가 아픈 사 람이 바로 다찌니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느그가 성장함시로부터는 힘에 부친 농사에도 사람을 그때그때 사서 쓰면 썼제 남자라믄 집안에 머슴도 안 들였다. 큰아부지 작은아부지도 있고 삼촌 오빠들도 있어 서 울타리만 짱짱하다믄 머슴 정도가 머시 그렇게 대수겄냐만 먼지 털끝만한 것이라도 나는 당최 조심스럽다는 그 말이다. 그란디도 올해부터는 말집네 수걸이를 아부지가 거두기로 했 다." 드디어 오늘의 볼론이 분명한 수걸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할머니와 엄마를 뺀 우리 는 모두 서로의 얼굴을 부지런히 쳐다보았다. 요즘 들어 더욱 수걸이는 꼭 알 밴 메뚜기 같 았다. 덩치는 부쩍 커졌는데 여전히 품이 좁고 길이가 짧은 단벌옷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때는 꼭지 달린 수박처럼 배퉁이가 허옇게 벌어지곤 했다. 큰언니와 일단 눈을 맞춘 다찌니와 다시 짠 하고 눈길을 부딪쳤다. 그러면 그렇지, 금방이 라도 킬킬 웃음이 터질 것 같은 아까의 그 얼굴이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누군가 반기라도 들까봐 염려한 걸까. 수걸이의 이름을 뱉은 순간부터 아버지의 얼굴은 지나치게 굳어버렸다. 목소리도 더욱 엄격해졌다. "그란디 이 일은 수걸이가 사내 몫으로 덜떨어졌다고 해서 선택한 것도, 하루이틀 생각으 로 뜽금없이 낼니 결정도 아니란 거이 중요하다. 수걸이가 국민학교를 삼학년에 중도폐지했 을 때부터 들일이라도 제대로 갈쳐놔야 그나마 사람 흉내라도 낼 틴디, 했은께 십년이 가깝 도록 생각하매 내린 결정이라 그 말이다. 수걸이라믄 아부지한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은 께로 느그도 그런 중 알고 앞으로는 더욱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된다. 상희 용희는 시방 뭔 말인지 알아묵었냐?" "야." 동생들이 많은데도 가족들 앞에서 맨날 대표로 훈계를 듣는 다찌니가 아버지의 위압적인 분위기에 눌린 나머지 볼멘소리를 간신히 눅이며 대답했다. "그라고 앞으로는 행남이 제남이는 물론이제만 용남이도 수걸이한테 성이라고 불러야 써. 용희는 동갑인께 동무로도 좋겄제만 이왕이믄 한솥밥 묵는 동기로 생각하고, 명희, 특히 상 희는 말 한마디라도 조심해야 한다. 모두들 뭔 말인지 알아묵었지야?" "야." 이번에는 뜻밖에도 니찌니가 혼자 아멘 하는 투로 야무지게 대답했다. 아버지 앞에서는 말이 없다 못해 대답조차 듣기 어려운 니찌니의 의외의 반응이었다. 아무리 형제처럼 생각 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의 백잡인 오빠조차 바보 수걸이한테 형이라 불러야 한다니, 잠시 혼 란스럽던 우리도 다찌니처럼 그만 킬킬 웃음이 나온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틈을 주지 않고 우리 집의 맏이인 큰언니를 다시 불렀다. 오늘 따라 위 압적인 가장의 권위로 뭔가 끝까지 다스릴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상희랑 용희는 청소하고 빨래한께로 밥은 명희 니가 하는구나, 그러냐?" "예." 큰언니가 아버지는 쳐다보지 않은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밥도 니가 푸냐?" "어머니께서 담으셔라우." "알았다. 인자부텀은 니가 담아라. 느그 어메는 제사 때라거나 손님이 있을 때나 담을 것 인께 앞으로는 니가 담아. 수걸이도 한 식구가 될 것인께 밥은 할머님이 식량 내주시는 대 로 하되 풀 때 윗밥은 한 그릇만 뜨고 전부 한데 섞어서 온 식구 똑같은 밥으로 퍼야 써. 이가 부실하신께 할무님 한 그릇만 윗밥 뜨고 똑같이, 알겄냐?" "......" "수걸이 밥은 용남이랑 겸상으로 받게 하고 참, 수걸이 모친은 옷 걱정부터 하더라. 오늘 은 우선 수걸이 입을 만한 것이 있는지 느그 어메보고 내 헌옷 잠 찾아보라고 해라." 그때였다. 우리 집에 불어닥친 혁명의 실바람을 온몸으로 거부하듯 할머니가 탁 숟가락을 내려놓고 저만큼 물러났다. 그리고 조용히 곳간 열쇠가 달린 허리띠를 풀어냈다. "내 밥만 따로 풀 필요도 없다. 그작년에 느그 고모가 해준 틀니 짱짱한께로 내 이빨 걱 정은 안해도 된다. 그라고 곳간 열쇠는 인자부텀 에미가 차라. 늙은 것 주제에 나는 해준 밥 이나 묵고 굿이나 봐야 옳은 것 같은께 인자는 느그가 다 알아서 해." "아이고 어무니 왜 이러신다요, 시방." "왜 내 말이 틀렸단 말이냐?" 갑자기 뭐가 어떻게 된 걸까. 엄마는 기겁을 하듯 손을 내젓고 할머니의 음성에는 쨍 쇳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가장 조용하던 두 사람의 너무나 돌연한 변화였다. "어무님이 물샐틈 하나 없이 지켜주신께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이루고 사는디. 아이고 저 는 못해라. 어무님이 살아 계신디 지가 워치케..." "그라믄 내가 어서 죽어야겄구나." "아이고 어무니, 아그들 듣는 디서 무신 말씀을 그렇게 하시요오!" 엄마는 숫재 빌고 있었다. 그때 여지껏 뭔가가 탱탱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쭈글쭈글해진 얼굴로 할머니를 넌지시 건너다보았다. "어무니, 지금은 아리랑 부른다고 잡어가는 일제시대도 아니고 청오산에서 반란군이 내려 오는 어지러운 세상도, 군인들이 총 들고 다니는 전쟁시도 아니란 말이요. 가뭄 들었다고 나 라에서 구호미 나오는 평화로운 공화국 시대란께라. 제발 아무 걱정 마시　 저 하자는 대로 잠 봐주시란 말이요 예? 어무니!" "그래서 내가 뭐락 하냐. 존 세상 왔은께로 다 느그 맘대로 하란 말이다. 존 일에 늙은이 는 돼가는 굿이나 볼랑께 하고 잡은 대로 다하란 말이다!" "어무니이!" 할머니의 어깃장에 아버지가 그만 방바닥을 탁 내리쳤다. 뜻밖의 광경에 우리들의 시선도 한꺼번에 팔짝 뜀을 뛰었다. "밥들 묵었으믄 어서 상을 내가야제 뭐하고 있으까아? 아 느그도 어서들 나가 놀아아?" 아버지가 다시 격해지자 엄마가 재빨리 우리를 내쫓았다. 하지만 할머니와 아버지의 대결 은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가장의 권위를 위해 나한테 불호령하던 아버지의 그 대상은 바 로 할머니였던 것이다. 할머니는 아버지를 언제나 부처님이나 예수님 이상 귀한 존재로 여 겼고 아버지 역시 할머니 앞에서는 말 한마디도 거칠게 하는 법이 없었다.그런데 지그재그 로 왔다갔다하던 뭔가가 드디어 짝수를 만난 듯 쨍 하고 부딪쳐버린 것이다. 그것은 오랫동 안 묵혀온 이상한 암투가 분명했다. 수걸이가 누군가, 바보 수걸이가 도대체 뭐기에 청산과부로 수전하며 자식만을 위해 헌신 해온 할머니와 세상에 드문 효자인 아버지가 저토록 치열하게 맞선단 말인가. 방에서 쫓겨 난 우리는 몹시 어리둥절했다. 더구나 할머니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더욱 격하게 말했 다. "구호미? 겨우내 불려댕김시로 손발이 얼어터지두룩 보 막고 집수정 맹글었다고 밀가리 두 포대씩 나눠준 그것? 힘이리라곤 없는 밀가리 그것도 양식이라더냐? 애비는 제발 그런 것에 속지 마. 뚜껑례네 엿장수까지 목숨 걸고 울매불매 전쟁하러 불려가는 거 못 봤냔 말 이여어. 외줄 넝쿨에 개똥참외 열리듯 주렁주렁 매달린 새끼들을 생각해서라도 지발 만사에 몸보신부터 생각하란 말여." "엿장수는 불려가는 것이 아니라 돈 벌려고 자기가 자원해서 가는 것이고, 또 월남이라는 데는 중국보다 멀고 먼 남의 나라란 말이요 어무니이. 우리나라는 지금 아무 걱정 없은께로 돈 받고 남의 전쟁을 도와주는 것이란께요!" 할머니의 격한 나무람에 아버지가 다시 사정조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자기 태 도를 반성하는 빛이 역연했지만 주장을 꺾은 건 아닌 것 같았다. "아이고 이 철없는 사람아, 넘의 전쟁 끝나는 그날이 바로 우리 전쟁 시작되는 날이란 걸 왜 몰라아. 왜놈들 가고 난께 눈깔 노란 미국놈들이 설치고 되놈에 러스케놈들까장 왔다갔 다한 지가 바로 엊그제 아녀어. 바로 그저께도 모의 간첩인가 뭐인가 잡는다고 저 코흘리개 행남이랑 제남이 같은 국민학상들까장 훈련시키는 것 잠 봐. 평화는 대체 뭔 놈의 평화냐고 글쎄에. 이렇게 조용할 때일수록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봄시롱 살아야 한다께로오." "아니 대관절 수걸이 데려다가 일 좀 가르치는 것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이 뭔 상고나이길 래 그러시오, 어무니이." "왜 상관이 없어. 다른 누구도 아닌 금석이놈 새끼를 데려다 노믄 동네 사람들은 뭐라고 할 것이매 나중에라도 뭔 숭한 꼴을 볼지 누가 알아서!" "저렇게 한해 한해 나이만 묵다가는 영 모지리 바보밖에 안될 것ㅇㄹ 이제라도 데려다가 사람 맹글겄다는디 누가 뭐락 한다고 그러시오. 수걸이 당사자는 물론이제만 수걸이 모친으 로 봐서도 근심 하나를 덜게 되었고 우리야말로 힘센 일손 하나 빌리게 되었으니 일거삼득 이 아니냔 말이요." "이 사람아." 아버지를 불러놓고 심호흡을 하는 것인지 할머니가 갑자기 말을 멈춰버렸다. 그 침묵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기가 막혀버린 것 갔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지금 그걸 일부러 방치한다고 생각되는 것이다.그것은 청천벽력 같 았다. 순간적이지만 뭔가가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나를 이상한 공포로 몰아넣었다. 우리 집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질서가 와해되는 느낌. 효자로 소문난 아버지가 이 마당에 그걸 저버린다면, 그것은 바로 몰락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왜 그랬는지 나는 순간적 으로 아버지를 의심하며 몰락의 느낌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할머니와 아버지가 동시에 다투듯 서로를 불렀다. "어무니." "이 사람아, 내 말부터 들으랑께." 그나마 여전한 음성에 나는 휴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갑자기 속삭이듯 음 성을 낮췄다. 나는 다시 긴장이 되었다. " 웃집 성님이 날이면 날마다 물 떠 이고 발바닥이 닿도록 거멍숲을 쫓아다니매 비손질해 도 이미 소용없다는 거 세상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여. 종하하고 종구가 살아 있다믄 이 세상 끝에서라도, 네 발로 기어서라도 시방까지 에미 애비를 안 찾았을 리가 없은께로. 하제만 금 석이 그놈은 달라. 말집네 그 여편네, 뚜껑례니 당골네 무당이니 찾아댕김시로 여시 방정을 떨어쌓제만 지 서방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짓이제, 고춧가루 서 말을 퍼묵고 뻘밭 삼십리를 기어도 끄떡없을 놈인디 그놈이 그렇게 쉽게 죽었겄냐고! 어딘가에 살아서 시방이 세상을 재어보고 있을 것이 틀림없는디." "어무니이!" 애써 고분고분하던 아버지가 다시 비명처럼 할머니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래도 할머니는 뻑뻑한 모과처럼 막무가내였다. "나중에라도 무담시 그런 사람 일에 휘말리지 않을라믄 동무도 좋고 친구도 좋제만 제발 아무것도 못 본 척, 모른 척해야 된다 그 말이여 내 말인즉슨. 내 말만 들어. 그런 집구석하 고는 애초에 상종을 않는 것이 무조건 탈 없이 사는 길인께!" "어무니이!" 급기야 심장이 터질 듯한 아버지의 부르짖음과 함께 어흐흑 어흐흑 하는 누군가의 생전 들어보지 못한 괴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산이나 들이 무슨 일로 흐느낀다면 바로 저런 소 리일까. 어른이, 더구나 아버지가 흐느낀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것이 무 슨 소리인지 낯선 느낌 그 자체로만 듣고 있었다. 그 흐느낌이 끝났을 때 우리 집은 물속 같은 이상한 침묵 속에 가라앉았다. 밥상을 내온 언니들은 살강과 부뚜막과 바람벽에 몸을 기댄 채 멀뚱한 눈으로 깊고 어두운 어딘가르 fqk 라보고 있었고 토방마루 기둥에 등을 기댄 오빠는 연이라도 날리는 사람처럼 하염없이 먼곳 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니 오빠들은 안방의 대화를 제대로 다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흐느낌이 왜, 누구 의 것인지도 알 것이었다. 나도 뭔가 막연하나마 비로소 감이 잡혔다. 그것은 바로 물 떠 이 고 거멍숲에 비손질을 다닌다는 '웃집 성님'이었다. 그동안 나조차도 어떤 향수나 애절함 없 이는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할머니의 입에서 수없이 불려지던 '웃집 성님'이 바로 쫑알댁이 었다는 것, 아니 쉴새없이 쫑알대는 쫑알댁이 아닌 친정이 종일인 종일댁이라는 것, 그리고 외로운 우리 아버지를 친자식과 같이 보살펴주었다는 '웃집 시숙님'이 바로 종일댁의 남편인 그 노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웃집 성님'과 '웃집 시숙님'에 관한 것이라면 나도 얼마쯤은 알고 있었다. 우리와 담 하나 사이의 바로 윗집에서 살았다는 그들에게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귀에 너무나 익숙한 그 이름은 종하와 종구였다. 일본에서 십년이나 공부 를 하고 돌아왔는데, 인근에 뛰어난 사상가며 독립운동가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들을 웃집 큰형과 작은형이라고 불렀다. 어린시절 그들과 친형제처럼 자랐던 우리 아버지는 그들의 실 종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할머니의 입에서 그들이 이름을 불려질 때마다 저절로 어 두운 얼굴이 되어 한숨과 함께 말을 잃는 아버지를 통해서 우리는 그 상처의 깊이를 얼마든 지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날마다 연을 띄우며 수자가 그토록 기다리던 수자네 아버지조차 도 우리 아버지의 그 상처에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뭔가가 너무나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내가 이해하고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이야기들이었다. 어른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그랬다. 나는 그만 진력이 나서 사 랑채 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인지 아까참에 외양간에 달린 허청부엌으로 들어간 제남이가 아직 나오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가서 부엌을 슬며시 들여다보았다. 제남이 는 소 여물을 삶는 커다란 가마솥 알에 쪼그리고 앉아 아궁이에 불을 때고 있었다. 행여 불 알이 떨어질까봐 남자들은 부엌 근처에도 못 가게 하는 것이 우리 집이었다. 그러나 제남이 는 아궁이를 들여다보며 아주 열중이었다. "누가 너보고 여물 삶으라디야?" 나는 그냥 물었을 뿐인데 제남이가 소스라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부지깽이를 팽개치 며 뒷문으로 도망을 쳤다. 나는 순간 이유없이 가슴이 철렁했다. 나는 부뚜막 위로 올라가서 끙끙거리며 커다란 솥뚜껑부터 열어보았다. 맙소사, 나도 들어가서 누울 수 있을 만큼 커다 란 가마솥 안에는 구슬처럼 조그만 종달새 알 세 개가 동그맣게 놓여 있었다. 순간 내 머릿 속에서 핑 바람개비가 도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나물 캐러 갔을 때 수자가 쑥덤불 사이에 서 찾아내 나에게 준 것이었다. 종달새 알을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손바닥을 내밀고 생전 처음 그것을 받는데 팔은 갑자기 장작개비처럼 무거워지고 손바닥이 몹시 근지러웠다. 하지만 그 것은 막상 너무나 가벼워서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알록달록한 무늬까지 너무나 예쁘 고 사랑스러운데다 행여 놀랄까봐 나는 몹시 조심스러웠다. 발소리도 나지 않게 숨을 죽이 며 집으로 가져온 나는 할머니가 겨우내 발라놓은 새 목화솜을 훔쳐 그것들을 곱게 싸두었 다. 알이 깨어 종달새가 나오는 걸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야생으로 자란 종달새는 집에서 기 를 수 없지만 집에서 깬 종달새는 기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제남이가 군침을 삼키 며 그것을 몰래 삶고 있었던 것이다. 새알은 물에 닿으면 곧 곯아버리기 때문에 그것들은 이미 생명의 가망을 잃어버린 셈이었 다. 나는 너무나 애통해서 발을 구르며 울기 시작했다. 그러자 곧 허청으로 달려온 오빠가 다짜고짜 종주먹을 들이대며 나를 치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당장 뚝 울음을 그치라는 것이 다. 시늉만으로도 얼마나 살벌했는지 나는 머리가 다 아찔했다. 안방의 상황을 깜박 까먹었 던 나는 그러나 그대로 넘어가기에는 너무나 억울했다. 나는 대신 부지깽이를 들고 제남이 를 쫓았다. 그러나 다람쥐처럼 재빠른 제남이가 잡힐 리 만무했다. 제남이는 가다가 돌아서 서 개처럼 한쪽 다리를 들며 입방귀까지 뀌었다. "뽕! 뽕! 뽀오오!" 하루 종일 분을 참지 못한 나는 그날 오후에야 복수의 방법을 생각해냈다. 제남이의 보물, 구슬이 박힌 태극무늬 팽이와 자치기를 돼지막 오줌통에 넣어버린 것이다. 역시 제남이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자기 물건이라면 끔찍하게 구는 제남이가 돼지 오줌 통에서 건져올린 자치기를 보더니 그대로 발작하며 데굴데굴 온 마당을 굴러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제남이가 일단 퉁을 부리면 아버지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또 엄마에게 집 뒤안으로 불려가 매를 맞았다. 엄마한테 그렇게 오지게 맞아 보기는 처음이었다. "누구를 닮아서 가시나가 이렇게 오기가 씨냐 엉? 아무리 분한 일이 있드라도 돌아서면 잊어뿌레야제 가시나가 그렇게 꼭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하겄냐고오! 있어도 없는 드끼. 뭔 일이든 즉시에 삭여야제 가시나가 성질 그렇게 써봤자 자기 신상만 괴롭다는 걸 왜 몰라 아!" 엄마도 엉뚱한 것에 화를 내고 있었다. 아무리 동네북이라지만 애초에 잘못은 누가 했는 데 내가 왜 매를 맞는단 말인가. 제남이는 원래 퉁이 세니까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 나는 아 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돌아서면 잊어버려야 한다니, 그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 있는가. 나 는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는 엉엉 집이 떠나가라 울어젖혔다. 내가 크게 울수록 엄마 는 뿌리를 뽑겠다고 더욱 때렸다. 이제는 엄마까지 나를 때린다는 사실도 참을 수 없을 만 큼 슬펐다. 나도 그만 뒷방것이 되고 만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지지 않 고 더더욱 큰소리로 울어젖혔다. 급기야 갈라진 목에서 바람소리가 새어나왔다. 목이 찢어진 듯 너무나 아프고 배창자도 땡겼다. 이대로 조금만 가면 죽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부엌 뒷문을 와장창 열어젖히며 할 머니가 발을 땅 굴렀다. "회초리로 때려서 죽는다냐, 아냐 여기 지겟작대기 있다. 아예 나보는 데서 죽여라!" 할머니가 우당탕 지겟작대기를 내던졌다. 난데없는 할머니의 출현에 얼른 옆으로 비켜서 던 엄마가 벌겋게 충혈된 눈길을 지겟작대기로 옮기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정말 죽는 걸까. 또딸이, 뒷방것 대신 나를 죽이기로 한 걸까. 순간 박달나무로 깎은 지겟작대기에 개구리처럼 걸쳐진 내 모습이 떠올랐다. 너무나 무서워서 삽 시간에 온몸이 소름에 휩싸였다. 나는 그대로 기절해버렸다. 5. 민들레 세상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실컷 앓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집은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우 선 식사 때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우선 식사 때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또 밤에는 제남 이가 안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동안 할머니가 돌아가신 걸까. 그래서 아버지가 혼자 윗방을 차지한 걸까. 나는 그런 변화가 너무나 무서웠다. 우황청심환을 먹어서 이제 학교에 갈 수 있으리라고 하는데 나는 아무래도 그 변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뭔가가 이상했다. 어디서 고 할머니의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게 너무나 이상했고 온 식구가 마치 물위의 소금쟁 이처럼 가만가만 걸어다니는 것도 이상했다. 그날 밤 아버지가 아무도 모르게 할머니를 거멍숲에 내다버린 걸까. '어머니, 내가 잘못했 은게 찹쌀떡 싸갖고 꽃놀이 갑시다' 속이며 할머니를 지게에 지고 가서 낮에도 길을 잃는다 는 거멍숲 한가운데 버려두고 온 걸까. 그래서 집이 이렇게 물속처럼 조용한 걸까. 할머니는 어떻게 된 걸까, 나는 새도 길을 잃을 만큼 짙은 거멍숲을 헤매고 헤매다가 소나무 등걸에 엎드려서 해걸이 되어가는 건 아닐까.아니면 소나무기둥을 돌고 돌다 실성해서 종일댁처럼 바다를 향해 앉아 있는 건 아닐까. 모래땅에 뿌리가 내리도록 하염없이 앉아 있는 건 아닐 까. 상상은 끝없이 이어졌고, 나는 아무래도 다리의 푸린 힘을 모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 일어 나지 못하면 나도 거멍숲에 버려지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동생하고 싸우기만 했 지 아무 쓰잘데없는 딸 하나쯤이야 누가 애달피라도 하겠는가. 엄마마저도 나를 때리는 마 당에 말이다.나는애장무덤첢 옹기에 담겨 길가에 묻혀질 것이었다. 심심하면 오가는 사람들 이나 구경하라고. 그러면 나는 날이 궂을 때마다 피난민들이 묻고 간 아기들처럼 액나장이 녹는 솔바람 소리로 거멍숲을 휘돌곤 할 것이다. 나는 눈만 감으면 거멍숲에 몰아치는 바람소리를 듣곤 했다. 바다가 뒤처기며 포효하고 사나운 눈보라가 몰아치며 거멍숲이 가슴 터지도록 울음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 떤 때는 누군가가 인희야아아아! 울부짓으며 시찌니 아닌 나를 쫓아오는 것도 같았다. 나는 자다가도 소스라쳐서 울부짖으며 깨어 일어나고 한밤중에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기도 했다. 아파 누우니까 너무나 많은 것들이 슬프기만 했다. 아이들은 제삿날 밥 먹으러 오다가 중 간에서 해찰부리고 놀아버리기 때문에 제사를 지내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생전엔 생일도 안 차려주면서 죽어서 제사조차 안 지내주는 현실이 너무 슬펐다. 나는 멀뚱멀뚱 천 장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엉엉 흐느껴 울곤 했다. 더구나 아픈데도 식구들은 나를 돼지 다루듯 했다. 몸부림치는 내팔다리를 언니들이 저마 다 하나씩 붙들고 찍어누르면 아버지가 내입을 억지로 벌려서 독약처럼 쓰고 새카만 물을 들이붓는 것이다. 아버지가 약사발만 들고 나타나면 나는 잔칫집에 붙잡혀온 돼지처럼 멱따 는 소리를 내지르며 온몸으로 저항하고 거부하다가 정신을 잃곤 했다. 그동안 할머니의 권세에 지나친 점이 있었다는 건 나도 인정하는 바였다. 만날 잔소리하 며 엄마를 비롯해서 우리 집 여자들을 못살게 닦달하는 장본인인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우리 집에서 가장 높은 어른이 아닌가. 아버지가 늘 말했던 것처럼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를 낳고 길렀으며 수호신처럼 오십년 동안이나 우리 집을 지켜온 어른인 것이다. 아버지와 엄 마가 언제나 읍하는 자세로 받들어 모시는 것은 지당하고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위계질서가 우리 집을 지키는 힘이고 법인 것이다. 할머니가 더러 지나친 잔소리와 부당 한 편견으로 우리를 기죽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찌니가 함부로 반항하며 아무리 날뛰어 도, 하루도 바람 잘 날 없이 치고 박고 터지는 팔남매의 온갖 말썽에도 우리 집을 한결같이 지켜주는 거대한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감히 그렇게 큰 소리로 대들다니. 아버지 스스로 뭔가를 무너뜨려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할머니를 갖다버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그날 이상한 공포를 겪 었던 나는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더욱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을 발전시켰다. 할머니도 아파 서 윗방에 누워 있다는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들과 함께 병문안을 오지 않았다면 나는 식구들의 말을 끝까 지 믿지 못했을 것이다. 볕이 드는 마루로 기어나와 엎드려 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운동회라도 하는 것 같은 느 낌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이 응원하는 쪽을 쳐다보았다. 아이들은 모두가 낯익은데 심은희 선생님이 아닌 무서운 지호기 선생님이 서 있는 것이 조금 엉뚱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곧 나는 이제 4학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쨌건 여러 날 결석한 사실이 두려워서 나는 뭉 그적뭉그적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이 달려와서 백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쓰러진 나를 부축해 주었다. '한해돕기 운동' 때문에 아이들은 날마다 오전수업만 한다고 했다. 중학생들처럼 직접 샘 을 파러 다니거나 도랑을 치러 다니는 건 아니지만 갓난 동생이 있는 아이들이 애보기를 해 야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제 보니 행남이 이거 바보네에. 건강해야제 아프긴 왜 아프다냐이?" 내 머리를 친절하게 쓸어주며 빨리 나으라고 격려하던 선생님이 할머니를 찾았다. 뽕나무 밑동에서 뭔가를 찾다가 손바닥으로 얼른 마른세수를 하고 황급히 허리를 굽혀 인사한 아버 지가 선생님을 윗방으로 안내했다. 선생님이 윗방으로 들어가자 아이들은 전부 나를 둘러쌌다. 한결같이 주인공인 나를 염려 하고 걱정하는 눈길들이었다. 특히 청오산 중턱 몰고리재에 사는 김한수가 몹시 수줍은 눈 길로 나를 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내가 김한수를 그렇게 바라보며 속으로 애가 타곤 했다. 얼굴과 머리카락이 노랑영감처럼 놀놀한 김한수는 감물을 들인 당목 바지에 먹고무신조차 헝겊을 대서 기워 신고 다니지만 달리기와 공부는 제일 잘해서 우리 반 반장이었다. 또 말 은 없는 편인데 보리피리나 갈대피리를 기가 막히게 잘 불었다. 그런데 내가 애가 타는 진 짜 이유는 김한수가 살고 있는 그 몰고리재 때문이었다. 우리 언니들은 봄만 되면 친구들과 몰고리재로 진달래를 따러 갔다. 술을 담그기 위해서 였다. 그리고 또 가을에는 들국화를 따러 갔다. 술도 담그고 베갯속도 넣기 위해서였다. 김 치를 넣어서 팔뚝만하게 만 김밥과 삶은 감자를 싸고 할머니 몰래 계란도 삶아 가던 언니들 은 봄이면 봄 가을이면 가을 내내 몰고리재를 들먹이며 탄성을 질렀다. 몰고리재는 청오산 중턱에 펼쳐진 벌판인데 봄이면 진달래가 붉은 꽃바다를 이루고 가을 이면 들국화가 또 달빛이 쏟아지는 것 같은 꽃바다의 장고나을 이룬다는 것이다. 김한수네 는 그 몰고리재에서 조그만 떼밭에 고구마와 조를 심어 먹으며 염소를 기른다고 했다. 나는 김한수를 볼 때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를 생각했다. 말린 들국화로 속을 넣은 아버지와 할 머니의 베개를 몰래 베어볼 때마다 또 학교에서 김한수를 볼 때마다 나는 상상했다. 알프스 꼭대기에서 할 아버지와 양을 치는 하이디처럼, 밤마다 떡갈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저만 치 발 아래로 뜬 별과 함께 마른풀을 깐 향긋한 자리에서 잠을 자는 김한수의 모습이 저절 로 떠오르곤 했다. 밤마다 향긋한 마른풀을 깔고 잠을 자기 때문에 김한수는 아마 얼굴과 머리카락이 놀놀한 걸 거라고 나는 마음대로 생각해버렸다. 그리고 김한수는 학교를 파한 오후마다 휘파람을 불며 염소들을 몰고 꽃바다를 이룬 벌판과 낭떠러지 절벽과 비탈길을 돌 아다니기 때문에 그 질긴 먹고무신이 그렇게 빨리 닳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하이디처럼 알프스의 향기로운 바람과 별과 양떼와 이름없는 풀꽃들이 그리 워서 병이 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알프스로 돌아온 하이디처럼 나도 청오 산 몰고리재로 가면 병이 저절로 나을지 모르는 것이다. 나는 나중에 커서 시집을 간다면 꼭 김한수 같은 아이한테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큰언니가 누룽지를 모아 튀긴 것을 한 바가지 내다주자 아이들은 허겁지겁 순식간에 그것 을 다 먹어버렸다. 엄마가 다시 생엿을 꺼내 망치로 깨주자 아이들은 눈알이 뒤집힐 듯이 볼을 크게 볼록거리며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엄마는 할 수 없이 큰언니더러 빨리 밥을지 으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을 대접할 생선을 사기 위해 장터거리로 줄달음을 쳤다. 언니들 은 선생님과 아이 손님들을 위해 온갖 깔끔을 다 떨었다. 그렇게 선생님과 아이들이 다녀간 이후 나는 병이 저절로 나아버렸다. 하얀 수건으로 이 마를 잔뜩 졸라맨 할머니가 윗방에서 몸을 내밀고 선생님을 배웅하던 모습을 내 눈으로 똑 똑히 본 것이다. 그동안 할머니도 정말 병이 난 모양이었다. 허청허청 윗방 앞으로 가서 문구멍으로 들여 다보니 아버지가 정말 할머니에게 마음을 떠먹이고 있었디. 원래 고뿔이나 몸살 같은 사소 한 병이라도 일단 할머니가 아프면 아버지는 윗방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잤다. 미음도 아버 지가 직접 떠먹여드렸다. 그렇다면 할머니와 내가 앓은 것뿐 그동안 우리 집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단 말인가. 왼쪽 무릎은 세우고 오른쪽 무릎은 꿇어서 자세를 낮춘 아버지의 그 지극한 모습과 옴죽옴 죽 미음을 받아먹는 할머니의 여전한 모습에 나는 또 뒤통수라도 된통 얻어맞은 듯 얼얼했 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의 공포와 슬픔은 도대체 무었이었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 지 이틀 만에 학교에 갔다. 첫날은 큰언니가 비로드 머리띠로 멋을 부리고 학교까지 나를 업어다주었다. 엄마가 업으려는 것을 내가 거절했기 때문이다. "장차 뭣이 될라고 쥐방울만한 가시나 성질머리가 이 모양이까." 엄마가 가슴이 터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은 꿈 같았지만 엄마가 나를 때리던 장면만큼은 생생했다. 나는 앞으로 평생 동안 엄마 앞에서는 웃지도 않겠다고 속으로 결심 했다. 일주일 만에 학교에 나온 나에게 우리 반 아이들이 반갑다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데 청 소시간에 나를 조용히 부른 선생님이 큰언니에 관한 것을 물었다. 몇살이며 어느 학교를 나 왔냐 정혼한 데는 없느냐 애인도 없느냐, 꼬치꼬치 물었다. 나는 고분고분 사실대로 대답했 지만 애인이라는 말만큼은 왠지 불결하게 들려서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학교에 나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느그 동무네 집인께 니가 앞장서라." 할머니가 가자고 한 곳은 뜻밖에도 수자네 집이었다. 무슨 마음을 먹은 것인지 수걸이를 데리러 간다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놀란 아버지가 대문까지 따라나왔다. "마실 삼아 들여다나 보고 오시오 어머니. 오늘 당장 데꼬 오실 필요는 없은께라. 행남이 는 할머니 어지러우시면 안된께 조신조신 길안내 잘하고." 그러나 할머니는 말집네에 들이닥치자마자 쯧쯧 혀를 차며 수자네 엄마한테 호통부터 쳤 다. 말죽을 끊이던 커다란 가마솥과 말구유가 없어진 것을 보고서였다. 수자네는 그것들을 판 돈으로 밀가루를 사서 그동안 죽을 끓여먹었다는 것이다. "옛동무 자식한테 일 갈쳐서 사람 만들것다는디 내가 워치케 끝까장 반대야 하겄는가만 이 사람 자네가 정신 못 차리믄 나도 장담은 못해. 저기 갯가에 내려가 낙지에 꼬막만 잡아 다 팔아도 세 식구 풀칠은 너끈할 거여. 아니 뻘밭이 힘들믄 남의 보리밭에 나가 김이라도 매봐, 밥 안 멕여주나. 들판 넓어 갯벌 기름져 산 울타리 널널해. 천지신명이 점지해준 이런 땅에서도 묵을 것이 없다고 새끼들 굶긴다믄 죌세 죄. 우리 아범 인정을 못 말려서 내 수걸 이 입 하나 붙이는 꼴은 보제만 그 이상은 절대로 안돼. 시방 뭔 말인 중 알아묵겄는가? 으 째 대답이 없어 이사람아!" 할머니는 숫제 삿대질까지 해가며 닦달을 했다. 앞으로 수걸이를 빙자해서 공짜밥 얻어먹 을 생각을 말라는 으름장치고는 너무 노골적이었다. 어떤 화풀이 같기도 하고, 어쩌면 진정 한 충고인지도 몰랐다. 할머니가 세기는 과연 셌다. 수자한테 쇳소리를 지를 땐 꼭 악머구리 같던 말집네도 급기 야 저고리 소매에 얼굴을 파묻고 흑흑 흐느껴 우는 것이다. "우리 수걸이 사람 맹글어주시겄다는디 저까지 워치케, 아짐 저놈이 잠 부족한 데는 있어 도 힘은 씬께 지발 배만 안 곯게 해주시오. 그렇게만 된다믄 나는 인자 여그를 떠도 좋고 죽어도 여한이 없은께라." "젊은네가 늙은이 앞에서 벨소리를 다하고 있네 쯧. 나는 자네보다 더 일찍 혼자 됐어도 자식들 앞에서는 한숨 한번 안 쉬었어. 씰데 없는 소릴랑 말고 지발 털고 일어나게. 일어나 서 호미자루 들고 물씬물씬한 땅냄새도 맡고 새 풀냄새도 잠 맡아봐. 몸에 기운이 저절로 돌 팅께." "그러고말고라 그러고말고라." 말집네가 아예 지푸라기 각시처럼 방바닥으로 엎어져버렸다. 처음부터 민망해서 좀이 쑤 시던 나는 슬그머니 방을 나왔다. 수자도 부엌 부뚜막에 걸터앉아 울고 있었다. 부뚜막에 나 란히 걸터앉자 나도 괜히 눈물이 나왔다. 우리가 함께 울자 야단맞은 사람처럼 엉거주춤 기 둥 옆에 서 있던 수걸이도 잉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아니 집터가 오구삼살방윈가, 시방 이거이 뭔 소리여 잉? 뭔 노무 잡귀 꼬이는 소리냐고! 방긋방긋 웃어도 지나가던 복이 쳐다볼까 말깐데 뭔 노무 복 까부는 소리냐고오!" 할머니가 호통치자 돌멩이 떨어진 연못의 개구리들처럼 사방은 이내 숨소리조차 조용해져 버렸다. "쇠뿔도 단김에 뺀단다. 어 앞장서라. 아무것도 준비할 것은 없은께로 선걸음에 가자." 할머니가 손사래를 치자 자동인형처럼 돌아선 수걸이가 불안한 눈길을 둘레둘레하며 앞장 섰다.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슬퍼 보이기도 하고 천리 타향 먼길이라도 떠난다는 듯 자꾸만 뒤돌아보는 모습이 우습기도 했다. 수자 역시 사립 말뚝에 붙어서서 우리가 동네마당을 다 빠져나오도록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어싿. 그러나 수걸이의 새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 극심한 낯가림이 문제였다. 누 구하고도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등까지 돌린 채 고개를 처박고만 있었다. 누가 부르거 나 무슨 일을 시키기 전에는 등을 돌리고 선 그 자세 그대로 꼼짝을 하지 않는 것이다. 특 히 언니들의 말소리가 들려오면 샘가나 벽오동나무 뒤로 슬며시 돌아가버렸다. 하지만 아버지의 헌 옷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품도 길이도 남아돌아 바보스럽 긴 마찬가지지만 낡아서 너덜거리는데다 품도 모자란 자기 옷에 비교할 바는 아닌 것 같았 다. 걸음은 옮길 때마다 버석거리는 풀기가 거슬리는지 자기 몸을 낯설게 둘러보다가 배퉁 이와 엉치께를 쓸어내리곤 했다. "옷만 갈아입혀도 옥골선풍이 따로 없네 그랴, 쯧쯧쯧." 손수 수걸이를 데리고 온 것처럼 할머니는 순순하게 수걸이를 평가하며 오지다느 듯이 웃 었다. 혹 수자 모녀의 끼니까지도 떠맡게 되지 않을까, 단지 그것만이 반대한 진짜 이유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사생결단이라도 내려는 듯 그토록 거세고 치열하게 반대하던 품으로 보 아서는 너무나 돌연한 변화였다. 원래 할머니는 어떤 것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사람이 아 니었다. 더구나 아버지를 위한 당신 나름의 신념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한 어른들의 일이라면 나는 관심조차 귀찮아져싿. 알려고 할수록 아리송한 것이다. 첫날 수걸이가 한 일은 생전 처음 져보는 지게에 복합비료 한 부대를 얹고 아버지를 따라 새벌 못자리논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동네마당의 스타인 수걸이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사실 에 흥분한 제남이도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갔다. 그리고 신발짝 가득 개구리 알을 잡아가지 고 왔다. 아버지가 못자리에 비료를 뿌리는 동안 수걸이가 잡아주었다는 것이다. "떽! 못써. 일을 배우라고 온 사람이 어른 일하는 디 따라가서 기껏 애하고 깨구락지알이 나 잡다 와?" 할머니가 나무자라 수걸이는 눈썹 밑에서 더 이상 얼굴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일을 배우고 제대로 사람이 될라믄 늙은 쥐가 두지 쏠 듯 열심히, 배고픈 사람이 밥 찾 드끼 발끝마다 어른 쫓아댕김시로 부지런히 보고 배와야제, 글씨 애랑 깨구락지알이나 잡다 오냐고." 수걸이는 내내 얼굴을 풀지 않다가 해가 뉘엿거리자 슬며시 동네마당 자기 집으로 가버렸 다. 할 수 없이 저녁밥은 우리 집으로 가장 큰 놋쇠 밥그릇에 고봉으로 담아서 엄마가 가져 다주었다. 다음날은 다찌니가 가져다주고 그 다음날은 니찌니가 번갈아서 가져다주어싿. "상전이 하나 생겼고만." 할머니는 쩟 입맛만 다실 뿐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봄갈이 쟁기질이 시작되어싿. 논에 물을 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제 시기에 갈아엎어야 하 기 때문이었다. 쟁깃짐을 짊어진 잿등 아재는 아직 털이 부숭한 자기네 중소를 끌고 왔다. 여자 혼자서도 지을 수 있을 만큼의 땅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짐과 아재는 일년 내낸 단골로 우리 농사를 거들어주었다. 우리는 우리 것말고도 광주에 사는 고모네 농사까지 맡아서 짓 기 때문에 농사량만큼은 한꺼번에 들이대도대농인 셈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잿등 아재가 쟁기 두 대를 한꺼번에 들이대도 한차례씩 갈아엎으렴녀 사나흘은 족히 걸리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와보니 언니들은 모두 텃밭에서 마늘쫑을 뽑고 할머니와 엄마는 뽕잎을 따 고 있었다. 두 항아리쯤 장아찌를 담을 마늘쫑은 모내기 때 먹을 중요한 밑반찬감이었고 누 에치기는 할머니의 중요한 부업인데 물오른 누에들은 한창 식욕이 왕성해져 있었다. 그런데 사다리를 타고 뽕나무에 올라가 있던 엄마가 나더러 새벌 쟁기논에 막걸리를 가져다주라고 했다. 새참이 나갈 때까지 목을 축이라고 안주 없이 내가는 것이었다. 새범 우리 논은 마을 뒤께로 가서 사천둑을 타고 가면 오리쯤 되고 동네마당 쪽에서 곧장 논둑길을 타고 가면 그 절반이 조금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는 어 린 제남이도 가끔씩 거드는 심부름이었다. 나는 군말없이 향긋한 술냄새가 풍기는 묵직한 주전자를 들고 나섰다. 사실 그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심부름이었다. 먼길을 다녀와 어른 한사람 몫을 했다고 칭찬도 톡톡히 받지만 무엇보다 달콤한 술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타박타박 사람이 드문 들길을 걸어가면서 심심할 때마다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쪽쪽 빨 아마시는 재미는 무엇에도 비교할 수가 없었다. 엎드려서 꼭지를 쪽 빨기만 하면 입안 가득 달콤한 술맛이 차오르는 주전자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어떤 때는 그 실험을 반복하느라 너 무 마시고 정신이 알딸딸해서 발을 자꾸 헛딛기도 했다. 그러나 들바람을 마시며 먼 길을 걷다보면 저절로 정신이 차려졌다. 너무 먼 길이긴 하지만 나는 사천둑길을 택하기로 했다. 이왕 가는 길에 마을 뒤께 노인 의 오막살이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생각이 날 때마다 그 오막살이를 몹시도 그 리워하곤 했다. 종일댁이 바로 할머니의 '웃집 성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너무나 많은 것이 궁금해졌다. 생전 처음 먹어본 상어포의 그 설명할 수 없는 맛에 대한 향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마 껍질을 벗겨주던 종일댁의 그 정성스런 손길도 잊혀지지 않았다. 밤만 되면 내 마음은 그 오막살이로 향하곤 했다. 저너머재로 해가 넘어가고 산 위의 어 둠이 마을까지 내려오면 그때부터 오히려 머릿속이 말똥말똥 밤을 새우게 되는데, 대개는 그 오막살이가 떠오르는 것이다. 밤은 참 이상했다. 낮에는 물항아리를 이고 가는 종일댁을 볼 때마다 '아 할머니의 웃집 성님이 또 행방불명된 자식들의 무사안녕을 위해서 비손을 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낯익고 당연한 그 풍경을 심상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밤이 되어 그 오막살이에도 어둠이 내린 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달라져버렸다. 종일댁이 밤마다 돌멩이로 둥그렇게 담을 쌓은 그 조그만 바가지샘을 통해 용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종일댁은 스스로도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하질 않던가. 하지만 그랬다간 만약 바다 한가운데서 상어라도 만나 돌아 오지 못하는 사고가 생긴다면 노인은 혼자 외로워서 어떻게 할까. 벅구도 이젠 늙어서 상어 같은 무서운 동물은 감당하지 못할 텐데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나는 혼자 상상하며 애를 태우다가 끝내 너무 슬퍼서 몰래 코를 훌쩍이곤 했다. 날마다 내용이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마법에 걸린 것은 종일댁이 아니라 종하와 종구인 지도 모르는 것이다. 행방불명된 것이 아니라 용궁에 갇힌 것이다. 그래서 종일댁은 날마다 맑은 물을 떠다가 바치며 아들들을 돌려달라고 용왕님께 비는 것이다. 노인도 우리 할머니 한테 그 마음을 이해하라지 않던가. 하지만 슬프기는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파노인이 다 되도록 그 마법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은 정말 너무나 슬픈 부부였다. 밤만 되면 그 오막살이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게 슬프고 처연해서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하얀 마당이 빛의 웅덩이라도 되는 양 한낮의 햇빛 만이 튀기듯 무수히 내리꽂히고 있었다. 예상했던 일이었고 그들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나는 다리에 힘이 빠지고 뭔가가 몹시 심드렁해졌다. 사천둑에 올라서니 세상은 그대로 빛의 잔치였다. 사천의 마른 물줄기는 그야말로 빛의 타래처럼 몸을 뒤척이며 끝없이 흘러가고 다닥다닥 노란 민들레가 빈큼없이 피어난 사천둑 은 저 끝의 거멍숲을 깃발처럼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지랑이 때문에 마을과 들과 산, 세 상의 모든 것들이 하늘로 흐르는 것 같았다. 특히 보리밭과 유채밭이 섞여 있는 웃뫼 중턱 은 제 색깔끼리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아가며 강강술래를 하는, 초록과 노랑의 거대한 운동 장 같았다. 운동회 때처럼 나는 몹시 목이 말랐다. 나는 깜박 잊고 있던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한 모금을 쭉 빨아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술이 싸아 하고 내 몸을 깨끗이 씻어내렸다. 그리고 내 몸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인 듯했다. 머리가 휭 돌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져버 렸다. 원래 주전자 꼭지는 눈깔사탕처럼 입안에 아끼듯이 굴리면서 쪽쪽 빨아야 하는데 첫 입에 너무 세게 빨아버린 것이다. 걱정이 된 나는 눈의 초점을 모아서 새벌 끝머리까지의 거리를 재어보았다. 쟁기질하는 아버지와 아재와 수걸이는 아직도 가물가물 개미처럼 조그맣게 보였다. 그나마 아지랑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뜀을 뛰는 것도 같고 빛 속으로 흐믈흐믈 사라졌다 나타났 다 이상한 춤을 추는 것도 같았다. 나는 안심하고 목젖까지 환기가 되도록 입을 하, 하, 불 며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 하, 하고 입을 불다보니 눈가로 자꾸 눈물이 흘렀다. 나는 새삼 뭔가가 몹시 비감해졌다. 사실 나는 아직도 오랑캐꽃 뿌리를 달인 쓰디쓴 약을 강제로 마시는 중이었다. 밤잠을 못자고 설치다가 늦잠을 자고 또 하루 종일 헤매는 나의 고질병을 이참에 뿌리뽑겠 다는 것이었다. 오랑캐꽃의 쓴맛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그걸 마시고 나면 입 속이 풍선처럼 점점 팽창 하다가 머리통 전체가 돼버린 것 같곤 했다. 그리고 이번에 아플 때 나는 열 손가락 끝에서 피를 뺀 다음 뽕나무 벌레를 먹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구운 뽕나무벌레를 참기름에 개어서 먹였다는 것이다. 사소한 말다툼을 하다가 밀리게 되자 제남이가 나한테 충격을 주려고 일 부러 폭로한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온 날도 아버지는 분명 뽕나 무 밑동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하고많은 약 중에서 하필이면 뽕나무벌레인가. 나는 과연 지옥을 다녀왔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집안에서의 나의 존재의미와 명예에 관한 것이라면 더 이상은 포기하기로 했다. 한마디로 자포자기를 해버렸다. 우리 집에서는 겨울이 올 때마다 연례행사로 장터거리 한의원에서 염소똥같이 생긴 새까 만 보약을 지어왔다. 오빠와 제남이의 몫이었다. 회봉투 두 자루에 담아 바람벽에 걸어놓고 식후마다 먹는 거였다. 오빠와 제남이는 겨우내 할머니의 입 정성에 못 이겨 그것을 한주먹 씩 집어삼키곤 했다. 그리고 나는 겨우내 끼니때마다 그 광경을 목격하면서 혼자 참을 수 없는 의문에 싸여버리는 거였다. 정작 병들어 신음하는 두찌니는 왜 차고 어두운 뒷방에만 처박아둔 채 쑥 한줌 안 뜯어 먹이면서 멀쩡한 사내아이들에겐 그 비싸고 고역인 보약 먹이 기를 해마다 강행하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집의 냉 혹한 현실이었다. 일부러 가르치지 않았지만 오빠와 제남이의 타고난 특권의식은 바로 그렇 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햇빛에 뒤척이며 흐르는 물소리뿐 사위가 적막한 들길을 타박타박 걷다보니 나는 혼자 세 상 밖으로 가고 있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집과 부모형제를 떠나서 아버지의 종하와 중 고형처럼 어디론가 사라져가는 것이다. 나는 빛이나 허공 속으로 행방불명이 되어가는 중이 었다. 엄마도 종일댁처럼 물항아리를 이고 다니며 비손을 하게 될까? 그 생각을 하자 갑자 기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그 생각을 좀더 자세히 하고 싶었다. 나는 그 생각을 자세히 하기 위해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쪼그리고 앉자 바로 눈앞에서 민들레 하나가 방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너무나 귀여 운 얼굴이었다. 나는 만져주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너무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동그랗게 한 송이를 이룬 담황색의 수많은 꽃이파리가 갑자기 뭉글뭉글 구름처럼 피어나는 것이다. 빛의 덩어리들이 뭉글뭉글 피어나는 것 같기도 했고 뭉게구름이 떠 다니는 하늘까지의 그 공간이 다 들어간 웅덩이 같기도 했다. 어떤 거대한 빛으로 된 세 계 같았다. 나는 놀라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벌써 그 빛 속으로 뭉글뭉글 들 어가버리고 없었다. 소리를 내며 흐르던 사천의 물줄기도, 저 멀리 거멍숲도 뭉글뭉글 사라 지고 새벌에서 쟁기질하던 아버지도 아재도 수걸이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나도 없었다. 나는 놀랍다는 생각도 이상하다는 생각도 없이 그냥 없었다. 그냥 민들레면서 빛인 그 자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다. 저절로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는데 사천 의 물줄기가 소리를 내며 열심히 흐르는 게 보였다. 나는 얼른 하늘을 쳐다보았다. 공포스러 울 만큼 높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하늘이 분명 거기 있었다. 거멍숲도 여전했고 누런 황소 두 마리에 매달린 아버지도 있었다. 나는 얼른 내 몸을 보듬어 보고 이마도 만져보았다. 분 명히 나였다. 눈앞의 민들레 역시 조그맣고 예쁜 그저 평범한 민들레였다. 하지만 민들레 한 송이가 하늘과 땅의 그 모든 것이 되어버리다니. 나는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취했거나 꿈속이었거나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 았다. 너무나 생생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온 세상이 조그만 민들레 한 송이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걸까. 나는 조금씩 흥분되었다. 아버지에게 주전자를 전한 다음 다시 사천둑으로 올라갔다. 민들레는 지천이었다. 나는 마 음에 드는 민들레 하나를 고른 다음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그 민들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까 같은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새 민들 레를 골랐다. 그러나 마찬가지였다. 열 송이는 실험해보았을까. 나는 다시 아까의 그 민들레 를 찾기로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실패였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는 또 새벌까지 술심부름을 가겠다고 자진해서 나섰다. 어제와 똑같이 술을 한모금 마신 다음 그 실험을 해보기 위해서였다. 아직 촉촉한 새벌과 달리 쩍쩍 갈라졌다는 만복들엔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개미처럼 까 맣게 깔려 있었다. 오빠도 삽을 들고 등교했는데 북한의 '천리마운동'처럼 들샘을 파러 다니 는 모양이었다. 옛날 일제시대 때 신사당이 있던 웃뫼에서 별처럼 눈부신 것이 햇빛을 날카 롭게 반사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었을 때 일본인들이 도망가며 파묻은 보물이라고도 하고 신사당 제기들을 때려부순 사금파리들이라고도 했다. 나도 언젠가 다리가 길어지면 저 빛의 정체를 한번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것말고 천지는 어제와 다름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사천둑에 오르자마자 술을 한모금 쭉 빨아마신 다음 어제의 그 민들레를 찾아갔다. 그리고 다정하게 무자앉아 그 꽃을 조용히 바 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는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목구멍만 불처럼 타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목을 축인 다음 재도전을 해보았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갈증만 더해갔다. 나는 계속 목을 축여가며 도전해보았다. 드디어, 내가 어디론가 자꾸만 꺼져가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누군가가 잡아흔들고 소리치는 바람에 나 는 살며시 눈을 떴다. 어슴푸레하게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뒤에 아버지와 수걸이도 서 있 고 수자도 서 있었다. 뜻밖에 낚싯대도 아무것도 들지 않은 노인까지 서 있었다. 나는 놀라 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태양은 어느새 저너머재 뒤로 사라져버렸고 사방엔 거무레한 땅거미 가 밀려오고 있었다. 머리가 빠개질 듯이 아팠다. 내 이름은 당장에 행남이 대신 주남이로 바뀌어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언니들은 모두 예 쁜 이름인데 나만 남자 이름인 것에 나는 늘 불만이었었다. 그것도 모자라 주남이라니, 술보 주만이 아저씨와 같은 돌림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후 내내 식구들이 나 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동사무소 윗소리쟁이까지 동원되도록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곳에서 술취해 잠들어 있었으니. 나는 갈수록 미운털이 보송한 오리새끼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우리 집에는 술보 한 명이 또 탄생하게 되었다. 주걸이였다. 마지기 수는 많지만 모두 새벌 뻘땅뿐인 우리에게도 지난 겨울에 문전옥답이 생겼다. 동 네마당 바로 앞에 펼쳐진 놀미대미의 두 배미짜리 다섯 마지기였다. 그 논은 원래 색소폰 아저씨네 것이었는데 지난 겨울에 우리가 산 것이다. 가뭄 때문에 수확은 별로인데 색소폰 아저씨의 약값이 밀려서 내놓은 것이었다. 생전 처음 뻘땅이 아닌 문전옥답을 가지게 된 아버지는 몹시 흥분했다. 그 논에 첫 쟁기 를 들이댄 아버지가 기쁨이 지나쳤는지 수걸이에게 쟁기를 잡혀준 것이다. 잿등 아재가 소 고삐를 잡아 인도를 해주고 수걸이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쟁기를 몰고 가 는지 끌려가는지 논 가운데를 마구 걸어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수걸이의 자세를 잡아주기 위해 쟁기 손잡이의 한켠을 붙잡은 채 따라다니고 있었다. 말집네와 수자도 동네마당으로 나와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낚시를 가던 노인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었다. 수걸이도 몹 시 흥분한 모양이었다. 흙덩이를 마구 걷어차며 소를 쫓아서 헐떡헐떡 신나게 내달리는 것 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흥분해버린 탓일까. 수걸이는 고작 대여섯 이랑을 갈아놓고 벌컥벌컥 주 전자를 들이켜더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가지고 그만 논두렁에 드러누워 코를 골아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수걸이는 처음으로 우리 집에서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 비록 막걸리 에 취해서 곯아떨어지기는 했지만 수걸이가 쟁기를 금방 익혔던 사실을 아버지는 몇번이나 과장해서 칭찬했다. 무엇보다 소하고 그렇게 빨리 친숙해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는 것이다. "수걸아." 온 식구가 각자 소속된 밥상에 붙어 앉자마자 아버지는 다정하게 수걸이부터 불렀다. 쌀 밥과 보리밥을 한데 섞은 평등한 밥상이었다. 그러나 윗목에서 오빠와 겸상한 수걸이는 묵 묵부답이었다. 불과 상 하나 건너의 거리일 뿐인데도 못 들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까지 괜히 긴장이 되었다. "수걸아." 아버지가 다시 불러도 수걸이는 여전히 대답을 안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찌니를 건너고 오빠 머리통을 비켜서 수걸이 얼굴을 몰래 살펴보았다. 수저는 들었 지만 아직 몹시 낯설고 수줍고 불편해서 어쩔 줄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밥 많이 묵어라아." 아버지도 그 심중을 헤아렸는지 더 이상 대답은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역시 그 대답도 없었다. "아 입은 뒀다 어디 쓸라고 어른이 밥 많이 묵으라는디도 대답을 못해? 야, 한마디면 될 것을!" 답답증을 참지 못한 할머니가 등뒤를 돌아보며 호통을 쳤다. 그때였다. "야아." 막혔던 구멍이 그때야 뚫린 것처럼 수걸이가 뒤늦은 대답을 길게 뺐다. 아버지에게 하는 대답인지 할머니에게 하는 대답인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뒤늦고 긴, 느닷없는 대답 때문에 방안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그리고 까르르 다찌니의 드높은 웃음이 터져버렸다. 큰언니를 꼬드겨서 서울에서 한참 유행한다는 미니스커트를 만들고 입었던 다찌니는 불과 하루 전에 할머니와 아버지한테 벼락을 맞고 근신중이었다. 그럼에도 봄바람을 탄 웃음보는 다찌니 자 신도 못 말리는 것이었다. "과연 주걸이는 주걸이다." 니찌니도 그만 푸푸푸 하며 입속의 밥알을 뿜어냈다. 밥알은 밥상 건너 뒷문 창호를 다다 닥 때렸다. 깔깔깔 나도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제남이와 오빠도 물론이었다. 호롱불을 켜 놓고 드디어 수걸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약간은 조심스런 분위기 였지만 웃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조차도 눈을 질끈 감으며 손을 저었 고 엄마도 입을 오므리며 웃는 것이었다. 그러자 수걸이는 슬며시 고개를 들고 눈알을 사방 으로 돌리다가 으흐흐 하고 괜히 따라 웃었다. 자기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아는만큼 으흐 흐 하고 톤을 높여서 웃었다. 우리는 그것이 더욱 우스워서 배꼽을 그러쥐었다. 국이 다 식 고 아버지가 기어코 화를 낼 때까지 우리는 윗몸방아를 수없이 찧어대며 웃어젖혔다. 나는 엄마가 덜어주는 밥도 먹지 않고 엄마 앞에서는 평생 웃지도 않으려고 결심했었지만 그렇게 간단히 실패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수걸이는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과 자연스레 친 해지게 되었다. 나와 수자의 관계에 대해선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수걸이 덕분에 우리는 새삼 친척 형제라도 된 것 같았다. 더욱이 심해지는 가뭄으로 인한 '한해돕기' 덕분에 우리는 오전수업 만 하게 되어 들에서 사는 시간이 더 많아졌던 것이다. 그날은 수자가 내 귀에 입을 대더니 단둘이서만 큰벌에 가자고 했다. 무슨 약초를 알려주 겠다는 것이다. 그걸 따먹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몸이 새처럼 가벼워진다고 했 다. "육이오 때 청오산에 살던 반란군들은 쌀자루를 지고도 하룻밤에 삼백리를 달려 댕겼는 디, 바로 그 죽대나물을 따묵어서 그렇게 몸이 축지법을 하는 것맨치로 빨랐디야. 바위 끝에 서 바위 끝으로 뛰어댕기믄 다람쥐, 새가 따로 없었디야아." 수자가 하도 가까이 대고 속삭이는 바람에 내 귓속의 솜털이 폭풍을 만난 것처럼 요동쳤 다. 나는 새끼손가락으로 귓속을 후비며 문득 작년 봄에 우리 마을을 다녀간 서커스를 생각 했다. 새처럼 공중을 날아 다니는 그네 타는 소녀의 그 아름답고 유연한 모습 때문에 나는 거의 한달 정도나 가슴을 설쳤던 것이다. 수자는 실제로 그 서커스를 따라갔다가 닷새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사실은 울아부지도 그 죽대나물 뿌리를 캐묵고 청오산에서 우리 집까지 하룻밤에 세 번 씩 날라댕겼디야. 히히히 그래서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됐는디, 그란디 이런 말 누구한테 하믄 큰일나아? 우리 식구 모두, 너까지 잡혀간다아? 잡혀가믄 어치케 되는 중 알지? 코에 다 고춧가루물을 퍼붓고 몽둥이로 패고, 기절하믄 물을 끼얹어서 또 때리고." 수자가 그렇게 겁을 주지 않아도 몽둥이라는 말에 나는 벌써 지질려버렸다. 할머니가 내 던지던 지겟작대기가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아주 독해진 것 같았다. 수자의 그런 이야기에 저절로 복수심이 떠오른 것이 다. 나는 오랑캐꽃 달인 물 때문에 입맛이 당겨서 밥을 아주 많이씩 먹게 되었다. 그래서 밥 그릇이 커진 만큼 미운 오리새끼의 구박과 설움도 날로 커졌갔다. 곡예사 소녀처럼 날수는 없더라도, 밥이라면 말만 들어도 배가 부르다는 듯 굶기를 밥먹듯 해서 언니들을 어리둥절 하게 만들고 엄마를 속상하게 할 수 있다면 정말로 고소할 것 같았다. 더구나 제남이가 까 불 때마다 나는 듯 쫓아가서 목덜미를 거머잡고 때려줄 수 있다면, 나는 원이 없을 것이다. 새처럼 몸을 날려 이단옆차기와 돌려차기로 제남이를 혼내주는 내 모습이 당장이라도 눈에 보일 듯했다. 나는 점심도 먹지 않은 채 할머니가 팽나무 아래 성냥간에서 치어다놓은 새 호미를 들고 나왔다. 점심은 큰벌에 가서 약초를 캐먹으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수자도 그럴 생각인지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벌써 동네마당에 나와 있었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놀미대미 넓은 들엔 그래도 나물을 캐러 나온 사람들이 드문드문 엎드려 있고 풀 뜯기러 소를 끌고 나온 아이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남포로 넘어가는 길 쪽의 큰벌에도 그쪽으로 하교하던 아이들이 무리지어 나는 되새떼처 럼 빛 속으로 무늬지며 뛰어노록 있었다. 집에 가보았다. 어차피 먹을 것도 없고 어른들한테 매나 맞으며 애나 볼 게 뻔하기 때문에 차라리 큰벌에 흔전한 군것질거리를 찾는 모양이었 다. 아니면 애초에 학교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아침부터 놀고 있는 것이든지. 우리는 남포 쪽이 아닌 거멍숲 쪽 구릉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도 록 기다시피 몸을 낮췄다. 우리는 심마니처럼 마음을 집중하며 모래 구릉들을 하나씩 수색 해나갔다. 허기가 져서 다리엔 힘이 빠지고 눈앞엔 노란빛 굴렁쇠가 굴러 다니는 것 같았지 만 그런 건 대수가 아니었다. 드디어 수자가 손바닥을 척 펴 보이며 나를 막았다. 어디선가 갑자기 돌팔매처럼 떨어져 낼니 종달새가 베쪼로로로 베쪼로로로, 비끼리리리 비끼리리리 정신없이 울음울며 머리 위 를 파닥거리는 순간이었다. "느그 집에 제비집 있지? 거그다 가만히 넣어놔봐. 제비가 지 알인 중 알고 품어주면 새 끼가 깰 팅께." 수자가 말하며 우거진 풀숲 사이를 가리켜 보였다. 말느풀로 튼 아주 조그만 둥지에 종달 새 알 네 개가 옹기종기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다시 만난 그 옹기종기 앙증맞은 모습에 나 는 너무나 감격해서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울어매가 그러는디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성누 것이 사람이대. 사람 손을 타믄 곯을지 몰 느께 통째로 들자." 수자가 둥지째 그대로 들어주었다. 나는 가슴이 콩콩콩 뛰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나 존중해 마지않을 만큼 아주 특별한 감각을 지닌 수자는 죽대나물도 곧 찾아 냈다. 고구마순처럼 땅으로 길게 뻗은 줄기를 찾아낸 것이다. 잎사귀는 은행잎처럼 끝이 세 갈래로 갈라졌는데 녹색 바탕에 분을 바른 것처럼 뽀얗게 보였다. 과연 흔히 보던 식물은 아닌 것 같았다. "이것은 본시 섬이나 바닷가에 붙은 산에만 산디야. 나물보담 뿌리가 진짜 약인디 황정이 라고, 부황든 가난은 임금님도 구제를 못해도 이것은 구제를 한께로 붙여진 이름이대. 자, 묵어봐아." 수자는 아카시아잎을 따듯 잎사귀를 똑똑 따서 입에 넣으며 나에게도 어서 먹어보라고 했 다. 그렇게 열망했으면서도 나는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나는 잎사귀 하나를 겨우 따서 앞 니로 깨물어보았다. 쓰고 비렸다. 더구나 미끄럽고 끈적한 느낌이 입안에 가득 고이는데 비 위가 상해서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나는 간단히 실망하고 말았다. 저 저주받은 것처럼 쓰디쓴 오랑캐꽃만으로도 나의 일상은 얼마나 고단하고 슬픈가 말이다. 수자가 씩씩 코를 풀며 뿌리를 파는 동안 나는 딴전을 피 웠다. 그런제 저게 누구인가.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새둥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나는 가만히 일어섰다. 파마머리에 호리호리한 키의 그 여자는 심은희 선생님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선생님이 왜 저 인적이라곤 없는 거멍숲을 다녀오는 것일까. 이상하게 생각된 나는 수자 의 등을 마구 흔들며 선생님을 가리켜 보였다. 수자도 호미를 팽개치며 일어섰다. "거멍다리 쪽이지? 할아부지하고 놀았는갑다." 정말 선생님이 걸어나온 오솔길은 거멍숲의 끝머리, 사천을 건너는 거멍다리 쪽으로 난 것이었다. 나는 이유없이 놀랍기만 했다. "할아부지 누구?" "뒤께 벅구네 할아부지이. 본시 친한께로." "그래애. 종일댁하고도 친하고 할아부지하고도 친해갖고 선생님도 맨날 문조리며 짱뚱이 낚시질 댕긴디야." 동화구연 때문에 가장 좋아하고 또 많은 사랑을 받은 선생님한테 내가 모르는 이런 비밀 이 있었다니, 나는 뭐가 뭔지 머리가 복잡했다. "우리도 할아부지한테 가자. 조수차가 없는 사리 때는 만여바다로 안 가고 거멍다리 밑에 서 문조리만 낚거덩. 재밌는 이야기 해주락하자." 벙어리 노인이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해준다고? 노인은 물론 벙어리가 아니지만 그 무거워 보이는 입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노인이 입을 벌릴 때마다 뭉게뭉게 안개가 피어나는 상상을 하며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을 느꼈다. 더구나 내가 이 세상에서 가 장 좋아하는 심은희 선생님과 우리 아버지가 그토록 애절하게 마음을 쓰는 노인이 서로 친 한 사이라는 사실에 몹시 흥분이 되었다. 의좋은 형제가 달도 없는 그믐밤에 서로 자기의 볏단을 가져 나르듯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몰래 가져다주는 노인과 우리 아버지처럼 선생님 과 노인 사이에도 분명 그 이상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갓난아기처럼 종달새 둥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고 발 빠른 수자 뒤를 허겁지겁 따 라갔다. 거멍다리로 가자면 거멍숲을 돌아가는 신작로가 있는데도 수자는 굳이 심은희 선생 님이 걸어오던 오솔길을 택했다. 빽빽한 소나무가 하늘을 가린, 굴처럼 어두운 오솔길이었 다.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니 정말 6.25 전쟁 때 야전병원이 있었다는 토담자리와 사람들을 한꺼번에 묻으려고 팠다는 커다란 구덩이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둡고 무서운 기운 이 아직도 서리서리 맺혀 있는 것 같아서 나는 순간순간 다리에 쥐가 내릴 것 같은 기분이 었다. 수자는 유유히 여기저기 덩굴을 뻗은 찔레나무에서 새순을 꺾어 껍질을 벗겨 주고 어 느새 한움큼씩 뽑은 삐비도 건네주었다. 그러나 나는 거멍숲이 이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었다. 차츰차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있었다. 6. 자식이 여럿이면 별일이 다 있다. 드디어 가뭄전쟁이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날마다 무명한복 차림으로 기우제를 지내러 다 녔고 수건을 깊이 눌러쓴 엄마도 호미를 들고 어디론가 늘 불려다녔다. 할머니는 새벽마다 우물 앞에 서서 두 손바닥을 닭똥냄새가 나도록 비비면서 이 가뭄이 다 끝나도록 제발 물줄 기를 멈추지 말아달라고 빌었다. 우물신한테 빌다가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우 리 가족은 아무도 죄 지은 것이 없다고 천지신명께 고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정직하 고 근면성실한 가를 말하고 엄마가 조상과 이웃 섬기기에 얼마나 일구월심 정성을 다하는가 를 누누이 설명했다. 그래도 죄가 있다면 그건 모두 당신거라며 잘못했다고 비는 것이다. 평 소 집안의 모든 잘못은 엄마한테 돌려야 직성이 풀리던 할머니의 돌연한 변화였다. 새벽잠 에서 눈을 뜬 식구들은 말없이 그 기도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눈곱 뜯을 사이도 없이 결연 히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제일 먼저 방을 나간 엄마는 세수단장을 말끔히 하고 집을 나갔 다. 수걸이와 오빠는 광주 고모부가 돈을 절반 대어 산 양수기와 발동기를 리어카 두 대에 싣고 아버지를 따라나갔다. 새벌 구렁논에 물을 대어 못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신기한 것은 다찌니였다. 무슨 일이건 이리 빼고 저리 빼고 꾀만 부리던 다찌니가 이번 가뭄엔 거의 전투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남포 옹기장수가 옹기를 빚느라 진흙을 파낸 웅덩 이에 물이 고였을 거란 생각을 해낸 사람도 바로 다찌니였다. 다찌니는 새벽같이 언니들을 몰고 나가서 도랑의 물을 다 퍼내고 진흙웅덩이의 물까지 퍼다가 우두메 고추밭을 적셨다. 자고로 밭농사가 잘되어야만 안살림이 풍족한 법이었다. 벼농사야 가마니 단위로 돈을 팔 게 되니까 전적으로 아버지 소관이지만 콩팥이며 참깨 고추 같은 건 그때그때 푼돈이 아쉬 울 때마다 엄마 임의대로 한두 되씩 팔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언니들은 가끔씩 '무역선'을 타는데 어른들 몰래 곡식을 퍼다가 용돈을 사서 썼다. 쌀은 한두 되 팔아도 몇푼 안되지만 참깨나 고추 같은 건 조금만 팔아도 목돈이 되는 것이다. 만약에 밭농사를 그르친 다면 누구보다 곤란해지는 게 바로 언니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하 늘의 비가 공평하고 흡족하게 내릴 때는 잠들어 있던 다찌니의 경쟁적인 성격이 가뭄이라는 대위기를 만나서 저절로 드러났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할머니와 다찌니의 사이도 엄청나게 좋아졌다. 송아지를 팔게 되면 그 돈은 아버지가 가 지고 쓰지만 돼지새끼는 할머니, 닭과 오리는 엄마 몫이었다. 지난 대보름 전에 낳은 새끼돼 지 아홉 마리 값은 물론 할머니가 쥐고 있었다. 할머니가 그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쓸지는 아 무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고추밭에 싹이 나고 잎이 돋자 할머니가 그 돈을 왕창 풀어놓았 다. 언니들의 옷을 맞춰주겠다는 거였다. 천을 떠다가 만들어 입으라는 게 아니라 양장점에 가서 정식으로 맞추라는 거였다. 남이 먼저 길러 갈까봐 새벽같이 일어나서 머리꽁댕이가 벗겨지도록 물을 긷던 언니들은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다. 아버지도 좋아하　 엄마도 좋아했 다. 엄마도 좋아했다. 엄마는 틈을 내 바다에 가서 굴을 까고 바지락을 파서 할머니가 좋아 하는 국물을 해드렸다. 언니들은 새터거리에 있는 우아미양장점에서 옷을 맞췄다. 색색의 온갖 아름답고 화려한 천들이 줄줄이 걸린 삼면 벽을 오가며 다찌니는 이것저것을 부지런히 몸에 대보았고 큰언니 는 집에서부터 물방울무늬 지지미로 원피스를 맞추겠다고 결정한 대로 몸부터 쟀다. 큰언니 는 원피스는 평범한 디자인으로 하되 같은 천으로 머리띠를 길게 배달라고 했다. 거의 이성 을 잃은 것처럼 헤매던 다찌니는 결국 배추벌레처럼 화려한 연두색 깔깔이로 미니 투피스를 맞췄다. 젖이 한아름 되는 양장점 여자가 행여 까먹을까봐 몇번이나 무릎 의 한뼘을 강조하 면서였다. 그런데 니찌니는 구경만 했다. 옷을 맞추지 않겠다는 거였다. 자기 몫은 그냥 돈 으로 가지겠다는 것이다. 니찌니는 원래 그랬다. 먹을 것도 자기 몫은 먹지 않고 감춰두었다 가 모두가 잊을 만할 때 꺼내서 따로 먹었다. 너무 오래 숨겼다가 상해서 못 먹을 때도 있 었다. 어른들에게 혼날 걸 뻔히 알면서도 참을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열일곱살짜리에겐 가당 치 않은 미니 투피스를 맞추고 마는 다찌니를 표나지 않게 경멸하며 니찌니는 그주 무연한 표정으로 구경만 했다. 언니들은 횡재를 했지만 가뭄은 끝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고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 두가 눈이 노랗게 바랜 채 단내를 헉헉 뿜는 목소리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한해 농사의 시 작인 못자리조차 만들지 못한 사람들은 반미치광이처럼 하늘만 쳐다보며 건숭건숭 걸어다녔 다. 가뭄 때문에 오일장도 흐지부지하고 장날마다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가설극장도 뜸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선 가끔 반공영화가 공짜로 상영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 에도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외출할 곳이 없는 언니들은 밤마다 아랫방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다찌니는 밤마다 머리를 '후까시'로 빗어서 높이고 아직 한번도 햇빛 가운데로 나가본 적 이 없는 연둣빛 미니스커트의 궁둥이를 실룩실룩하면서 거울 앞을 하염없이 맴돌았다. 밤만 되면 언니들은 자유였다. 계란을 꺼내다가 얼굴 마사지도 하고 친구들과 추렴해서 맛있는 것도 사다먹었다. 언니들에겐 많은 것이 이상한 방식으로 허용됐다. 엄마가 잔칫집에 가서 얻어온 떡이나 장날 사온 눈깔사탕, 엿 같은 것은 제남이와 나한테만 나눠주었다. 언니들에 겐 다 큰 애들이 무슨 군것질이냐는 거였다. 그런데도 밤이면 언니들은 친구들과 함께 돈을 거둬다가 떡추렴 빵추렴 사탕추렴 심지어는 두부추렴 옆추렴 등 별의별 것을 다 사먹고 놀 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니들의 친구들이 놀러 오면 행여 방해가 될까봐 슬그머니 마실을 갔다. 언니들은 콜드크림이나 수를 놓는 비단실 같은 필수품 값은 나를 중간에 세워 아버지 와 집요한 실랑이를 벌이며 타내면서도 휠씬 비싼 뾰족구두나 레이스가 달린 슈미즈, 잠옷 같은 사치품은 몰래 구입해서 즐겼다. 그런 것 역시 아버지나 엄마는 다 알면서　나무라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의 등쌀에 논밭으로 자주 내몰린 언니들은 그러나 새벽같이 들판에 나가 무서운 기 세로 일을 하다가도 햇빛만 뜨거워지면 금방 돌아와버렸다. 얼굴이 그을린다는 이유였다. 그 래서 언니들에겐 밀짚모자와 목장갑을 꼭 챙겨주었다. 그러면 언니들은 또 그 모자에 장갑 을 끼고 친구들과 함께 들녘에서 나물을 캐거나 물대면 갯가에 내려가 굴을 땄다. 일부러 따라온 청년들이 휘파람을 불면 욕을 하고 도망가는 시늉을 하면서 뜨거운 태양볕에 볼이 발갛게 상기되어 가지고 하루 종일 놀다가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가뭄에도 부쩍 자라 옷마다 품이 모자라고 길이도 짧아서 '누님네 사는 메뚜기' 꼴이 되었다. 누님네 집에 얹혀사는 메뚜기는 밥은 누나가 퍼주니까 배부르게 먹는데 옷감은 시 어머니가 마르면서 항상 모자라게 베는 바람에 옷에서 몸뚱이가 튀어나온 꼴이 된다는 것이 다. 그런데도 가뭄에 아이옷 해입히면 남들이 욕한다는 이유로 나에겐 옷을 해주지 않았다. 언니들에게 맞춤옷을 해주고서도 다 같은 딸인 나한테만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무 불평도 안했다. 나는 자포자기 상태였다. 술에 취해서 소동이 일어났던 그날 이후, 나는 집에서 완전히 외 톨이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매를 맞고 병이 나서 앓고 난 이후부터였다. 식구들 은 나를 아예 탱자가시나 여름 풀밭에 쐐기처럼 경원했다. 특히 엄마가 더했다. 나와 제남이 가 싸우면 내가 아닌 제남이를 말렸다. 또 병나면 귀찮으니까 아예 성질 못된 것은 상종을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제남이는 정말 자기가 더 어른인 것처럼 조용해졌다. 어른들도 사 람이 되건 말건 그저 아무 간섭 없이 밥이나 먹여주겠다는 태도였다. 사천둑에서 업혀오던 날 아버지는 그 '자식을 여럿 기르다몽께 벨일이 다 있다'는 십팔번조차도 하지 않았다. 나 라면 완전히 기가 막혀서 아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그날 얼마나 큰 소동이 일어났었는지 오히려 마을 친구들을 통해서 알게 될 정도였다. 동사무소의 전달사항을 알리 는 게 직업인 우리 동네 욋소리쟁이가 우대미 본등 아리대미 잿등 뒤께까지 골목골목 달려 다니며 욋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 들으시오오! 본등, 조낙천씨네 막내딸이 한낮에 술주전자르 f들고 나가서 없 어졌다요오! 이녁 집에 있거덩 싸게싸게 돌려보내시고오, 어없더라도 조온 일 하자시고 헛 간이메 나뭇간에 잠들었는지 구석구석 찾아봅시다아!" 사내아이들은 나만 보면 그 욋소리를 흉내내느라 목줄기에 갯지렁이를 만들며 바락바락 악을 썼다. 수자가 쫓아가서 잡으면 무릎으로 한번씩 박아주긴 했지만 일일이 상관하자면 너무나 피곤한 일이었다. 나는 아무 설명도 변명도 없이 풀이 죽은 채 스스로 근신했다. 오랑캐꽃 달인 물도 저항 없이 꿀꺽꿀꺽 마셨고 수자가 따라다니다가도 해 지기 전에 돌아와 마루밑의 고무신들을 지 푸라기 수세미로 깨끗이 닦았으며 할머니의 요강도 군말없이 말끔히 부셔다놓았다. 제남이 의 감나무에 열린 살찐 감꽃이 툭 툭 땅을 때리며 떨어져내려도 별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 다. 예전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꽃을 주워다가 꽃목걸이 팔찌를 만들어 걸고 다니면 뜯어먹었겠지만 동생이랑 실랑이를 해감녀서까지 그까짓 감꽃에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았 다. 그러나 내가 육친들로 인한 사랑의 굶주림 때문에 언제나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다. 아니 더 비밀한 행복으로 인해 나는 속으로 아주 충일한 나날을 얻어가고 있었다. 수자보다 더 크고 따뜻하고 신비한 나의 새로운 발견은 바로 노인이었다. 그날 우리가 거멍숲을 가로질러 찾아갔을 때 노인은 밀물과 썰물이 뒤섞이는 하구둑에서 망둥이 낚시를 하고 있었다. 거멍숲 도깨비가 아마 멀리 가지 말고 하구둑에서 망둥이나 낚 으라고 한 모양이었다. 뜻밖에 물가에 앉은 노인은 아주 쓸쓸해 보였다. 수자가 옛날이야기 를 해달라고 조르자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내를 가로지른 거멍다리 너머 새벌 쪽을 가리켜 보였다. "저 넓은 새벌이 고랫적에는 본시 바다였다는 소리 들어봤지야?"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조상이 새벌을 개간했다는 소리는 귀가 아프도록 들어 왔기 때문이었다. "그라믄 바다가 워치케 육지가 되았는 지도 들었겄네?" "우리 증조할아부지랑 마을 사람들이 개간하셨어라우." "허참 똑똑하다. 하제만 그보다 먼저 저 새벌은 본시 망창한 바닷속 꼬막밭이었구나. 그란 디 꼬막들이 어느날 전부 되새가 되아 하늘로 날아감시로 바닷물을 물고 가부렀단다. 그래 서 바닷물이 마르게되아 느그 조부님이랑 사람들이 개간해서 기름진 옥토로 안 만들었겄냐. 모두들 새벌이 새로 생겨서 맹글어진 이름인 중 알제만 속 내막은 새가 만들어준 들이었다 는구나." 나는 새벌에 관해서라면 괘 알고 있은 편이었다. 꼬불꼬불한 논둑길마다 어느 귀퉁이에 제비쑥 오랑캐꽃 마타리 독말 망초 돌미나리 삐비꽃이 저마다 무성해 있는지, 미나리아재비 가 별처럼 맑은 꽃을 피운 낙수구 돌 밑에 우글우글 새끼를 깐 구렁이에서, 개구리 메뚜기 뜸부기 황새 들오리까지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낱낱이 알고 있었다. 둠벙에 산다는 이무기 의 전설까지도. 나는 새벌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새벌이 새가 준 들이 었다니, 노인의 이야기는 생전 들어보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 할머니야말로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이야기꾼이었다. 우리 할머니는 이 세상의 모르 는 이야기가 없었다. 도깨비자 원한에 사무친 귀신은 물론 호랑이 이무기 백년 묵은 여우 그리고 또 징개맹개 에밋들에서 갱피를 뽑았다는 어느 슬픈 여인과 선비의 사연 그리고 용 궁이며 천당이며 심청이 콩쥐팥쥐 장화홍련 바보온달 녹두장ㄱ누 이순신 김덕영 등 설화 속 인물에서 실제 역사 소그이 인물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람들의 이야기가 제남이가 해달라고 조르기만 하면 저절로 술술 새어나왔다. 기름이 닳을까봐 윗방의 이야기는 언제나 불을 끄고 어둠속에서 진행되었다. 때로는 너무 나 무서워서 몸서리를 치고 때로는 너무나 슬퍼서 소리 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때로는 너 무나 우스워서 어두운 방속을 떼굴떼굴 굴러다니며 우리는 밤이 깊도록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그러다 갑자기 제남이의 숨소리가 일정하게 솟아버리면 할머니는 가차없이 '너도 어서 가서 자거라'하며 나를 쫓았다. 그러면 나는 귀신이 몸을 사리고 지켜 서 있는 것 같은 희붐한 방문을 밀고 웅덩이처럼 어둠이 고인 캄캄한 마루를 건너 안방으로 돌아왔 다. 안방으로 돌아와서도 나는 끔벅끔벅 어둔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시음미하느라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가 해준 이야기들을 거의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벌에 관한 이야기는 금 시초문이었다. 이렇게도 뜻깊고 놀라운 이야기를 여태 몰랐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기만 했다. 수자는 재밌다고 깔깔 웃는데 나는 그 충격 때문에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꼬막이 새 가 되면서 바닷물을 다 달고 날아가버렸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어떻게 노인에게 접근을 하느냐는 거였다. 나는 노인에게서 그날의 충격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날마다 사장나무 그늘 에 서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언제나 발밑만 바라보며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무서운 기세로 낚싯대를 출렁거리며 눈앞을 지나갔다. 어느날 나는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부뚜막에 놓인 술주전자를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우리 집 농주는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우리 집만이 비결 때문이었다. 그 고두 밥과 누룩을 섞어서 항아리에 안친 다음 보리짚 두엄 속에다 묻어서 익히는 것이다. 두엄이 뜨는 열기로 술이 빨리 익고 또 향이 독하고 달콤해서 물 탄 양조장 막걸리와는 비교가 되 지 않았다. 술이 익으면 항아리를 파다가 뒤안 서늘한 장광에 두고 조금씩 퍼다가 걸러서 먹는데 그날도 술을 걸러 들로 내가고 남은 걸 작은 주전자에 채워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조용히 주전자를 들고 집을 나왔다. 나는 심부름이라도 가는 아이처럼 태연한 걸음걸이로 골목을 돌아 마을 뒤께로 찾아갔다. 바다에서 금방 돌아온 노인은 도마를 펼쳐놓고 빨랫방이처럼 생긴 숭어를 손질하고 있었 다. 비늘을 치고 칼을 푹넣어 숭어의 배를 따던 노인이 마당으로 들어선 나를 발견하고 입 을 벌렸다. 나는 차마 인사말 같은 것도 하지 못한 채 노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다가가서 주전자만 슬그머니 내밀었다. "아가 이것이 뭣이냐. 술 아니냐? 아이고 할마님이 나 목 축이라고 이렇게 들려 보내싰구 나. 이렇게 고마울 데가. 아가 다리 아프다 올라 앉거라." 주전자를 받아든 노인이 뜻밖의 술냄새에 몹시도 기뻐하며 나를 어서 마루로 올라가라고 했다. 주름살과 검버섯이 어우러진 염소수염 할아버지며 마을의 여느 할아버지들과 조금돠 다르지 않아 보였다. 나는 마루로 올라서지 않고 도마 옆에 슬그머니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 자 오래 전부터 자주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같이 느껴졌다. "할아부지, 벅구는 또 거멍숲에 따라갔는갑서라이?" 생각지도 못했던 할아버지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나왔다. "오냐, 말 못하는 짐승이제만 효자가 따로 없구나." "할아부지 벅구가 참말로 열다섯살이라우?" "그라제. 그때가 전쟁 끝나던 해였은께. 본등 살 때 헛간채 아궁이 옆에서 태어나 올해로 꼭 열다섯해다." "할아부지 그란디 워째서 본등 그렇게 크고 존 집을 내두고 이런 오막살이에서 살어라 우?" 뜻밖의 말이 튀어나온 바람에 나는 순간 노인이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인은 빙긋이 웃으며 나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워따, 그놈 참 궁금한 것도 많다. 자그만치 야닯이니 너거 할마님은 올망졸망 오진 꼴 봄 시로 사는 듯이 사시겄구나." 그날 나는 노인의 집에서 저녁밥을 먹고 숭어까지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모처럼 술에 취 한 노인은 몹시도 기분이 좋은 눈치고 종일댁은 자꾸만 내 숟가락에 생선살을 발라주며 가 지 말고 함께 살자고 했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노인의 집에서 살게 된다면 소공녀나 알프 스를 찾아온 클라라 같은 무남독녀로 귀한 공주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 나 길고 긴 해가 서녘 저너머재로 기울기 시작하자 나는 서서히 걱정이 되었다. 또 술주전 자와 함께 없어졌다고 욋솔쟁이가 골목을 달려다니며 소리칠 것만 같았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며 돌아와서일까, 식구들은 아무도 나를 나무라지 않았다. 있는지 없 는지 찾아보지도 않은 눈치였다. 나 하나쯤 이제는 정말 어디론가 사라져버려도 상관없다는 듯 한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가져온 숭어는 또 한번 위력을 발휘했다. "어린 것이 워치케 나도 못한 그런 깨득을 다 했을까이? 그 시숙님이 본시 우리 막걸리라 믄 사죽을 못 쓰고 좋아하는 양반이었는디이? 참말로 숭악하단께로." "콩알만한 게 속에 노랑영감이 들어갖고." 다찌니는 끝까지 나를 비웃었지만 어른들은 나와 노인과의 관계를 그런대로 인정하게 되 었다. 드디어 보리베기에서 모내기로 이어질 농번기가 시작되었다. 가뭄 때문에 보리밭은 다 익 기도 전에 노랗게 타버렸다. 온 들판이 불질러놓은 것처럼 온통 불불이 황갈색뿐이었다. 그 래도 농부들은 보리 한톨이라도 놓치지 않고 건져내려고 불타는 태양 밑으로 이마를 숯검댕 이처럼 그을리며 뛰어다녔다. 죽은 겉보리나마 곡기를 섞어야 풀뿌리 음식으로라도 연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빠는 보리베기 돕기에 동원되어 날마다 낫에 새끼줄을 감아들고 등교를 했다. 언니들은 나른하고 무더운 오월의 태양을 저주하며 날마다 보리베기를 했다. 임금님도 용상에서 내려 앉고 부엌 부지깽이 손도 빌리며 걸음마를 뗀 아이도 밥값을 해야 하는 농번기인 것이다. 언니들은 햇빛에 노출된 몸뚱이 때문에 사납고 성가신 보리 까끄라기만큼이나 신경들이 곤 두서 있었다. 엄마도 거치적거리며 언니들한테 혼이나 나느니 차라리 어디론가 사라져버리 라고 충고했다. 밥만 먹으면 나는 기꺼이 사라져주었다. 학교도 가지 않는 농번기는 천국 같 았다. 나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니 당연하게 노인과 친구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한마디로 대화 가 통했다. 이 세상의 어떤 이야기를 물어도 노인은 언제나 준비했다는 듯 적절한 답을 들 려주었다. 시끄럽다고 짜증내거나 쓸데없는 걸 묻는다고 쥐어박거나 공부나 하라고 무작정 몰아버리는 법이 없었다. 내가 껶은 민들레 이야길ㄹ 사실 그대로 믿어준 사람도 노인뿐이 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궁금해진 것은 바로 그 민들레 사건이었다. 나는 누구의 무슨 이야 기에나 귀를 기울였다. 그런 현상은 어디서나 아무때나 일어나며 누구나 경험하는 것인지, 이야기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땅과 하늘, 산과 들과 숲과 사람들이 조금나 민들레꽃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린 그 사건은 시간이 흘러도 너무나 생생했던 것이다. 먼저 오빠에게 말해 보았으나 오빠는 한마디로 웃긴다는 태도였다. '너 아직도 술이 안 깼 냐? 두엄더미에서 익힌 농주가 독하긴 독하구나.' 우리 집의 백작인 오빠는 알량한 위세를 가지고 나를 한껏 경멸했다. 오빠는 자신이 아들로 태어난 그 행운을 항상 의심하는 사람 같았다. 누군가 극진한 대접을 해두면 몹시 안도하며 만족해하고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무 섭게 화를 내며 꼭 '본때'를 보여주려고 했다. 소심한 오빠는 바로 손아래인 나를 통해서 자 주 자신의 위상을 세우려 들었다. 언니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제 아주 헛소리까지 하고 있네?' 다찌니는 아예 내 눈앞에다 손가락을 뱅뱅 돌렸다. 할머니는 밤에 잠 안 자니까 그런 게 보였다고 혀를 차면서 오랑캐꽃을 캐러 나갔고 아버지와 엄마도 침을 삼키며 더욱 걱정 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나도 눈을 뜬 채 꿈을 꾸었거나 헛것을 보았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밖 에 없었다. 노인에게는 처음부터 이야기할 생각이 아니었다. 나는 단지 사람이 죽으면 밤하늘의 별도 사라지는가를 물었을 뿐이었다. 밤하늘에 꼬리를 그으며 별똥이 떨어질 때마다 우리는 '내 다리 석자 석치 가웃!'을 재빨리 외쳤다. 별똥이 사라지기 전에 그 말을 다 마치면 키가 빨 리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별똥이 떨어질 때마다 '들 건너에서 누가 죽 어가나부나' 하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우리는 '내 다리'를 외치다가도 갑자기 무서워 져서 별똥이 사라진 쪽을 가늠해보곤 했다. 그런데 노인이 우리의 믿음도 할머니의 말씀도 다 맞다는 것이었다. 별똥이 다 사라지기 전 그 말을 마치는 순간 장마에 죽순이 쑥 자라듯 우리의 다리도 쑥 자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마다 밤하늘에 빛나는 실제의 별이 하나씩 정해져 있는데 그 별과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나도 들었다. 옛부터 있어온 말이다. 그 렇다더라' 정도가 아니고 말 그대로 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새삼 놀라자 노인이 내 별도 지금 나처럼 똑같이 놀라고 있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아득하고 먼 하늘의 별이 어떻게 지금 나의 마음과 통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믿어지지 않 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안 믿을 수도 없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어서 내 별도 지금 나처 럼 나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내가 이렇게 빤히 존재하는데 믿지 못한다면 맞지 않는 것 이다. 내가 반신반의하며 어쩔 줄을 몰라하자 노인이 방긋이 웃었다. 그 아득한 하늘도 별도 다 내 가슴속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내 가슴속에서 딱, 하는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았 다. 내가 이해한 순간 별도 이해한 것이다. 나는 그 순간 민들레꽃을 떠올렸고, 그 두 가지 를 같은 내용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천지가 빛덩어리로 뭉개지던 민들레 이야기를 들은 노인은 눈을 감으며 손을 저었 다. "아서라 못써. 어릴 때는 동무들이랑 땀이 뻘뻘 나두룩 뛰댕김시로 놀고, 보태기 빼기 공 부도 열심히 하고 그러는 것이제 그런 것 그렇게 들여다보고 그러믄 못써." 노인이 너무나 단호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괜히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되었다. "내가 역부러 그렇게 본 것이 아니고라, 그 앞에 앉은께로 허망해져서 못써. 어쨌든지 동 무등이랑 어깨동무하고 노래도 부르고 뛰댕김시로 재미나게 놀아야제, 앞으로는 당최 혼자 놀지 마라." 노인이 왜 그렇게 말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노인이 내 말을 사 실 그대로 인정해주었다는 것이다. 노인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민들 레 같은 풀 한포기에서부터 하늘의 별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날도 나는 풀숲이 채 자라기도 전에 벌겋게 타버린 황량한 큰벌을 지나고 거멍숲을 돌 아 귀바위 끝까지 타박타박 노인을 찾아갔다. 먼지 나는 흙길을 너무 오래 걸으면 머릿속이 자주 노랗게 비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노인과 놀다보면 더 많은 것이 가득 채워졌다. "알에서 새가 나오드끼 꼬막에서 되새가 나온다고라?" 바위 끝에서 말없이 낚싯대만 노려보는 노인 옆에 쪼그리고 앉자마자 나는 밤새 생각해도 믿기지 않던 말을 또 물어보았다. "아따, 그놈 참 질기다. 그라믄 올챙이 배에서 앞다리 뒷다리가 나와갖고 깨구락지가 되는 것도 못 믿겄네?" "그것이사 깨구락지가 올챙이 알을 낳았은께, 달걀에서 삥이라기 나오고 삥아리가 커서암 탉 되는 것하고 똑같지라이." "허 그럴 때는 제법 똑똑한 것 같은디. 그러믄 보자, 배추잎사구에 뿔뿔 기댕기던 배추벌 레가 훨훨 나는 나비로 되는 건 어찌냐." "누에가 고치를 틀고 또 고치에서 나방이 나온 것은 나도 맨날맨날 봤어라우." "허허허 그걸 보고도 꼬막에서 되새가 나온는 건 정녕 못 믿겄단 말이지야?" 정말 밥 먹고 똥이나 싸고 잠만 자며 뚱뚱 살찌는 그 바보 같은 누에를 보면 그 예쁜 고 치를 짓고 날개를 단 모습으로 변하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배추 한포기가 전우주인 가여운 배추벌레를 보라. 그 징그러운 벌레의 마법에서 풀려난 순 간 날개를 달고 훨훨 하늘을 나는 모습을 상상이나 되는가를. 배추벌레야말로 초록빛 신데 렐라인 것이다. 정말 썰물이 밀려가고 뻘밭이 드러날 때마다 꼬막은 입을 벌리고 하늘을 꿈꾸었는지 모른 다. 물속 세상에서만 살다가 또다른 세상을 보았을 때의 그 놀라움과 기쁨이 만든 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십년 백년, 그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은 날 꼬막은 드디어 뻘밭을 박차고 올라 하늘을 나는 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모든 꿈이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얼마 나 아름다울 것인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랑께 백년 묵은 구렝이가 용이 돼서 하늘로 승천하는 이야기도 참말이지라이?" 되새가 된 그 꿈을 믿겠다는 말이 너무 비약된 것일까. 노인이 껄걸 큰 소리로 웃었다. "허참, 거 성가신 놈이네이?" 노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계속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는 말인지 아니라는 말 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괜히 무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백년 묵은 여우가 사람으 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또 어떻게 되는가. 나는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노인이 갑자기 쓰, 하고 이 사이로 바람을 마시며 벌떡 일어섰 다. 우리가 걸텅낮은 귀바위 아래쪽을 뚫어져라 내려다보면서였다. 눈에서 내가 늘 보았다고 여기는 그 파란 불이 번쩍 일렁이는 것 같았다. 물살에 밀려온 뭔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낚시를 걷어올린 노인이 훌쩍 뛰어서 바위를 건너갔다. 그리고 계속 아래로 내려갔다. 사 람의 시체라도 밀려온 걸까, 나는 더럭 겁이 났지만 귀바위 바로 아래쪽은 잘 보이지가 않 았다. 그러나 바윗등을 이리저리 돌아서 물가에 이른 노인이 건져올린 것은 노오란 해초 줄 기 같은 것이었다. 아니 해초 줄기가 저렇게 노오랄 리는 없고 갓 탈곡을 마친 보릿대나 밀 짚 같기도 했다. 그것은 물살이 닿는 바위틈마다 노오랗게 밀려 있었다. 노인이 손바닥을 털 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가, 저 귀퉁이까지 잠 돌아보고 올 팅께 거기 꼼짝 말고 있거라아. 위험하다." "야." 내가 공손하게 대답하자 노인은 안심이라는 듯 바위산 모퉁이를 향해 바위들을 건너기 시 작했자. 다닥다닥 굴딱지가 붙은 바위는 너무나 사납고 파래와 우뭇가사리가 붙은 바위는 너무 미끄러울 것이었다. 그래도 노인은 곡예를 하듯 빠르게 건너갔다. 나는 버릇처럼 망망 한 바다만 망연히 쳐다보았다. 그날 따라 바람 한점 없이 괴괴한 한낮의 바다는 정말 가도 가도 소금빛뿐인 사막 같았다. 굴렁쇠라도 굴리며 해가 질 때까지 달려도 돌멩이 하나 풀 한포기 만날 수 없는 사막 같았다. 그런데 왜 바닷속의 해초가 그렇게나 노랗게 밀려왔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처럼 눈이 졸려왔다. 바위 밑을 때리고 핥는 파도소리가 자장가처럼 달 콤했던 것이다. "허허이 이런. 앞으로 귀바구에 올 때는 베개를 보듬고 와사제 안되겄네 응? 아가, 검은눈 아! 어 일어나라!" 어느새 돌아온 노인이 잡아흔드는 바람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노인은 바삐 구덕과 장대 를 꾸렸다. 그냥 돌아갈 모양이었다. "기어기, 거멍제로 가보자." 노인이 거멍숲 쪽 백사장을 가리켜 보았다. 거멍숲과 큰벌을 거쳐서 남포를 지나고 노루 목에까지 이어지는 백사장은 물이 가득 담긴 사발처럼 둥그런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 무 말 없이 귀바위를 다 내려온 다음 저만치 앞서서 노인의 장대를 맞들었다. 장대를 맞들 자 출렁출렁 기차라도 타는 것처럼 신이 났다. 실제 기차는 아직 구경도 못해봤지만 춤추는 듯한 기분이 그랬다. 그런데 귀바위를 내려와서 대낮에도 오금이 저리는 공동묘지를 지나자 노인이 나더러 등 에 업히라고 했다. 거멍다리로 돌아서 백사장으로 가려면 너무 머니까 하구 물살을 가로질 러서 갈 모양이었다. 노인의 등은 너무나 넓고 든든했다. 노인은 어떤 것에 사로잡힌 것인지 가슴까지 찬 물살을 되는대로 헤치며 허둥지둥 엎어질 것처럼 내달렸다. 물이 깊은 곳은 헤 엄으로 건넜다. 백사장아ㅔ 올라서 보니 파도에 밀려온 것은 정말 노오란 보릿대였다. 거멍숲 백사장에는 뜻밖에도 사람들이 까맣게 나와 있었다. 노인이 발보다 먼저 무너져버 리는 모래밭을 무성누 기세로 달렸다. 나도 숨을 헐떡이며 따라 달렸다. 백사장에 몰려온 사 람들은 우리 마을 우대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모래밭에 퍼질러 앉아서 땅을 치며 통곡을 하는 사람은 바로 내 친구 선희네 엄마였다. 왜 선희네 엄마가 우는 걸까. 월남에 간 선희네 오빠가 죽기라도 한 것일까. "아이고 뭘 묵고 살라고! 이 땡땡 가문 한여름에 새끼들하고 뭘 묵고 살라고오! 이 벼락 맞아 뒈질 도둑놈들아! 그 보리쌀 처묵다 호랭이나 물어갈 놈들아! 아나 이놈들아, 그 보리 처묵다 목에나 걸려 뒈져라! 아이고 그나저나 워치케 살어. 새끼들하고 이 땡땡 가문 한여 름을 워치케 지고새냐고오!" 선희네 엄마는 반쯤 미친 것 같았다. 헝겊을 받쳐 꿰맨 고무신짝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옷고름이 뜯겼는지 저고지 앞섶도 허벌렁하게 벌어져 있었다. 때 전 무명저고리에 헌 군복 바지를 입은 선희네 아버지도 바다 멀리 수평선 너머 허공을 바라본 채 넋이 빠져 있고 선 희는 자기 올케와 함께 사람들의 맨 뒤쪽에서 쉴새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뒤 통수를 얻어맞는 듯 얼얼한 표정들이고 따라온 아이들은 이상한 긴장감으로 눈을 빛내며 어 른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이들의 말을 종합해보니 탈곡기 차례가 오면 타작을 하려고 베어서 쌓아놓은 보리벼늘 을 통째로 도둑맞았다고 했다. 선희네는 다른 밭논이 없기 때문에 너무 질어서 모두들 겨울 잠을 재우는 새벌 뻘땅에 논보리를 갈았다. 그래서 선희네 가족들은 유난히 얼굴을 할퀴는 뻘땅 갈바람 속에서 겨우내 오금이 얼어붙도록 김을 매고 북을 돋우며 여름에 먹을 식량을 가꿨다. 그런데 도둑이 그 보리벼늘을 통째로 싣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모양이었다. 선희네는 이제 꼼짝없이 굶어죽게 된 것 같았다. 말없이 돌아선 노인이 남포 쪽에 묶어두었던 자신의 조각배를 저어왔다. 선희네 아버지와 마을 이장이 올라타고 선희네 친척인 주만이 아저씨도 올라탔다. 노인은 서서히 배를 저어 바다 쪽으로 나아갔다. 촘촘한 바늘 같은 태양빛이 무수히 쏟아지는 바다 한가운데로 조각 배는 가물가물 하염없이 떠가고 있었다. 우리는 모래밭에 퍼질러 앉아 눈을 비비면서 시야 에서 배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대섬으로 갈랑 개비다이?" "아니여, 대섬에는 사람이 산디 도둑놈들이 워치케 갔겄냐. 시루섬 무인도로 갔겄제. 그랑 께 지금 저 사람들도 시루섬으로 가는 것이여." "아니랑께. 시루섬은 펼쳐놓고 탈곡할라믄 꼭대기까지 올라가야한께로 만여여 만여." "그래 맞어. 썰물 때믄 물위로 나오는 만여가 꼭 우리 학교 운동장만하다드라. 처녀 총각 이 거그서 정신없이 삐비 까고 뽕 따다가 밀물에 밀려서 죽기도 했디야아." "육이오 때도 빨갱이놈들을 잡어다가 만여에 퍼놔분께 밀물에 쓸려다 다 죽었디야아/" 그때였다. 어떤 어른이 갑자기 손을 저으며 떼엑!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런 썩을놈의 새끼들! 뭔 구경 났다고 갯가까지 쫓아와서 헛소리 지랄을 까고 자빠졌다 냐 엉? 아 못 가냐! 다들 못 가!" 어른들은 원래 아이들만 보면 무조건 욕을 했다. 눈을 부릅뜨고 욕을 무섭게 해야만 어른 답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던 아이들은 경기를 일으킨 것처럼 놀라서 도망을 쳤다가 다시 살금살금 모여들었다. 그러나 너무 작은 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처럼 작아지더니 그나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어느새 수평선 너머 로 넘어가버린 것 같았다. 사람들이 털레　ㄹ레 발길을 차며 하나둘 모래밭을 떠나기 시작했다. 선희를 위로할 방법 을 몰라서 괜히 옆에 서서 입만 비죽이고 있다가 나도 그만 돌아와버렸다. 언니들이 보리쌀 을 안쳐놓은 가마솥에 불을 땔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불을 때는 건 뒷방것 또딸이의 몫이었 지만 또딸이가 삶은 보리쌀을 다 먹어버리지 못하도록 감시를 하는 게 바로 내 몫이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밤이었다. "낙천아! 낙천이 자냐? 나다, 나 잠 보자." 삼대 독자인 아버지는 하늘이 준, 하늘에서 떨어진 귀한 아들이라고 해서 이름이 떨어질 락자에 하늘 천자를 쓰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에서는 소낙비나 폭포수가 연상되곤 했다. 누군가 그렇게 소낙비처럼 다급하게 아버지를 부르고 있었다. 설핏 잠이 든 채로 귀가 열린 내 얼굴 위로 갑자기 찬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버지가 대답할 새도 없이 구르듯 방문을 열어젖히더니 맨발로 뛰어나가 그 사람의 등을 떠밀고 들어왔다. 뜻밖에도 노인이었 다. 어둠속에서 노인의 두 눈이 퍼렇게 일렁이고 있었다. 엄마가 불을 켜려고 하자 노인이 말렸다. "대섬에 갔더니 만여에서 밤새 탈곡소리가 나드란다." "......" "보릿대가 거멍게랑 귀바구 쪽으로만 밀렸제 꽃섬하고 어리도 쪽으로는 깨끗하더라." 노인이 꿀꺽 침을 삼키자 아버지도 마른침을 삼키려다 캑캑 기침을 했다. "모레가 음력으로 스무이튿날, 유월 스무이튿날 조금때였던 바로 그날이랑 물때가 같은 날이다. 오후 세시에 물이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는디, 니 보릿대를 써서 다시 확인을 해봐 야 쓰겄다." "......." 아버지가 우물쭈물 대답을 빨리 못하자 노인이 벌떡 일어서며 돌아보았다. "보리를 집마당으로 가져오지 말고 밭에서 그냥 탈곡하믄 보릿대는 내가 밤을 타서 가져 가마. 너는 내다볼 것도 없고 그냥 모른 디끼 있거라." "혼자서는 안되라우. 수걸이랑 리아까로 몇번 달려 댕기믄 간단할 것인디라." 아버지가 역시 우물거리며 입안엣소리로 말하자 노인이 용케 알아먹고 단호히 말했다. "허가받고 허는 일이 아닌께 그라제. 만약에 시끄런 일이 생겨도 너는 당최 몰랐던 일이 다, 알겄지야? 그라고 질부, 야밤에 미안하게 됐네. 이해하게이?" 노인은 끝으로 엄마한테 인사말을 하고는 그대로 방을 나갔다. "보릿대를 다 줘불믄 가슬에 보리 갈 때 거름은 으짤라고라." 엄마가 물어도 아버지는 듣지 못한 듯 대답이 없었다. 잠이 달아나버렸는지 창호 쪽으로 붙어앉자 재떨이의 꽁초를 탁탁 털어 붙여물었다. 아버지는 딴 세상 사람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졌다가 담뱃불이 빨갛게 타오를 때면 얼굴 윤곽만 다시 나타나곤 했다. 만여는 수평선 가까이 바닷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암초였다. 진도나 완도를 오가는 큰 배 들도 만여의 물살에 말려들지 않으려고 수평선밖까지 돌아서 다닐 정도였다. 썰물에 바닷물 이 빠지면 만여의 윗부분이 드러나는데 평평한 게 우리 집 마당만큼이나 넓다고 했다. 그런 데 선희네 보리벼늘을 훔쳐간 도둑들이 바로 그 만여마당에서 탈곡을 해서는 알곡만 가져가 는 바람에 보릿대는 전부 육지 속으로 움푹 들어온 거멍게 백사장으로 밀린 모양이었다. 만여를 배를 대고 탈고긍ㄹ 할 정도라면 도둑은 바다에 대해서 귀신인, 노인만큼이나 노 련한 사람일 것이다. 면소 지서의 순경들은 바닷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배를 부리는 사람들 을 조사한다고 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길 가다가 얼굴만 마주치면 만여와 도둑놈 이야기 를 했다. 사람들은 들판의 곡식들을 정신없이 그러들이고 어쩔 수 없이 밖에 쌓아둔 건 밤 을 새워 지켰다. 그렇지 않아도 가뭄에 흉흉한 인심이 더욱 그악스러워졌다. 거기에 뭔가 d 라 수 없는 흉흉한 공기까지, 마을은 점점 뒤숭숭해져갔다. 그런데 만여의 보릿대가 꽃섬과 어리도엔 얼씬도 않고 거멍게와 귀바위로만 밀렸다는 사 실이 노인과 도대체 무슨 상고나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할머니의 언니, 그러니까 이모할머니 가 사는 대섬과 무인도인 시루섬은 민여보다 안쪽에 있었지만 꽃섬과 어리도는 그 바깥에 있었다. 그런데 노인이 음력으로 오월 스무이튿날, 바로 그날 조수의 흐름을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 가을농사 퇴비로 썩혀두어야 하는 우리 보릿대를 다 가져가겠다는 것이다. 탈곡을 마친 그날 밤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노인과 함께 보릿대를 바다로 날랐는지 아니 면 누구네 사랑방에 가서 술추렴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해마다 논과 밭 삼천여 평에 심 은 보리는 전부 집 바깥마당으로 그러들여 탈곡을 했다. 그래서 비가 한번 올 때까지 우리 는 언제나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가볍고 싱그럽고 푹신푹신한 보릿대 위에서 구르고 넘고 장 난치며 뛰어놀았다. 우리가 뛰어서 다져지면 오빠는 속으로 굴을 파기도 했고 나는 보릿대 로 바구니를 엮어 감꽃 담는 그릇으로 쓰기도 했다. 만여로 옮겨졌을 적잖은 그 보릿대는 다음날 전부 백사장으로 밀려와 있었다. 노오랗게 띠를 두른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에서 아버지는 수걸이와 함께 그 보릿대를 다시 걷어올렸 다. 모래밭 구릉 위에 쌓아두었다가 썩으면 가을농사 퇴비로 쓸 것이다. 구슬땀을 쏟으며 아 버지는 말없이 땅거미가 내릴 때까지 보릿대를 긁어모았고 밀물이 들어오자 바다로 나갔던 노인도 배를 저어 돌아왔다. "꽃섬이랑 어리도는 역시 깨끗하더라. 보릿대 저것이 가벼서 아무데로나 흘러갈 것 같제 만 만여에서 물살을 잡아 돌리는 바람에 세게 돌아쳐서 이 안짝으로만 밀리는 것 같다. 옛 날부터 보믄 꽃섬이나 어리도에서 일어난 일까지도 꼭 이 거멍게로 밀리더라. 틀림없다." 노인은 뭔가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그때였다. 등 뒤 모래구릉에서 털퍽 하는 소리가 들렸 다. 종일댁이었다. 어느새 거멍숲을 내려왔는지 희끄무레한 땅거미 속에서 종일댁이 털퍽 모 래밭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리고 뜻밖에도 심은희 선생님이 종일댁의 옆구리에 손을 넣은 채 함께 주저앉아 있었다. "내 새끼들! 내 새끼들이 살어 있구나, 살어 있어! 그라믄 그랬제 걸음마 뜀시로부터 물속 에 끼었는디 그럼!" 아버지가 놀라서 종일댁 쪽으로 올라가자 노인도 배를 묶은 밧줄을 들고 모래밭을 올라가 가장 가까운 소나무에 감았다.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겄제만 낙천아 다시 한번 묻자꾸나. 그랑께 그날 모다 똑같이 밧줄 은 분명 풀어줬다 그 말이지야?" "야. 밧줄로 두 손을 이렇게 묶어서 허리로 돌렸는디 발동선에서 만여로 뛰내릴 때 한 사 람씩 일일이 풀어줍디다." "묶어두나 풀어두나 밀물이 들믄 어차피 죽을 목숨들인께 그랬겄제. 그란디 어째서 다같 이 죽은 목숨들이라믄 금석이랑 우리 아이들 시신만 안 밀려왔으까?" "금석이야 날치겉이 물 위로 나는 사람인께 모르긴 모르겄소. 하제만 분재소 뒷마당에서 꿇은 채로 죙일 굶어놔서. 저야 운좋게 이모가 사는 대섬으로 밀렸제만, 그란디 성들은." "그래. 그때 죽었다믄 둘 다 안 밀려왔을 리가 없었겄제." 아버지가 죄인처럼 발밑을 파며 말을 더듬자 다른 말이 나올까봐 겁을 먹은 듯 종일댁이 얼른 말을 가로챘다. 아버지가 갑자기 으시시 턱을 떨며 시선을 비키자 노인이 훠이 손을 저었다. "알었다. 수걸이랑 우리 검은눈 배고프겄다. 어 가거가 어서 가. 알었은께 다시는 돌아보 지도 말고 어 가." "행남이 추워 보이네. 선생님이 이 옷 줄 테니 입고 갔다가 내일 학교로 가져와라 응?" 심은희 선생님이 베이지색 봄재킷을 벗어 내 등에 걸쳐주며 등을 따뜻하게 쓸었다. 정말 해가 지면서 습기를 머금은 밤바다의 공기가 차가워져 있었다. 옷 바깥으로 쑥 나와버린 팔 목이며 종아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고 있었다. 아버지가 그러면 안된다면서 옷을 선생님께 다시 돌려주었다. 아버지와 심은희 선생님은 서로 별 말이 없었지만 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 가 분명했다. 두 사람이 분명 심상찮은 눈인사를 끄덕 나누었던 것이다. 키 큰 아버지가 쇠스랑을 둘러메고 성큼성큼 모래밭을 올라가자 나와 수걸이는 강아지처 럼 숨을 쌕쌕거리며 따라 달렸다. 말없이 걷는 아버지는 화가 난 사람 같았다. 아버지는 언 젠가 밧줄에 손이 묶인 채 만여에 끌려갔던 사실에 새삼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정신을 잃고 대섬에 밀려서 삼년이나 숨어살던 그때의 기억 때문에 새삼 가슴이 아픈 건지 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가 왜 만여에 버려졌었는지, 도망을 쳐 목숨을 건지고도 삼년이나 숨어살아야 했는지는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우리 아버지가 나쁜 짓을 하다가 그렇게 됐다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인과 함 께 나누는 사연이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종일댁과 가장 존경하는 심은희 선 생님과 함께 나누는 사연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쁜 상상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아버지 야말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보다 더한 비밀의 사나이 같았다. 거멍숲을 지나갈 때는 아버지가 걸어가는 소나무 같았다. 나는 뭔가 아버지에게 말을 붙 이고 싶었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를 노인처럼 가까이 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아버지는 우리랑 함께 길을 간다는 사실조차 까먹어버린 것 같았다. 큰벌 을 지나갈 땐 걸음걷는 그 기세로 아버지가 어둠속에 사라져버릴 것 같은 이상한 공포가 몰 려왔다. 나는 아버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달렸다. 큰벌을 벗어나 놀미대미에 이 르자 사장나무 그늘에 서 있던 엄마가 조심스레 내 이름을 불렀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불빛 이라도 만난 것처럼 반가운 목소리였다. 나는 그때서야 하늘을 한번 쳐다보았다. 언제 하늘 을 가로질러 갔는지 벼린 듯 날카로운 하현달이 입술 곁의 점처럼 별 하나를 데리고 저너머 재 쪽의 서녘으로 기울고 있었다. 7. 새를 기다리며 들판이 타고 산이 타고 사람들의 가슴이 타고 있었다. 모내기를 하지 못한 들판은 나문재 가 다닥다닥 돋아난 갯벌처럼 벌겋게 불탔다. 벌써 넉 달째 비 한방울 내리지 않는 것이다. 습기라곤 없는 건조한 바람이 지나가면 들판에서 먼지가 풀풀 일어나곤 했다. 하루네 세 번 씩 들어오는 버스가 신작로를 달리면 회오리치며 일어난 먼지가 용오름처럼 높이 솟을 정도 였다. 버스만 보면 죽을 힘을 다해서 꽁무니를 쫓아가던 아이들도 몇 발자국을 못 가고 먼 지 뒷발을 한 채 돌아섰다. 사람들은 금쪽 같은 땅을 차마 놀려둘 수가 없어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땅을 갈아엎고 메 밀씨를 뿌렸다. 메밀은 일단 파종만 해놓으면 마른땅에서도 싹을 틔우고 자라기 때문이었다. 만복천이 조그만 웅덩이처럼 졸아버리자 사천의 물줄기도 실오라기처럼 가늘어져버렸다. 그래서 아이들은 여름방학이 되자 날마다 바다로 내달았다. 집에 있어봤자 먹을 것도 없고 어른들은 모두 굶어죽게 될까봐 벼린 듯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딥 밖이 훨씬 안전한 것 이다. 마을은 갈수록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기운으로 뒤숭숭해져갔지만 아이들은 태평인 척 신나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새벽 일찍부터 우두뫼 콩밭을 매다가 돌아와 낮잠을 즐기던 언니들은 해가 기울면 다시 양동이를 이고 사천의 물을 길어 날랐다. 텃밭에 심어놓은 오이 가지 토마토 상치 쑥갓 고 추 호박 토란을 물을 주기 위해서였다. 쥐똥나무 울타리에 둘러쳐진 우리텃밭은 그야말로 꿀밭이었다. 일년 내내 온갖 것을 길러내며 우리 집 열두 식구의 맛있는 반찬거리를 끊임없 이 대주는 것이다. 반찬은 큰언니 담당이었다. 큰언니는 김치를 담글 때마다 밀짚모자를 쓰고 장독대로 갔다. 항아리에 눌러놓은 돌을 들추면 하얀 구더기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빛 때문에 숭글숭글 몸을 마구 뒤척이는데 그것을 숟가락으로 일일이 빛이 튀는 땅바닥으로 떠냈다. 그러고나서 윗부 분을 살짝 젖히면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솟구치면서 빨갛게 삭은 생선의 몸통들이 드러났다. 그 곰삭은 향내의 젓갈과 흰밥과 풋고추를 절구에 박박 갈 아 콩밭의 열무로 항아리 가득 풋김치를 담았다. 여름 열기로 맛이 밴 김치를 먹을 때마다 아버지는 맛이 일품이라며 만족해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음식맛이란 다 그 집 장맛과 젓갈 맛에 달린 거라며 팔딱팔딱 뛰는 싱싱한 멸치러 담근 젓갈 자랑을 하고 또 했다. 언제나 듣 는 똑같은 소리였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에 밥을 먹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엄마는 그때마다 후렴으로 젓갈이나 장은 뜨고 난 후에 젖혀낸 윗부분을 고 루 덮어서 꾹꾹 누른 다음 돌덩이로 다시 꽉 눌러놓아야만 맛이 변하지 않는다며 단속을 하 고 또 했다. 니찌니나 다찌니가 떠온 된장은 말랑말랑 노랗고 향기로운게 특히 더 맛있었다. 샘 파는 것처럼 저 깊은 곳에서 파내오기 때문이었다. 흉년인데도 우리 집에서는 삶은 보리쌀에 한줌이나마 쌀을 섞어서 밥을 해먹기 때문에 할 머니의 유세가 굉장했다. 웬만한 집들은 배급받은 밀가루로 팥죽을 쑤거나 보릿가루로 개떡 을 빚어 끼니를 때우기 일쑤이기 때문이었다. 언니들도 끼니마다 새 반찬을 만드는 것에 자 부심이 대단했다. 언니들은 요리에 관심이 많았다. 농한기마다 열리는 요리강습에서 배운 솜 씨를 어떻게 해서든 써먹으려 들었다. 시집가서 남편 밥상 차리는 법을 연습하려는 것이었 다. 우리 담임인 지호기 선생님의 사촌 동생과 선을 본 다음부터 큰언니는 더욱 극성이었다. 밥 위에 쪄서 무쳐도 되는 가지나물을 굳이 기름에 볶는가 하면 난데없이 계란찜을 해서 화 려한 밥상을 꾸미려고 애를 썼다. 흔하디흔한 갈치토막을 구우면서도 실고추를 썰어 얹고 통깨를 뿌리는가 하면 꼬막이나 나박 같은 조개는 껍질째 양념장식을 하고 일일이 한 장씩 양념을 묻혀야 하는 깻잎이며 오이소박이같은 손이 많이 가는 반찬을 부지런히 만들어댔다. 가르쳐놓으니까 역시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맛있는 반찬을 만든다며 아버지는 큰언니를 몹 시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할머니는 원래 밥상이 조금만 부실해도 숟가락이 무거운 것처럼 움직이며 엄마를 고문했 다. 밥을 먹다가 갑자기 혀를 쩟 차기도 하고 숟가락을 소리나게 놓아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혼비백산해가지고 엄마한테 눈을 흘기며 빨리 계란이나 참기름을 가져오라 고 해서 밥을 직접 비벼드리거나 물에 말아드리며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우리들 중에 누 가 그랬다면 아버지는 여지없이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쳐올리며 겁을 주고 반찬투정을 하는 자식은 누구건간에 굶겨버리라고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할머니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엄마가 우두뫼 밭이며 갯가까지 종종걸음치 며 반찬거리를 구해오고 큰언니가 맛있는 반찬을 만들면 이러다 살림 망하겠다고 오히려 호 통을 치는 것이었다. 반찬을 너무 맛있게 만들면 양념이 많이 들어갈 뿐 아니라 식구들이 밥을 많이 먹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큰언니의 음식솜씨를 자랑하지 못해서 안달을 했다.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망을 보다가 마땅한 사람이 지나가면 막걸리 한사발 마 시고 가라고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드디어 안주로 나온 꼬막요리가 너무 예뻐서 먹 기 아깝다고 말하면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신이 나서 큰 손녀가 한번 먹어본 것은 다 만 들 줄 알고 제 애비 공양을 이렇게 온갖 정성으로 끔찍이 하는데 남 주기 아까워서 어떡하 느냐고 하소연하는 흉내를 냈다. 할머니의 그런 온갖 수작 덕분에 지호기 선생님의 사촌동생은 큰언니를 한번만 보고도 완 전히 반해버린 것 같았다. 지호기 선생님한테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은행에 다니는 사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할머니는 오이며 고추며 호박이며 첫물만 따면 덜어서 들고 선생님댁 을 방문했던 것이다. 말은 '우리 행남이 공부 갈치주시느라 고생 하신께로' 였지만 사실은 큰언니를 선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할머니한테 세뇌당한 지호기 선생님한테 다시 세뇌를 당한 은행원은 '조명희씨께' 하고 쓰던 편지를 차츰 '보고 싶은 조명희씨에게' '그리운 명희씩'로 강도를 바꿔갔다. 그리고 난데없이 쇼펜하우어의 '인생론'과 '사상계'라는 책을 사서 보냈다. 언니들은 우리 교과서를 세권쯤 합해놓은 정도 두께의 '여원'이라는 국내 유일의 여성잡지도 우편을 통해 정기구독하고 있었고, 이광수의 '흙' '사랑', 심훈의 '상록수' 같은 우리나라 소설책뿐 아니라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며 '실락원' '죄와 벌' '전쟁 과 평화' 같은 세계명작도 가지고 있어서 금하리의 가장 콧대 높은 지식인층에 속했다. 그러 나 큰언니는 새삼 흥분해버린 것 같았다. 틈만 나면 고뇌하는 철학자처럼 '인생론'을 펼쳐들 고 한숨을 몰아쉬는가 하면 '사상계'를 펼쳐들고 이맛살을 모으곤 했다. 큰언니는 틈만 나면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긴 머리띠를 늘어뜨리고 질 좋은 편지지와 비단실을 사러 읍내까지 차 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그 은행원과 선을 보았던 다방에도 가보고 미장원에 들러서 머리도 다듬고 돈 주고 들어가는 목욕탕에서 때깔도 내고, 도시 사람 같은 세련미를 익히려는 속셈 이었다. 큰언니는 갑자기 미인이 되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희고 맑던 얼굴빛이 복사꽃빛으 로 활짝 핀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조낙천씨 딸이 저렇게 예쁜 줄 몰랐다고 혀를 두를 정도였다.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봉봉' 사중창단의 노래 그대로였다. 금하리 처녀들 중에 서 가장 멋있는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될 큰언니는 벌써부터 신분상승이라도 된 사람 같았 다. 아버지는 하곡수매가가 나오자마자 큰언니 용돈부터 주었고 할머니는 밭일이나 물일 같 은 걸 금지했으며 큰언니의 친구들은 밤마다 아랫방으로 몰려들었다. 큰언니는 그 은행원이 고향에 다니러 오는 추석에 약혼사진을 찍고 가을걷이가 끝나는 겨울에 결혼을 할 예정이었 다. 날이면 날마다 수건을 깊이 눌러쓰고 새벽같이 집을 나가던 엄마는 어느날부턴가 사천둑 에 말뚝을 박고 흰 광목을 바래기 시작했다. 그동안 엄마는 새벽같이 집을 나서서 행방이 묘연했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벼린 호미만 들고 빈손으로 돌아오곤 했다. 새벌이나 우두뫼 아니면 놀미대미 우리 논밭에 가서 일을 하는 것도 누구네 품앗이 가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들놀이나 외갓집 나들이나 오일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닌, 이상한 외출을 하고 돌아왔다. 베 적삼은 땀에 절어 후줄그레 늘어지고 얼마나 먼길을 걸었는지 고무신엔 까만 땟국물이 층을 이루며 배어 있었다. 적어도 우리 집을 대표하는 어떤 사명을 가지고 다녀온 듯 녹초가 되 어 돌아오면 아버지도 할머니도 묵인하는 죽음처럼 깊은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거였다. 그런 엄마가 광목을 바랜다고 모처럼 집에 붙어 있게 되자 나는 그 곁 을 한시도 떠나지 않고 맴돌며 수수께끼뿐인 어른들의 세계에 골머리를 앓았다. 우리 집 마루 구석에는 커다란 나무궤짝이 놓여 있는데 아래칸에는 쓰지 않는 놋그릇과 나무로 깎은 제기, 그리고 모내기나 잔치 때 쓸 사기접시 같은 것들이 빼곡이 들어 있고 위 칸에는 홍두깨로 감아 올린 광목필이 차곡차곡 가득 들어 있었다. 엄마가 직접 심어 거둔 목화솜으로 손수 짠 것이었다. 딸을 많이 낳이 낳은 죄로 해마다 뙤약볕 아래서 목화를 가 꾸고 밤마다 이슥토록 물레를 잣았으며 농한기가 되면 낮이나 밤이나 베틀에 앉아 손수 짠 것이었다. 장날만 되면 옥양목이며 포플린이며 기계로 짜서 훨씬 결도 곱고 값도 싼 천들이 무진장으로 쏟아져나왔지만 딸들 혼숫감은 네가 책임을 지라는 할머니의 명령 때문이었다. 졸음이 올 때마다 씨줄 날줄 사이를 꿰는 북 끝으로 허벅지를 찍어가며 온 다리가 퍼렇게 멍이 들도록 짰다는 것이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꼭 그 해까지 베틀도 부서져 버렸다. 그래서 엄마는 그 원수 같은 베틀 노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큰언니에서부터 다찌니가 시집갈 때 솜을 싸고 이불 홑청을 할 베까지 다 짰을 뿐 아니라 누에고치에서 뽀은 비단실로 오빠가 커서 장가갈 때 입을 두루마깃감과 바지 젓고릿감까지 다 짜놓은 후였다. 엄마는 한올 한올 졸음과의 눈물겨운 싸움과 피땀 밴 광목으로 사천둑을 하얗게 덮어놓고 시름에 잠기곤 했다. 자신이 풋각시로 시집오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팔남매의 개 혼 이라는 것이다. 누가 지나가면서 '현리댁 사위 보게 됐담서? 좋겄네!' 할라치면 엄마는 '좋기는' 하면서 아주 복잡한 웃음만 지었다. 아버지는 농림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시집온 엄마는 덜컥 임신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실을 모른 채 다시 공부하러 떠나버렸다고 했 다. 그러다 여름방학이 되어 돌아오게 되자 할머니와 엄마가 함께 장터거리 차부로 마중을 나갔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의 배를 보고 놀란 아버지가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그만 모른 척 하며 슬슬 도망쳐버렸다는 것이다. 잿등 아짐과 나란히 앉아 소나무 뿌리의 잔털로 만든 솔 로 광목에 풀을 먹이면서 엄마는 그때의 무참했던 기억을 되씹었다. "며칠간 집에도 안 들어오고 밖으로만 돌드만 어느날 뜽금없이 우두뫼 콩밭 매고 있는 디 로 왔드랑께라. 흙먼지 뒤발에 비지땀 범벅이 돼서 꼴이 더 말이 아닌디 떡 찾어와서는 쪼 그리고 일할라믄 안답답냐고 딱 한마디 물습디다. 그러고는 훌쩍 옆집 정금이네 밭에 건너 가서 참외 두 개를 따다주고 가드랑께요, 참 나." "키만 컸제 솜털 부숭숭한 학상 신분에 애아부지 될랑께 겁은 나겄다 그래도 각시는 보고 싶겄다 그랬등갑제? 그러고부터는 내 각시야 함시로 잘해주던가?" "아이고 말도 마시오. 지금 생각해도 새삼 부애가 나는디 그때만해도 철이 없어서 그랬는 지 그 참외만 묵어불고는 어무니한테 두고두고 시집만 원없이 살었제라. 지 서방이 따준 참 외믄 늙은 시어매도 나 몰라라 게눈 감추듯 해뿌는 거냐고." "그래. 무던한 현리댁이나 된께 그 어린 나이에 그 까탈스런 홀시어매 받지하고 살어나왔 제. 시어매 눈입매가 아무리 살얼음 같어도 신랑 얼굴만 한번 쳐다보믄 눈 녹듯이 사르르 녹아분께 살었겄제만. 암만 뭐락 해싸도 현리댁겉이 서방복 많은 사람도 없어. 맹희 아부지 가 그 흔한 욕 한마디 헐 줄을 알어 손 한번을 올려? 이 세상에 지 계집 무시 안하고 우대 해주는 남정네가 몇 명이나 되게?" "아이고 모르는 소리 마세라. 날이면 날마다 어무니는 아들 낳아 줄 여자 찾는다고 겁 주 제, 즈아부지는 집구석이 워치케 돌아가건말건 날이면 날마다 동무들하고 밖으로만 나돎시 로 함흥차사제. 우리 용남이 뱄던 그해 끌려갔을 때, 그 때 행방불명 되았다가 삼년 만에 돌 아와갖고는 그만 어른도 되고 새사람도 되아서 날 사람 취급도 하고 그러드랑께라." "함흥차가였는디 그렇게 애들을 줄줄이 연년생으로 퐁퐁 낳아? 맹희아배가 각시를 너무 밝힌께로 딸만 낳는다는 말도 있었는디? 깔깔깔." 잿등 아짐이 깔깔깔 뒤로 넘어질 것처럼 허리를 젖히며 웃어대자 엄마가 슬며시 등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제남이가 먹는 환약처럼 똥글똥글한 염소똥 줍는 시늉을 하며 아무것도 못 들은 척했다. 소가 뜯어먹고 염소가 아무리 갉아먹어도 언제나 융단처럼 푹신하게 자라 있던 떼잔디는 노랗게 말라 뿌리 쪽에만 겨우 푸른 기운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을 옮길 때 마다. 차마 발은 구르지 못하고 손을 거칠게 내저으며 멀리 가서 놀라고 성화였다. 그러나 나는 언제 어디서나 어른들이 낮은 목소리로 하는 대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엄마와 잿등 아짐은 우리 집안의 무슨 일이건 터놓고 같이 의논하는 사이였다. "어째 저것이 갈수록 어긋어긋, 아야 행남아 빨리 못 가냐? 엉?" 엄마가 쫓아올 기세로 발 구르는 시늉을 했다. 광목 위로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의 반사광 때문에 엄마늬 얼굴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이상한 그림자 같았다. 나는 민들 레꽃이 세상을 온통 삼켰다가 사흘 만에 뱉었다거나 아버지가 누군가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 명이 되었다가 삼년 만에 돌아왔다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도대체 사람 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기에 누구에게 끌려간 것이며 천신만고로 대섬에 밀린 아버지는 또 왜 삼년 동안이나 숨어살았던 것인지 그렇게 엄청난 사연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계는 정말로 수수께끼만 같았다. 왜 하필이면 발동선에 싣고 가서 바다 한가운데 만여에 버린 것인지, 만여에 버려진 채 밀려오는 밀물에 떠밀리며 부르짖었을 그 많은 젊은 어른들 의 공포와 몸부림과 울부짖음이 그리고 그렇게도 크나큰 종일댁의 슬픔이 왜 동네 마당 한 가운데서 이야기 되어지지 못하는지 나는 때로 답답하고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엄마야말로 그동안 도대체 어디로 무엇을 하러 다녔던 것인지, 궁금한 것 투성이인 어른들 때문에 나는 곧 말라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지금 강렬한 햇빛 아래 숯기둥처럼 캄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엄마 때문에 나는 난 데없이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때도 엄마는 꼭 저런 모습이었다. 자다 깨보니 만월이었 는지 창호빛이 방깊숙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말 타는 것처럼 아버지를 타 고 앉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숯덩이처럼 새까만 실루엣뿐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엄마 는 너무나 큰 고통에 빠져 절규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명을 삼키며 견딜 수 없는 환희 에 몸부림치는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아버지와 엄마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 기 이하고 믿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내가 왜 아버지와 엄마가 아주 나쁜 장난을 하고 있다고 부정적으로만 보았는지 이유는 모르겠다. 어쨌건 나는 그 희한한 장면을 현실로 믿을 수 없 었다. 나는 원래 이상한 것만 보고 듣고 다니는 아이이기 때문에 그것은 순전히 내 이상한 환상이 빚어낸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아버지 엄마를 두고 빚어진 환상 때문에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나는 그것을 빨리 잊어버렸다. 그 대신 밤마다 빨리 그 리고 깊이 잠들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런데 햇빛 가운데 서 있는 엄마의 모습이 또다시 그날 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내가 입을 벌린 채 멍청하게 서 있자 급기야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치민 엄마는 주먹을 부르쥐며 뛰어왔다. "어른이 썽을 내믄 깜짝 놀란 시늉이라도 해사제 어째 갈수록 씨득씨득 말을 안 듣고 이 지랄이냐 응? 이 웬수야, 소도 아니고 곰도 아니고 어째서 말귀 못 알아묵는 빙신맹키로 띨 띨해갖고 내 속을 썩이냔 말이다." 엄마가 잡아죽일 듯 화를 뿜으며 쫓아와 등짝을 갈겼다. 고꾸라질 것처럼 떠밀린 나는 할 수 없이 돌아섰다. 너무나 멀고 아득한 내 인생길처럼 사천둑길을 꼬불꼬불 멀리 뻗어나 있 었다. "빨리 집에 가서 아부지 점심 내가거라. 말 안 듣고 또 그렇게 쓸개 빼고 아무데나 자빠 져 있다가는 이따 밤에 아주 나한테 죽을 테니. 어째 저런 것까지 생겨나서 내 속을 이렇게 도 썩이는지 몰라 참말!" 엄마는 끝내 고개를 힘껏 젖혔다 돌리며 가슴을 쳤다. 그래도 나는 내가 무엇을 그토록 잘못한 것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딸들을 나무랄 때면 꼭 뒷방것 또딸이에 대한 가슴앓이를 얹어서 한숨을 쉬곤 하는 것이다. 뒷방것 또딸이를 포함 한 엄마늬 인생과 내 인생은 엄연히 다른 것인데도 말이다. 봄날 그토록 그악스레 촘촘히 피었던 민들레는 서둘러서 꽃씨를 어디로 다 시집보내버렸 는지 꽃대만 말라 비틀어져 있고 우리가 소꿉을 놀 때마다 쌀로 쓰는 여뀌풀도 배배 말라가 고 있었다. 누구네 것인지 눈깔의 노란 테가 희미해진 늙은 염소는 사람이 지나가도 비켜줄 생각도 않고 못 본 척 되새김질만 했다. "이 띨띨이 같은 맴소야!" 화가 난 김에 배퉁이를 걷어차자 염소는 그때야 매애 하며 똥이 덕지덕지 붙은 엉덩이를 들고 비켜갔다. 마침 꽁지가 붙은 나비 두 마리가 둑 아래 피마자나무 위로 날아갔다. 아무 리 생각해도 그날 밤 엄마와 아버지가 엉겨 있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엄 마와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엉겨 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토록 불 경스럽게 느껴지던 죄책감도 별게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소도 돼지도 개도 교미를 해야 새 끼를 낳는다. 소나 돼지나 개가 엉기는 건 사천둑이며 큰벌이며 고샅길에서 늘상 보아온 풍 경이었다. 앞집 주만이 아저씨는 종돈을 기르면서 남의 돼지를 교미시켜주고 돈을 버는 게 직업이었다. 그래서 언니들은 주만이 아저씨 말만 나오면 징그럽다고 흉을 보지만 붙어 다 니는 건 천지사방에 널려 있었다. 갑자기 한낮의 정적을 깨며 후다닥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 아보면 마당 한가운데서 장닭이 암탉을 타오르고 있었고 쌍으로 붙어 다니는 잠자리도 부지 기수였으며 무엇보다도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호박꽃을 가루받이해주는 게 맨 첫 일과 였다. 수꽃을 일일이 따다가 암꽃술에 찔러주는 것이다. 제남이도 수꽃을 꺾어 들고 할머니 를 따라 암꽃을 찾아다녔다. 여자 남자가 결혼을 하면 함께 살면서 밤마다 삐비 까듯이 옷 을 벗고 뽕을 딴다는 사실만큼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시집가니까 좋 겠다고 놀릴 때마다 큰언니는 얼굴이 빨개져가지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다시 '좋을 때다!' 탄성처럼 뱉고 큰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의 얼굴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심심하면 점쟁이 뚜껑례와 엿장수 총각이 밤이면 밤마다 포개진다는 모양을 흉내내며 떠들었다. 나는 왜 그때마다 짐짓 아무것도 모른다는 투로 내숭을 떨며 외면했던 것일까. 그것을 왜 음침하고 난잡한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 지 알 수 없다. 그런 것에 대한 상식 자체를 음란으로 알았던 건 아닌지 모른다. 작년 가을이었다. 참새 쫓으러 간 선희와 나는 메뚜기를 잡아서 강아지풀로 세 꿰미나 꿰 어놓고 논둑에 붙박아둔 우산 밑에 앉아서 참새 대신 벼를 까먹으며 놀고 있었다. 그때 꽁 지를 붙인 고추잠자리 두 마리가 파르르 날아와서 벼 모가지에 휘청 내려앉았다. 선희가 킬 킬거리며 탄성을 질렀다. "야 잠자리 뽕 딴다." "아니다아, 새끼 업고 간다아." 선희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 때문이었을까. 나는 잠자리를 옹호하고 싶었다. 괜한 잠자리 를 그렇게 상스럽게 몰아붙이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꽁지가 붙었는디 뭐 땀시 새끼라고 우기냐? 잠자리가 느그 사촌이라도 되냐아?" 나는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다그치는 선희만 갑자기 경멸스럽고 천박해 보였다. 정나미가 떨어져서 같이 놀기가 싫어졌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나 간다. 인제 너랑 안 놀아!" "놀지 마라. 뽕 따는 거 처음 본 것같이 별 숭물을 다 떨고 자빠졌네. 저도 즈그 엄마 아 부지가 뽕 따거 태어났음시로!" "뭣아?" 우리 엄마 아버지가 뽕을 따서 내가 태어났다니,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모욕은 아직 받아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뭣아? 하면서 선희를 돌아보긴 했지만 더 이상 할말이 없었다. 나는 선희의 말을 부정할 아무런 상식도 근거도 갖고 있지 못했다. 나는 완전히 삐 져서 입을 내민 채 커다란 혼란을 껴앉고 그 논둑길을 걸어오게 되었다. 나는 정말 어떻게 태어난 것일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거나 고무줄장수한테서 얻었다는 게 거짓말이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정말로 엄마와 아버지가 그렇게 엉겨서 내가 태어 난 것일까. 그런 것 같았다. 부정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절망이었다. 내가 그렇게 상 스럽게 만들어진 존재라면 개나 소 돼지하고 다른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저 논 둑길에 서 있는 강아지풀보다도 코딱지 나물꽃보다도 못한 존재인 것 같았다. 나는 우울했 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만여사건 이후 나는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었다. 큰벌이나 바다로 갈 때도 실개천이 되어버린 사천으로 개구리를 잡으러 갈 때 도 먼빛으로나마 아버지의 동향을 살피고 시야에서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아버지야말 로 뒤께 노인과 말집네의 비밀스런 사연을 공유한 수수께끼 인물인 것이다. 아버지의 모습은 갈수록 여위고 더욱 외로워 보였다. 말수도 급격히 없어져버렸다. 아버지 의 긴 등이 활처럼 휠 때마다 나는 거꾸로 먼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새들아 빨리 온나 우리 벼가 다 탄다 울아부지 가슴이 다 탄다 새들아 빨리 온나 울 언니 시집갈 때 아바지떡 노나주께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어떤 도시의 아이들을 전부 데려간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내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구름처럼 몰려온 새 떼가 빗방울을 떨어뜨려주고 간다면 정말 좋 을 것 같았다. 바닷물을 다 달고 날아갔듯이 바다 같은 큰 물을 물어온다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꼬막이 새가 되어 떠나가버린 빈들을 키 큰 아버지는 한 마리 두루미처럼 느릿느릿 걸어 다녔다. 밀짚모자 그늘밖에는 쉴 곳도 없이 아버지는 벌써 며칠째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들 고 다녔다. 행여 땅밑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깊은 곳 일지라도 물줄기가 흐르는 곳은 거꾸로 들려 있던 버드나무가지가 발딱 일어서게 된다는 것 이다. 사람들은 쩍쩍 갈라진 논바닥을 갈아엎고 풀풀 먼지를 일으키며 메밀을 심었지만 우 리는 새벌 구렁논 덕분에 예년의 절반 정도나마 모내기를 했다. 항상 물이 잘 빠지지 않고 거머리만 득시글거려서 마지못해 벼를 심는 논이었는데 올해는 못자리 노릇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차라리 모내기를 못했더라면 우리 아버지 역시 사장나무 그늘에 길게 누워 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벼포기 타는 모습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글거리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멀고먼 들길을 걸어가서 '아부지!'하고 부르면 그때야 나 를 발견한 아버지는 '오냐' 하면서 성큼성큼논둑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말없이 밥을 다 먹 은 다음 바구니를 챙겨주며 '조심해서 가거라' 한마디뿐이었다. 아버지가 밥을 먹는 동안 논 둑길에 쪼그리고 앉아 딴청을 피우던 나도 '야' 한마디만 대답하고 새벌을 걸어나왔다. 빈 바구니를 들고 타박타박 새벌을 걸어오자면 왜 그런지 아주 멀고먼 곳에 아버지를 혼자 두 고 오는 것처럼 자꾸 눈물이 흘렀다. 아버지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의 거리가 되면 나는 엉 엉 소리를 내서 울기도 했다. 쨍쨍한 하늘 아래 나무 하나 서 있지 않은 허허한 들길을 걸 어오며 엉엉 울다가 상여마당의 통곡처럼 목청을 높여보기도 하고 멜로디를 섞어 노래처럼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버지를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버지가 엉겨 있던 모습을 나는 새롭게 확인을 하고 만 것이다. 나는 일부러 점심바구니가 기다리는 집이 아닌 동네마당 말집네로 향했다. 수자와 함께 노인이나 찾아갈 생각이었다. 수자는 집에 없 었다. 바다에 간 것 같았다. 가뭄은 바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폭염은 산과 들뿐만 아니라 바다까지도 태우고 있었다. 뻘밭의 생물들은 거의 딱지나 껍질뿐 속은 고스란히 곯아 있기 일쑤였다. 굴과 바지락은 묽 은 코처럼 알이 여물지 않았고 썰물 때 생긴 웅덩이의 새우들도 투명한 형체뿐 빈 몸으로 숨만 할딱거렸다. 고기도 씨가 말라서 새벽마다 건져올리는 어부들의 그물엔 오래 전에 바 다에 빠진 사람들의 낡은 신발짝이나 상한 해초 이파리들만 들어온다고 했다. 그래도 노인은 날마다 장대를 메고 바다로 나갔다. 종일댁도 보름달처럼 둥근 물항아리를 이고 거멍숲으르 향했다. 수자도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바다로 나가 바위를 타고 다니며 그 나마 고동을 줍고 굴과 따개비를 따고 이끼처럼 마디 자란 해초를 득득 긁어왔다. 그래서 언제나 말린 해초를 씹어먹고 다니는 수자에게선 비릿한 바닷내가 떠나지 않았다. 하루 종 일 야금야금 갉아먹고 다니는 선희의 보리개떡과 해초를 바꿔 먹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머리칼이 노랗게 바래고 마른 버짐이 허옇게 핀 수자가 눈에 띌 때마다 왜 부잣 집에 양녀나 식모로 보내지 않는지 모르겠다며 말집네를 흉보곤 했다. 사실 수자가 잘하는 건 쉬는 시간의 놀이뿐 공부는 언제나 꼴등이었다. 4학년이 되도록 받아쓰기도 못할 뿐 아니라 아주 단순한 덧셈 뺄셈도 못했다. 수자에게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게 바로 그 점이었다. 올 여름에는 나도 사장나무 그늘에서의 공기놀이에 고정멤버가 되었다. 겨울 동안 사장나 무 뿌리등걸 밑에 숨겨두었던 공깃돌을 한 보따리 꺼내놓고 퍼질러 앉아서 어미돌은 쳐올리 고 새끼돌은 싸잡아 집으며 종일토록 살림을 살았다. 공깃돌을 집다가 놓치거나 다른 걸 건 드리면 그 숫자만큼 벌금을 물고 일정 횟수에 다 갚지 못할 때는 이자까지 붙는 아주 복잡 한 숫자놀이였다. 우리는 빚계산을 할 때마다 암산으론 골이 복잡해서 공깃돌을 일일이 옮 겨가며 셈하다가도 틀리게 되고 그것 때문에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자 는 암산의 천재였다. 누군가 공깃돌을 놓치면 일일이 세어보지도 않고 한눈에 개수를 파악 해버릴 뿐 아니라 그전에 빚이 얼마였는데 이제 얼마가 되었으며 이자가 붙어 얼마가 되었 다는 계산을 줄줄이 엮어버리는 거였다. 그러나 공부시간엔 그런 바보가 없었다. 선생님이 칠판에 그것도 아주 간단한 산수문제를 써놓고, 나와서 답을 쓰라고 하면 언제나 눈물로 답 을 대신했다. 답을 쓸 자리에 분필을 꼭 누른 채 칠판만 노려보다가 급기야 고개를 떨어뜨 리고 눈물만 후두둑 후두둑 떨어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지호기 선생님은 수자의 뒷목을 탁 탁 때리며 '돌대가리 눈물에 발등 깨지겄다. 들어갓!' 했다. 받아쓰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 다. 수자는 보지 않고 쓸 수 있는 글자라곤 서수자 서수걸 이봉신 그 세 사람 이름뿐이었다. 해마다 가오리연 꼬리에 새기느라 명심을 해서 기억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수자'를 거꾸로 한 '자수'를 써보라고 하면 역시 공책만 끝없이 노려보다 흐느껴버렸다. 수자는 체계 적으로 숫자나 글자를 배워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밥하고 빨래하는 가사를 익히느라 열살 을 훌쩍 넘겨버린 나이에야 입학을 하는 바람에 수자는 늘 허둥거리며 학교만 왔다갔다한 거였다. 수자는 모두가 선망하는 다방면의 천재였지만 선생님은 구제불능 바보 천치라고 했 다. 어쨌건 수자는 자연 그 자체였고 나에겐 그것을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바다, 바다처럼 환 하고 깊고 끝없으며 어둡고 복잡한 것이 또 있을까. 바다처럼 시원하고 충일하고 감미롭고 평화로우며 막막하고 무섭고 험한 것이 또 있을까. 수자가 아니었다면 난 바닷물에 발도 담 가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며칠 만에야 물위에 뜨는 법을 익힌 나는 개구리헤엄 송장 헤엄 같은 걸 급속도로 배웠다. 나는 송장헤엄이 그렇게도 좋았다. 출렁이는 물위에 누워 너 무나 큰 하늘을 바라보면 나는 내가 물거품처럼 어디론가 곧 사라져버릴 존재인 것 같기도 했다. 그때마다 공포가 엄습하기도 했지만 이상한 쾌감이 더 강했다. 때로는 내 몸이 조각배 처럼 둥실둥실 수평선을 넘어가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나는 수자를 쫓아서 바다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물때가 아직 안됐다면 수자는 틀림 없이남포 앞바다에 떠 있을 것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여름과 겨울의 큰벌이었다. 겨울날 황량한 큰벌은 생각만으로도 전율 이 일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다. 그러나 종달이가 차돌멩이처럼 높이 나는 봄이 오면 그때부 터 큰벌은 그대로 아이들의 천국이 되곤 했다. 큰벌에는 정말 먹을 것 천지였다. 모래구릉마 다 이불처럼 덮여 있는 풀덤불들이 바로 그 보물섬이었다. 그러나 벌겋게 타버린 큰벌에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한 아이들은 사람 해골을 이리저리 굴 리고 다니며 돼지몰이를 하고 축구를 했다. 미국 사람과 한국 사람이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 진 밀가루 부대로 만든 팬티가 아니면 감물을 들인 당목팬티 하나로 여름을 나는 사내아이 들이 토인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채 하릴없이 큰벌을 헤집고 다녔다. 여름 화덕솥의 땔감으로 마른풀을 베어놓고 낫치기를 하는 사내 아이들 곁을 지나는데 누 군가 '또딸이 동생이다!' 하고 외쳤다. 낫으로 땅뼘을 재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돌아보았 다. "주남아 주남아 어디 가냐아!" "사천둑으로 낮잠 자러 가안다!" "또딸이 한잔 주남이 한잔, 낙지발 안주 먹고 낮잠 자러 가안다!" "한 밤 두 밤 먹잠 자러 가안다!" 사내아이들은 발을 구르고 얼굴이 빨갛게 되도록 핏대를 올리며 소리쳤다. 노인은 같은 또래 사내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예쁘지 않으면 사내아 이들이 그렇게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 놀림감이 되었느냐고 되레 나 를 나무라고 구박하는 우리 식구들과는 전혀 다른 해석이었다. 노인의 말을 믿기로 한 나는 일부러 코를 쳐들고 큰벌을 지나 남포 쪽 바다로 내려갔다. 백사장 가득 만물이 된 바다 위 에 여자아이들이 둥둥 떠 다니는 게 보였다. 낫이랑 마른풀 땔감을 팽개쳐버린 채 나를 쫓 아오던 사내아이들도 우! 하고 거멍숲 쪽으로 내려갔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여자 아이들 은 누구나 남포 쪽에서 수영을 하고 사내 아이들은 거멍게에서 따로 수영을 하는 것이다. "수자야!" 내가 백사장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수자도 나를 알아보고 자맥질로 무당각시처럼 머리칼 을 곱게 다듬으며 백사장으로 헤엄쳐 나왔다. 물이 찬지 입술이 퍼렇게 죽어 있었다. 아니면 배가 고파서일 것이다. 나는 집에서 보리밥 누룽지나 개떡을 훔쳐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수 자가 물밖으로 나오자 선희도 미란이도 춘희 애자 분옥이 연심이 복덕이도 다 따라나왔다. "땅땅 말라라. 고추밭에 불났다. 땅땅 말라라!" 아이들은 자기 엉덩이를 때리며 햇빛 튀는 모래밭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옷을 입으려면 몸의 물기를 말려야 하는 것이다.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도 백사장으로 나와서 엉덩이를 때 리며 '땅땅 말라라. 고추밭에 불났다. 땅땅 말라라!' 소리치며 뛰어다녔다. 그러면 정말로 온 몸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나도 얼른 옷을 벗어던지고 마른 엉덩이를 때리며 아이들 뒤를 따랐다. 물속에 들어가려면 준비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준비운동은 달밤의 강 강술래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천지사방이 환하게 열린 바닷가 뜨거운 태양 아래인데도 맨살 이 서로 부딪는 가랑이와 손바닥이 철썩철썩 감기는 엉덩이의 이상한 쾌감 때문이었다. "와아 머시마들이다!" 가랑이가 더 세세 부딪치도록 일부러 엉덩이를 실룩실룩하며 뛰어다니던 연심이가 갑자기 소리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거멍게로 내려간 줄 알았던 사내아이들이 백사장 모래구릉 을 배밀이로 타고 시커멓게 다가오고 있었다. 기겁을 한 우리는 죽을 힘을 다해 풍덩풍덩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힘세고 사나운 수자도 알몸으론 방법이 없었다. 우리보다 나이가 두세 살씩 많은 욘심이와 수자 그리고 복덕이는 가슴이 정말 복숭아씨만큼이나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던 것이다. 히히거리며 다가온 사내아이들이 우리 옷을 모래 속에 파묻기 시작했다. 수 자는 잠수를 해서 주워올린 차돌멩이로 팔매질을 하고 연심이와 복덕이는 갖은 욕설을 퍼부 으며 어른들한테 일러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겁쟁이인 나머지 아이들은 과장 되게 허우적이며 엉엉 소리쳐 울기도 하고 잉잉 소리쳐 울기도 하고 잉잉 우는 흉내만 냈 다. 그리고 옆눈으로 모래밭을 열심히 살펴보았다. 사내아이들 틈에 아까 낫치기할 때는 없 었던 김명래가 끼여 있는 것이다. 새 학기에 전학온 김명래는 봄소풍 때 '빨간 불이 켜지고 뉴스가 끝날 때 나는 깜짝 놀라 미칠 것만 같았죠.' 하고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몸을 옆으 로 세우더니 한쪽 다리를 풍 걸린 사람처럼 마구 흔들고 몸을 꼬아올리면서 '투비투비 투투' 할 때는 손가락까지 탁탁 튀기는 거였다. 우리는 모두가 남세스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해 서 '오메! 오메! 저 머시마 왜 저런디야!' 비명을 지르며 눈 둘 곳을 몰라하면서도 너무나 재 밌고 우스워서 미칠 것 같았다. 영화에 출연한 진짜 가수나 서커스 무대에 등장하는 삼류 가수는 반주에 맞춰 트위스트 맘보 같은 건 추지만 정작 노래를 부를 땐 그렇게 노골적인 춤동작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명래는 너무나 천연덕스러웠다. 김명래는 곧 우리 반의 오 락부장이 되었다. 그렇게 무서운 지호기 선생님도 명래가 한번 까불기 시작하면 웃지 않고 는 봇 배겼다. 그런데 아이들 말에 김명래는 까불이 정도가 아니라 타고난 바람둥이라고 했다. 백수건달 장돌뱅이들처럼 '히야까시'를 잘한다는 것이다. 명래는 장터에서 나락장사를 하는 곰보가 목 포인가 여수인가에다 아내 몰래 낳아놓았던 아들이라고 했다. 곰보의 아내는 나락가마를 번 쩍번쩍 들어올리는 여자 장사인데도 둘말처럼 아기를 못 낳는 선녀였던 것이다. 뒤늦게야 사실을 알고 자살을 기도했던 곰보의 아내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명래를 데려왔다는 소문 이었다. 명래가 고무줄하는 여자 아이들의 치마를 들추는 것은 나도 몇번 보았다. 하지만 사내 아 이들은 누구나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을 빼앗고 오자미를 차버리는 등의 심술을 잘부렸다. 그러다 여자 아이들의 앙탈이 심하면 발을 걸고 치마를 들추는 등의 극단적인 행동까지 하 는 것이다. 그런데 김명래는 치마를 들추는 정도가 아니라 플라타너스 나무 뒤에서 우리 반 윤명심이의 속옷을 벗겨 보았다는 거였다. 명심이는 공부라곤 지지리도 못하는데다 풀각시 처럼 조그만 머리통을 쉴새없이 들까부는 명래에 버금가는 까불이였다. 그런가 하면 남포 사는 서정례는 '곰례'라는 별명처럼 항상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조용한 존재였는데도 명래가 청소시간에 장난치다 가슴을 만져보았다는 이유로 모두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추문의 대상 이 되고만 거였다. 그래서 여자 아이들은 누구나 김명래가 곁에 오면 입을 비죽이며 슬그머 니 비켜버리거나 일부러 앙칼진 눈빛을 만들었다. 나도 학교에서 김명래와 눈이 마주친다거 나 곁을 스칠 때마다 몸이 긴장되고 살갗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명래는 나에겐 관심이 없었다. 내가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럴 때마 다 이상하게도 나는 쓸쓸하였다. 우리 옷에다 모래를 덮어놓고 꿱꿱 소리치고 박수를 치면서 팔딱팔딱 뛰어 다니는 다같은 아이들 중에도 명래는 유별났다. 우리를 골탕먹이는 게 그렇게 신나고 재밌는지 머리를 상 모 돌리는 사람처럼 끄덕거리며 꿱꿱 발뒤꿈치가 엉덩이를 차도록 신나게 높이뛰기를 해대 는 것이다. 그런데 한순간 명래가 개성베로 만든 푸른색 고무줄 팬티를 밑으로 죽 잡아내리 더니 후다닥 벗어버리는 게 아닌가. "와아 돌진이다!"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명래가 정말로 그 부분만 유난히 하얀 소방울처럼 생긴 고추를 달 랑달랑 흔들며 모래밭을 돌진해 내려왔다. 다른 아이들도 와아 소리치며 저마자 팬티를 벗 어 걷어 차내고 풍덩풍덩 물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놀란 우리는 무작정 도망치다 파도 에 밀려 물을 먹고 켁켁거리거나 허방에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렸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 지고 말았는지 정말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도대체 우리를 어쩔 셈인지 사내 아이들이 제각각 한명씩 점을 찍어 쫓아 다니는 거였다. 죽어라 도망을 치면서 보니까 수자가 기름집 종식이의 귀때기를 움켜잡고 사정없이 물을 먹이는 게 보였다. 역전이었다. 그렇게 잠깐 정 신을 판 순간이었다. 내가 저절로 쑥 물위로 솟아올랐다. 고래처럼 물의 부력을 타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내 다리 사이에서 뭔가 시커먼 게 따라나오고 있었다. 명 래의 머리통이었다. 놀랄 틈도 없이 나는 곧 추락의 공포로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배 가 불룩해지도록 물을 먹고서야 겨우 균혀응ㄹ 찾으면 명래는 다시 나를 들어올리고 또 들 어올리며 정신을 못 차리게 했다. 다른 아이들도 여기저기서 쑤욱 쑤욱 들어올려지며 정신 없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수자는 거꾸로 종식이를 그렇게 하늘로 들어올렸다. 종식이는 하늘로 솟을 때마다 두 팔로 만세를 부르며 몸을 활처럼 휘어서 거꾸로 다이빙을 했다. 여 자 아이들도 하나 둘 종식이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나는 잠깜 혼란에 빠졌으나 곧 모든 것 을 이해하게 되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뱃가죽이 등허리에 달라붙고 눈이 벌겋게 충혈되도록 놀다가 엿가락처럼 늘어난 머나먼 신작로를 걸어서 돌아오니 집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보리밥 한 덩어리쯤 은 남겨두었겠지만 필시 뒷방것 또딸이가 훔쳐다 먹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나는 너무나 배 가 고팠기 때문에 발을 뻗고 울어버릴까 하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내가 금방까지 무슨 놀이를 하다 왔는지를 생각했고. 왠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얼굴을 들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가난 구제는 임금님도 못한다며 오직 근면한 습관만이 구원이라는 할머니의 설교는 태어 나서 지금까지 골백번도 더 들어왔다. 나보다 열살 이상인 언니들은 아마 골천번도 더 들었 을 것이다. 하지만 논밭이 타버렸는데 사람들이 어디에 가서 부지런히 일을 한단 말인가. 어 린 내가 생각해도 너무나 막막한 일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거르지 않고 바다로 나갔다. 나뭇잎처럼 조그만 조각배에 작살을 싣고 제 주도보다 먼 바다까지 나갔다가 며칠 만에 돌아오는 것이다. 무엇을 찾아 다니는 것인지 노 인의 눈에는 예전의 그 파란불이 다시 켜진 것 같았다. 우리는 날마다 바다에 나가 우리들 만의 비밀한 놀이를 즐기다가 지치면 허기진 뱃구레를 움켜쥐고 거멍숲으로 올라가 종일댁 처럼 소나무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가무락물한 수평선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 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냥 돌아갔지만 수자와 나는 언제나 졸리고 피곤한 몸이 쳐져내릴 때까지 기다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드디어 수평선에 까만 점 같은 것이 깜박깜박 나타 났다 사라졌다 뜀뛰기를 하는 날이면 우리는 너무나 기뻐서 금방까지의 피곤은 순식간에 까 먹고 김명래처럼 팔딱팔딱 뜀을 뛰고 박수를 치면서 모래밭을 마구 뛰어다녔다. 노인도 우 리의 마중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바다 너머까지 지저구지저구 하 시끄럽길래 바삐 달려왔더니 아니나 다를까 우리 검은눈 이랑 황새다리였구나. 허허허허!" 노인은 나를 '검은눈' 이라 부르고 수자는 다리가 길다고 '황새다리'라 불렀다. 언제 들어 도 사랑이 가득 담긴 애칭이었다. 떠드는 소리가 바다 너머까지 들렸다는 말에 우리는 노인 의 친구인 거멍숲 도깨비를 연상하고 등줄기가 오싹 땅기기도 했다. 그러나 삶아놓은 문어 처럼 새빨갛게 익은 얼굴로 노인이 허허허허! 하고 웃으면 우리의 가슴도 바다와 하늘처럼 금방 환하게 열리곤 했다. 아들을 낳으면 월남 가니까 딸을 낳으라는 유행가가 생겼는데도 선희네 올케는 아들을 낳 았다. 아들을 낳았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고샅에서 만나는 사람들마 다 걱정을 나누었다. 보리벼늘을 통째로 잃어버린 선희네는 보릿가루로 연명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방앗간에서 보리방아를 찧게 되면 돼지사료로 쓰는 껍질가루를 기꺼이 양보해주었 던 것이다. 할머니는 보리쌀 두 말을 리어카에 싣고 수걸이랑 함께 끌고 요란한 거릉ㅁ걸이 로 고샅을 올라가서 부조를 했다. "우리 보리는 하도 곱게 벗겨놔서 절구에 벅벅 대껴 푹 삶으믄 얼매나 찰지는지 엎어진 것은 꼭 쌀 같단 말이시. 이거라도 멕이고 어서어서 기운 차리시락 하게." "성님 성님, 쌀 같고말고라 천금 같고말고라. 생각도 꿈도 안 꿨는디 기나긴 여름해에 천 금 같은 곡식을 받고 이 공을 어찌 갚는다요." "그런 말 마시게. 천금같이 귀하고 귀한 자손을 보고도 묵을 것이 없어서 젖이 안 나온다 는디 같은 하늘을 이고 삼시로 당연한 일이제. 어느 화탕지옥에 빠질 인사가 노무 보리벼늘 을 통째로 훔쳐갔는지는 몰라도 죄가 참말 클 것이네." "참말로 어느 쎄가 만발이나 빠질 인간인지 에미 죽인 웬수라도 이렇게 원망스럽진 않겄 소오. 이 여름내 퍼붓는 저주에 그놈들 아마 이 여름을 넘기기 전에 염병을 앓아 죽든지 그 보리쌀 묵고 배가 터져 죽든지 할 것이요!" 단숨에 저주를 퍼붓는 선희네 엄마의 살기가 금방 하늘에라도 닿을 것 같았다. 선희네 엄 마는 너무 못 먹은데다 분함을 삭이지 못하는 바람에 '가슴애피'를 얻었다고 했다. 가슴애피 는 말집네도 앓는 지병으로 오장에 불이 붙는 병이었다. 마당을 쓸다가도, 갯가를 샅샅이 뒤 지다가 종종걸음으로 한길을 달려오다가도 선희네 엄마는 가슴에서 불길이 솟으면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그와 같은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래서 선희네 엄마는 마귀처럼 앙칼진 숯검 댕이 얼굴이 되어버렸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밥상머리에서 앙칼진 숯검댕이 얼굴이 되어 버렸다.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밥상머리에서 쩟 입맛을 다셨다. "에편네 입이 너무 사나워도 궂은 일이 안 그쳐. 내내 심사를 끓여 봤자 한번 없어진 보 리벼늘이 돌아오기를 해, 도둑놈들이 나타나서 내가 잘못했소 빌기를 해. 답답한 에편네, 재 산 잃고 건강마저 잃어 손해가 덤으로 얼마냔 말여. 자고로 궂은 일은 빨리 잊는 게 상수여. 벨일을 겪어도 원망하는 마음을 안 만드는 게 그게 바로 지혜란 말이여!" 말은 할머니가 하는데도 아버지가 식구들을 쓱 한바퀴 돌아보았다. 밥상머리마다 밑반찬 처럼 한 건씩 오르는 지혜타령을 우리는 모두 귓등으로 흘리고 말지만 엄마만 대표로 얼굴 을 숙연하게 만들어서 할머니와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었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안된 어느날이었다. 영화에서 본 것하고 똑같이 생긴 지프가 마을에 들어왔다. 바다놀이에 중독되어 뻘귀신처럼 눈 속의 흰자위와 이빨만 빼놓고 검둥개가 되어 버린 우리는 숨이 턱에 차고 신발바닥에 불이 붙도록 달려서 우대미로 모여들었다. 꼭 군인 들의 군화처럼 생긴 지프와 새신랑처럼 하얀 장갑을 낀 군인들은 한번 놓치면 영원히 후회 하게 될지도 모를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다. 그 군인들은 영화뉴스에 나오는 군인들처럼 몸 을 직각으로 움직이며 선희네 아버지에게 경례를 했다. 손이 벨 것처럼 날카로운 바지의 다 리밋줄과 파리가 낙상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반짝반짝한 구두코 등이 정말로 멋있었다. 우 리는 침도 한번 삼키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을 낱낱이 구경했다. 그런데 선희네 엄마가 왜 갑자기 군인들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잡아뜯으려 하다가 땅바닥으로 나가 떨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선희네 엄마가 갑자기 미쳐버린 것 같았다. 선희네 엄마를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실성하기 시작했다. 서답내 둑 위 대장ㄱ 나 옆집에 살던 소자의 마누라가 먹을 것이 없다고 집을 나가버렸다고 했다. 넋이 나간 소 자는 오십이 넘은 나이에 얻은 어린 딸을 업고서 어허 참! 어허 참! 하늘을 향해 헛웃음을 웃고 다녔다. 아예 미쳐버린 것이다. 아리대미 팽나무집 여자는 무슨 풀을 잘못 뜯어다 죽을 쑤어먹곤 몇날씩 잠만 자더니 낮이나 밤이나 들판을 쏘다닌다고 했다. 실성하지는 않았지만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 중에 절반은 가슴을 쓸거나 헛구역질로 어깨를 들썩이며 걸어다녔다. 대개는 일제와 6.25를 겪으면서 가족을 잃었거나 잊을 수 없는 고생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말집네나 선희네 엄마처럼 못먹어서 기력이 쇠하면 가슴에 남아 있던 응어리가 심장을 치받 으며 꼿꼿하게 곤두서버린다는 것이다. 우리 집도 도둑을 맞았다. 방앗간에서 보리를 찧어다 마당에 덕석을 펴고 널어놓았는데 누가 그것을 퍼 가버린 것이었다. 네모진 커다란 덕석 다섯 개와 동그란 멍석 세 개를 마당 가득 펼쳐놓고 뜨끈뜨끈한 보리쌀을 널어놓으면 수시로 발로 저어서 고루 거풍을 시키는 건 원래 할머니 몫이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몫이라고 생각한 일에는 워낙 철저해서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덕석으로 들어가 기찻길처럼 길고 긴 밭고랑을 내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한순간 에 덕석 귀퉁이에서 자국이 선연하도록 한 말 정도쯤 보리쌀을 퍼 가버린 것이다. 엄마는 언니들을 닦달했다. 용돈을 쓰려고 무역선을 탔다는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관대했다. "놔둬라. 다 큰 처녀들이 말 못할 돈도 필요하고 할 것인디 이녁 부모 것말고 어디 가서 도둑질을 하겄냐." 아버지와 엄마는 더 이상 입을 다물었지만 언니들은 도둑질이란 말에 발끈해서 아우성이 었다. 사방에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들개처럼 쏘다니는데 그들을 놔두고 왜 자신들만 의 심하느냐는 것이었다. 너무 억울한 다찌니는 이대로 가다간 추석이 오기 전에 마을 사람들 이 모두 들개로 변해버릴 거라는 악담까지 했다. 정말로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들개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른들은 모두 언제나 화가 나 있었다.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단내를 헉헉 뿜으며 눈빛을 희번득거리고 아이들만 보면 무조건 개 쫓듯 발을 구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날도 우리는 고래처럼 하늘로 솟구치는 놀이를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소나무 그늘에서 그만 잠이 들어버렸다. 바닷물이 말라붙은 피부는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가 가렵고 따가운 데 사나운 가시잔디와 길게 뻗어온 찔레넝쿨이 쉴새없이 성가시게 구는 괴로운 잠이었다. 그런 잠 속으로 갑자기 노인의 소리가 들려왔다. "검은눈아! 검은눈아! 아 황새다리 거기 없냐아! 아 아가! 아그들아, 나 왔다! 할애비가 왔 단 말이다!" 노인의 목소리는 분명한데 지치고 쉰 늘어진 소리였다. 나는 순간 노인의 흉내를 낸 거멍 숲의 도깨비일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악몽처럼 무거운 손으로 수자를 슬그머니 꼬집어보았 다. 수자도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털 달린 거인의 발자국 소리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허, 이런! 거멍숲 도깨비가 업어가믄 으쩔라고 한데서 이렇게 먹잠들을 자고 있으까 응? 검은눈아! 아 황새다리야! 자 어서 일어나라! 어서 일어나서 아부지랑 동네 어른들 잠 모셔 오니라. 리아까랑 지게들 있는 대로 짊어지고 식칼이랑 도끼 작두 겉은 연장들로 챙겨들고 빨리 여기로 오시락 해라, 어서!" 이 한적한 바닷가에서 어디에 쓰겠다는 것인지 식칼이랑 도끼 작두 같은 연장들의 이름 때문에 몸서리를 치며 눈을 뜨자 바닷바람에 날리는 백발과 붉은 얼굴의 노인이 우리를 내 려다보고 있었다. 파란불이 켜졌던 두 눈은 십리나 들어간 것처럼 푹 꺼져 있고 후줄그레 늘어진 베적삼의 몹시 지친 모습이었다. 그 풍성하고 깨끗하던 수염도 끝이 옥수수 수염처 럼 지저분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병이라도 난 것 같았다. "할아부지 병 났어라? 바다에서 아파갖고 인제야 오셨어라? 할아부지 여기 가만 계시면 빨리 가서 울아부지랑 벅구네 할머니 모시고 오께요." 나는 연장 이야기는 빨리 잊고 싶어서 서둘러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나 노인이 손 을 저었다. "아니다. 할애비가 고래를 잡다왔다, 봐라. 집채만한 게 동네사람들 다 멕이고도 남게 생 겼다. 그란께 어서 가서 적 뜰 연장들이랑 동네로 옮길 것들 갖고 오시락 해라, 어서!" 고래를 잡다니. 바다의 제왕인 고래는 얼마나 크고 힘이 센지 잘못 걸리면 커다란 발동선 도 등으로 받아 부숴버린다고 하는데 노인이 혼자, 그것도 나뭇잎처럼 조그만 해초선으로 집채만한 고래를 잡아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놀라서 모래구릉으로 올라가 백사장을 내려다보았다. 백사장을 핥는 잔잔한 물살 위로 정말 집채만큼 커다란 게 조각배 뒤에 시커 멓게 엎드려 있었다. 작살을 박아서 끌고 그 먼 바다에서 여기까지 날밤을 새우며 삐걱삐걱 노를 저어온 모양이었다. 우리를 통해 바다로 달려나온 마을 사람들은 갑자기 힘이 센 장사라도 된 것처럼 바짓가 랑이를 걷어붙이고 물속으로 들어가 커다란 고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몸뚱이가 너무 큰 고래를 타오르기 위해서는 동아줄과 사다리도 필요했다. 어른들은 호흡을 맞추기 위해 등 너머에서 서로 소리를 질러가며 커다란 고래의 몸뚱이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고래에 새까맣게 매달린 마을 사람들은 꼭 개미떼처럼 버둥거리고 바닷물은 곧 새빨간 핏빛으로 물 들며 노을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대머리 소자가 땟국물에 뒤발을 한 어린 딸을 업은 채 꽹과리를 쳐대기 시작했다. 마을에선 동사무소 욋소리쟁이가 나는 듯 골 목골목을 달려다니기 시작했다. "도옹네 사람드을! 그릇 갖고 동네마당으로 나오시요오!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동네마당 으로 나오세서 괴기 받아 기시요오! 고래괴기 받아가시요오! 구황괴기 받아가시랑께라아!" 욋소리쟁이가 마을을 한바퀴 다 돌기도 전에 고래는 사장나무 그늘 동네마당으로 옮겨졌 다. "본등 사람들은 그래도 보리밥이나마 끼니는 이었은께 우대미랑 뒤께 사람들부터 노나들 주시게나. 서운한 사람 없두룩 고루고루." "예예. 그 걱정은 마시게라 어르신." 노인이 이르고 자리를 떠버리자 마을 이장을 비롯한 어른들과 아버지는 고기를 공정하게 나누기 위해 고래의 기름덩이부터 잘라내어 불을 붙였다. 추석 콩크르대회나 특별한 잔치 때만 햇불이 오르던 동네마당에 기름불이 켜지자 사장나무 그림자가 갑자기 차일처럼 하늘 을 덮고 웅성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도 몇 개씩이나 늘어나 이상한 흥을 돋우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기계층 때문에 빡빡 밀어버린 머리통을 더욱 깐죽거리며 동네마당을 휘젓고 다녔 다. 그러나 아이들은 산더미처럼 쌓인 살덩이뿐 실제 고래는 못 본 셈이었다. 어른들이 파리 떼 쫓듯 할 때마다 아이들은 나와 수자 쪽으로 쫓겨와서 고래가 정말 그 조그만 해초선에 끌려왔는지 작살은 머리 쪽에 꽂혔는지 고래가 눈을 감고 있었는지 뜨고 있었는지 노인이 고래와 싸울 때 혹시 무슨 술법을 썼다든가 거멍숲 도깨비의 관여가 있었단 말은 없었는지 등등을 쉴새없이 물어대곤 했다. 어른들은 우선 마을의 수호신인 사장나무에게 바치기 위해 커다란 가마솥을 내다 걸어놓 고 고기를 삶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 좋은 청년들은 고기를 우선 크게 우대미, 아리대미, 본 등, 잿등, 뒤께, 이렇게 다섯으로 갈라놓고 공정한지 어른들에게 물었다. 어른들은 본등과 아 리대미는 호수가 많으니까 얹으라고 했다가 다시 똑같이 나누라고 했다. 노인의 말대로 본 등과 아리대미 사람들은 보리밥이나마 끼니는 잇고 있으니까 조금씩 덜 먹어도 된다는 것이 었다. 이윽고 고기 삶는 냄새가 사람들을 일일일 찾아다니며 뱃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소자는 더욱 미친 듯 꽹과리를 쳐대고 여자들은 된장에 마늘과 풋고추를 썰어넣어 양념장을 만들었 다. 마을 청년이 지겟작대기로 펄펄 솟아오르는 김을 헤치고 가마솥을 휘저어 커다란 고깃 덩이를 건져올리자 사람들은 횟배를 움켜쥐며 저마다 탄성을 질렀다. 이장이 손을 털며 뜨 거운 고기덩이의 여기저기 귀퉁이를 잘라주자 아버지가 지푸라기로 급히 엮은 고수레 그릇 으로 받았다. 어른들은 짚고수레 그릇을 사장나무 앞에 바쳐놓고 막걸리 한사발을 사방에 뿌린 다음 저마다 흙마당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고래를 잡아온 노인이 아닌 사장나무 수호 신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삶은 고깃살은 너도 나도 덤벼든 여자들의 손 으로 어느새 다 썰어졌다. 어른들은 둘러앉아 새터거리 양조장에서 통으로 받아온 막걸리를 마시며 삶은 고래고기를 한점씩 나누어주었다. 받은 고기를 얼른 삼키고 또 달라고 쫓아 다 니는 아이들과 아직 받지 못한 아이들 사이에서 밀싸움이 벌어지자 어느새 쫓아온 소자가 꽹가리를 꽝! 꽝! 치며 중재에 나섰다. "자자! 받은 사람은 이쪽으로 나오고 안즉 안 받은 사람은 줄을 섭시다아 꽈꽝 꽈꽝! 자 빤듯하게 줄을 맞춰야 빨리 끝납니다이? 꽈꽝 꽈꽝! 시방 내 말이 안들리세라? 해 지고 공 비들 내려오기 전에 빨리 배급을 마쳐야 한다께라. 왜놈들 말 타고 달려오믄 금방이란 말임 다 금방! 꽈꽝꽈꽝꽈꽝 꽝!" "저누무 소자는 시방이 인공 때라는 거여, 왜정 때라는거여?" "글씨, 즈그 아부지 몰래 베락부자 살림 노나주던 그땐 중 아나보제." 볼때기가 미어지도록 고깃점을 씹던 여자들이 수군거리는데 염소 수염 할아버지가 팔을 저으며 일어섰다. "빈 속에 무턱대고 괴기가 들어가믄 필시 설사로 고생들을 할 것인께 조심들 허십시다아. 더구나 여름엔 생고기 물려져불면 벌레 생기고 그만인께 꼭 포를 떠서 하늘 높이 말리시등 가 소금동이에 넣어 놓고 쬐끔씩 조근조근 피가 되고 살이 되두룩 애껴 묵읍시다. 조상 대 대로 마을에 공이 많으신 뒤께 김선태 어른들 생각해서라도 명심들 하세야 합니다이!" 8. 어른들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다 바람끝이 소슬해지면서 사방천지가 소복이라도 차려입은 듯 하얗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만복들 새벌 놀미대미 우두뫼 어디들 돌아보건 광목을 바래는 것처럼 눈이 시린 하얀색 천 지였다. 논이건 밭이건 아무렇게나 자라나던 메밀이 하얗게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다. 어 디를 가건 눈에 엎인 겨울 같았다. 더구나 햇빛이 강렬한 한낮이면 작열하는 꽃들의 향내 때문에 머리까지 어지러울 정도였다. 사람들은 낮에도 꿈속이나 달밤인 것처럼 기분이 몽롱 해가지고 허허허 헛웃음을 날리곤 했다. "허허허 나락 베고 탈곡하고 방아 찧고 귀찮을깨미 바로 쌀가루가 열렸네. 하얀가루 떡가 루가 바로 열려부렀어." "청오산 골짜기 어디 안개골로 들어가믄 신선들이 사는 백화도원이 있다등마. 바로 선경 일세, 선경." "안 그래도 올 추석에는 입으로 떡을 묵는 게 아니라 눈으로 묵고 흠향만 원없이 할 것인 디 그게 바로 신선 아니겄능가 허허허허." 어른들은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허허허 하고 시원스레 웃어버렸다. 여자들은 날이면 날마 다 메밀묵을 먹고 메밀똥을 싸게 될 것이라며 깔깔깔 웃었다. 온 마을이 똥골목이 될 거라 는 것이다. 메밀똥은 너무 소식이 급하기 때문에 개나 사람이나 똑같이 아무데나 싸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는 무성한 잎 뒤에 숨어 있던 감들이 발그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이 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누가 그랬는지 가지가 휘어지도록 커다랗게 열린 장두감들을 한입씩 만 베어먹어버린 것이다. 상처의 까만 딱지로 보아 한여름 풋감일 때부터 베어먹은 게 틀림 없었다. 완전히 익기 전에는 너무 떫기 때문에 그렇게 일일이 맛만 본 모양이었다. 제남이가 감의 새 상처를 발견할 때마다 발을 구르며 난리를 피웠지만 자고 일어나면 또 하나씩 늘어 나 있었다. 다찌니의 대추나무 역시 혹독한 가뭄 속에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었으나 사람 손이 닿을 만한 아래쪽은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름 내내 물을 퍼날라 주었던 다찌니 가 눈에 불을 켜고 지키면서 누구건 대추를 따먹다 들키는 날엔 죽도록 두들겨주겠다는 선 전포고까지 했는데도 빨간 대추열매들은 날마다 조금씩 키를 높여갔다. 무엇인가가 우리집 을 향해 그렇게 조금씩 키를 높여오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방학 동안 검은 차돌처럼 반질반질한 검은색으로 완전히 도색이 된 나는 태양의 장난 으로 돌연변이라도 되어버린 것처럼 식구들의 외면을 받게 되었다. 도대체 구제불능이라는 식이었다. 다찌니는 들개처럼 쏘다닌다고 아예 들개 불렀다. 제남이도 뽕! 소리보다 더 간단 히 들개! 해버렸다. 나는 정말 들개가 되어버린 것일까. 개학을 하면서 나는 이상한 혼란을 겪었다. 개학을 하 고 교실에서 처음으로 김명래와 마주친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녀 아녀! 하며 도리질을 했다. 여름방학 내내 김명래와 바다에서 놀았던 일들이 한꺼번에 떠오르고 빙 둘러선 아이 들이 손가락질하며 우하하하! 웃어젖힐 것만 같았던 것이다. 다행히 김명래도 나를 슬며시 외면했다. 나는 책상 너머 김한수를 바라보았다. 더욱 놀놀해지고 창백해진 김한수는 목의 천돌자리에 움푹 비가 고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더 야윈 김한수한테서는 멀리서도 마른 풀 향내가 맡아졌다. 김한수는 여름내 염소들의 겨울 먹이로 풀을 베고 꽃을 따서 말려놓았 을 것이었다. 한수가 그렇게 풀과 꽃을 따서 말려놓았을 것이었다. 한수가 그렇게 풀과 꽃을 베서 말리는 동안 나는 무얼 했던가를 생각하면 저절로 후회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나는 더 이상 김한수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그것 은 커다란 상실감이었다. 나는 김한수와 더불어 봄이면 진달래가 핏빛으로 어지럽고 가을이 면 보랏빛 들국화가 만발하다는 몰고리재의 향기도 함께 잃어버린 것 같았다. 송편이나 곶감 대추보다 더 기다린, 큰언니의 신랑감이 우리 집을 방문할 추석이 다가왔 다. 창호지야 물론 여름 모기장을 뜯어내고 해마다 탱글탱글하게 새로 바르는 거지만 이번 엔 방마다 나팔꽃 병아리꽃이 흐드러진 새 벽지로 도배도 했다. 첨성대처럼 돌벽으로 쌓은 안채 굴뚝은 우리 마을에서 가장 우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채 굴뚝은 옹기를 포개서 올 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비가 새고 구식인 그 옹기굴뚝을 허문 다음 신공법으로 만들었다는 덮개 붙은 콘크리트 일자 굴뚝을 사다가 하늘 높이 세웠다. 외양간과 돼지막도 청소를 깨끗 이 한 다음 새짚을 깔아주었고 닭장도 함석을 사다가 지붕을 새로 덮었다. 아버지는 아들들 을 데리고 잿등 야매집이 아닌, 벽 가득 거울이 붙은 장터거리 진짜 이발관에서 이발을 했 다. 비누냄새를 혐오하는 할머니는 보리쌀 삶은 물로 머리의 때를 빼고 헹구어서 동백기름 을 발라 곱게 빗었다. 언니들은 내 머리조차도 빨랫비누가 아닌 향기 나는 세숫비누로 감겨 주었다. 우리는 손님 맞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여자들보다 얼굴빛이 하얀 서울의 은행원도 까맣게 빛나는 머리를 단정하게 빗고 눈부시 게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 선희네 집을 찾아왔던 군인들보다 더 반짝이는 구두를 시고 우 리 집을 방문했다. 은행원은 머리를 미장원에서 '후까시'로 높게 올린 큰언니와 약혼 사진을 찍은 다음 언니 와 아주 친하게 되었다. 함께 읍내에 가서 극장 영화도 보고 대흥사도 구경한 다음에 비싼 중국요리를 먹고 막차로 돌아왔다. 약혼식복인 분홍색 공단으로 만든 차이나식 원피스를 입 고 파라솔을 든 언니는 눈부신 아름다움 때문에 대학도 나오고 서울 사람인 은행원에 대해 서 조금씩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은행원은 약혼식이 끝나는 즉시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처음 말과는 달리 지호기 선생님댁 에서 이틀을 더 묵었다. 은행원은 어린시절이 생각난다며 물수제비 뜨는 법도 가르쳐주었고 모래밭에서 우리에게 달리기를 시켜놓고 언니와 함께 응원하면서 환하게 웃기도 했다.종일 토록 흥분했던 제남이가 졸립다고 하자 겉양복은 벗어서 언니에게 맡기고 제남이를 집에까 지 업고 오기도 했다. 그리고 약간 곤란했던 것은 은행원이 나를 볼 때마다 너무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바람에 언니가 매번 변명을 늘어놓는 거였다. 내가 원래 그렇게 까만 게 아니 고 여름 햇빛에 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름 내내 태양빛에 흘렀었군요. 그만 까마귀가 되어버린 게." 내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은행원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빙그레 웃었다. 제남이가 나를 들 개라고 소개했다. 나는 제남이를 당장 죽여버리고 싶었으나 그보다 먼저 나 자신을 종이처 럼 구겨서 두엄자리에라도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렇게 낯선 타인에게 내 존재가 그렇게 여 실히 들통난다는 건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존재인지 나는 알 수 없는데 낯선 남은 다 알아버린 것 같은 아주 이상한 낭패감이었다. 어쨌건 은행원은 물방울무늬 원피스에 머리띠를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언니뿐 아니라 우리들도 아주 재밌어하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제남이는 대번에 매형이라 불렀고 나도 해 질녘쯤에는 형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밤에는 언니들과 편을 갈라 화투를 쳤다. 아버지는 편 히 놀라고 일찌감치 마실을 가버리고 시종 미소뿐이던 할머니까지 제남이를 억지로 끌고 일 찍 잠들어보리자 안방 화투판은 완전히 다찌니의 주무대가 되고 말았다. "초 뽕에 비!" "풍 자연뽕에 흑싸리!" 풍 석 장이 아니면서도 자연뽕이라고 속이면서 다 털어버리는가 하면 스톱을 하지 않고 고양이처럼 기다리다가 형부한테 된통 바가지를 씌웠다. 형부는 매번 손목이 벌겋게 부풀도 록 매를 맞으면서도 너무나 즐거운 얼굴이었고 다찌니의 속임수라면 뼛속까지 들여다 보는 큰언니지만 형부 앞에서 빡빡 우길 수가 없어 억울하지만 봐준다며 그냥 넘어가곤 했다. 나 는 뽕! 소리 때문에 내 별명이 들통날까봐 조마거렸지만 누군가 가서 자라는 말을 할까봐 그것이 더 많이 조마거렸다. 낮에 닭을 잡았던 엄마는 저녁에는 또 참을 먹으라며 약과와 함께 양념장을 묻혀 말린 고래포를 내놓았다. 늦은 밤 플래시를 들고 형부를 지호기 선생님 댁까지 바래다주고 온 오빠는 형제 많은 집에 장가 들게 된 것을 행운으로 생각한다는 형부 의 인사를 기분 좋게 전했다. 넥타이 하이칼라의 너무나 멋있는 서울 사람을 형부로 맞이하게 될 나는 아차 하면서 이 성에 대한 가치관을 대번에 바꾸고 말았다. 김명래는 물론 김한수도 어차피 내 짝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커서 큰언니처럼 서울사람에게 시집을 가야겠다고 굳게 결심을 했다. 서울. 서울에는 옛날 임금님이 살던 궁궐이 있고 '오빠 생각' 의 노랫말처럼 비단구두를 파는 것이 있고 또 우리 시찌니가 다니는 엄청나게 큰 대학교가 있고 전차가 다니고 사람들이 유리창 달린 양옥집에서 살고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뼈빠지게 농사를 짓지 않아도 책상에 앉아 펜대만 굴리면 회사에서 돈이 나와 맛있는 것만 사먹고 일은 다 식모나 비서가 하고 여자들은 높은 삐딱구두에 파라솔을 들고 창경원이나 남산으로 나들이나 다니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사흘이건 나흘이건 서울에만 다녀왔다 하면 그 어마어마한 곳을 한꺼번에 설명할 길이 없어 '그랬더랬어요 저랬더랬어요' 하고 말투만 달콤새콤 간드러 지게 변해버리지 않던가. 나도 커서 그곳의 일원이 되리라 생각하니 인생이 그다지 지루하 지만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추석 닷새가 끝나기도 전이었다. "저나마 벼포기 몇 개씩 서 있는 거 멸구떼가 달라붙어 난릴세." 형부가 다시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팔꿈치와 종아리가 돌돌 말린 헌옷을 찾아입고 새벌을 다 녀온 아버지가 헛간벽으로 삽자루를 휙 던져버렸다. "멸구라우? 원삼 족도리 다 벗어놓고 하얀 속옷만 입은 새각시 신방 같은 천지에 뭔 급살 맞을 멸구떼가 다 생겼으까? 이래저래 사람을 기어이 잡아묵을란갑다." 엄마가 기운 헤지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여름 내내 불볕이 튀는 들판에서 등허리가 휘어 지도록 샘을 파고 집수정을 만들어 겨우겨우 살려놓은 벼에 멸구떼가 생겼다는 것이다. "또 멸구 잡으러 총동원되겄구마. 못 살아. 나도 순영이 언니같이 집이나 나가부러야제, 정말 못 살아!" "가시낭년 어른들 앞에서 하는 소리 잠 봐라, 뭐, 못 살아? 순영이같이 집을 나가? 그래 가뭄에 흉년이라고 네년들이 밥을 굶었냐 옷을 벗었냐? 밤보따리만 쌌단 봐라. 어느 년이건 우리 눈에 흙 들어가기 전까진 집구석에 발도 못들여놓을 테니!" 할머니가 나서기 전에 주먹을 흔들며 잡도리하던 엄마가 제풀에 열을 받아 급기야 다찌니 의 등짝까지 내갈겼다.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얻어맞은 다찌니가 눈을 하얗게 뜨면서 발을 굴렀다. 벼멸구는 어디선가 출몰했다 하면 너무나 급속히 번식을 해버리기 때문에 발견한 즉시 조 치를 취해야만 여름내 무성히 자란 벼포기를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멸구만 나타났 다 하면 온식구가 총동원되어 물 잡은 논에다 기름을 붓고 벼포기마다 바가지로 기름을 끼 얹어주었다. 농약을 쳐버리면 간단한 일이지만 농약은 값도 비싸려니와 이삭이 패버린 벼에 독약을 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 자란 벼포기는 뻣세고 거칠어서 멸구를 잡고 나면 식구 들의 팔다리는 물론 얼굴까지 수많은 빗금상처가 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언니들은 멸구 말 만 들어도 이를 갈고 엄마랑 아버지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엄마는 달래 고 구슬려서 손을 빌려야 할 다찌니한테 필요 이상 화를 내고 엄포를 놓으며 때리기까지 하 는 것이었다. "아야 순영이믄 아리대미 이대갈네, 아니 이학씨네 막내딸 말이냐?" "야." "이학씨네도 드디어 망쪼가 드러나는구나.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집을 나가다니!" 기어이 문짝을 열어젖힌 할머니가 탄식했다. "오래비 약값 벌어오겄다고 편지 써놓고 나갔다요." "홍도가 환생했등갑다. 뜻은 가상하다만 세상이 그렇게 지맘대로 호락호락하다더냐. 말세 가 되아서 그런가 요새 아이들은 종자가 달라서 그런가 어째 처녀애들까장 겁대가리가 없어 갖고 즈그 맘대로 집구석을 들랑날랑, 망쪼다, 세상이 망쪼여!" 할머니는 더욱 큰소리로 탄식했다. 한번 상처를 주었던 니찌니와 항상 바람 부는 쪽으로 얼굴을 디미는 다찌니를 단속하기 위해서였다. 송편 대신 차례에 올렸던 밀개떡을 싸들고 거멍숲으로 그네 뛰러 갔던 처녀들이 그만 종적을 감췄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고 있었던 것이다. 엉덩이까지 땋아내린 댕기머리를 싹둑 잘라놓고는 친구들과 작당을 해서 서울 부산 대구 등지로 가출을 해버린 것이었다. 가설극장 영화의 첫머리 '대한뉴스' 때마다 박정희 대 통령이 부르짖는 '경제개발오개년계획' 에 맞춰 비춰주는 커다란 공장들이 서 있는 대도시로 돈벌이하러 떠나버린 것이다. 바람이 나서 부모 몰래 나가는 처녀들도 있고, 먹을 것이 없어 서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과년한 딸을 일부러 보내는 부모도 있었다. 바람이 나서건 등을 떠밀려서건 처녀가 집을 나가는 건 집안에 망조가 들었다는 징조였다. 어떤 이유건 누구건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마을을 떠난다는 건 뿌리를 뽑히는, 근본을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데 이름자를 내놓고 산다는 아리대미의 유일한 기와집네서도 딸이 집을 나갔다는 거였다. 순영이 언니가 색소폰 아저씨의 약값을 벌기 위해 집을 나간 사실은 마을의 충격이었다. 순영이 언니는 집안이 민대갈네로 불리는 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는, 말수가 적은 아주 얌전 한 처녀였다. 까만 다우다로 만든 타이트한 월남치마에서 퍽퍽 소리가 나도록 열심히 골목 을 내려와서 우리 언니들의 수본이나 책을 빌려가곤 했었다. 색소폰 아저씨네 아버지가 일 제시대 땐 면장도 지냈고 잘살았기 때문에 어렸을 땐 아주 귀하게 자랐다고 했다. 그런데 시집을 가야 할 과년한 나이에 돈을 벌겠다고 집을 나갔다는 거였다. "콩도 서숙도 제철에 촉촉한 땅에서 싹이 나고 자라야 불속에서 여물제만 메밀이사 철을 놓치고 마른땅에 심어도 수확은 본께 그랬제라." "아 글씨 어쨌든간에 벼가 노랗게 패야 헐 때 천지가 보름달 자정 넘어가는 것맨치로 허 여끄름 뽀얀께로 낮이나 밤이나 싱숭생숭 지집년들이 요상해져갖고 집구석을 나가네 마네 하제! 망쪼다 망쪼여." 가뭄도 멸구도 별로 겁내지 않는 할머니가 처녀들의 가출만큼은 그렇게도 충격인지 하루 종일 그 얘기뿐이었다. 영화에서 본 대도시의 공장들은 전깃불로 밝고 환했으며 하늘색 유 니폼에 스카프를 쓴 직공들은 얼굴이 하얀 게 그야말로 베짜는 선녀들 같앗다. 여름 땡볕이 나 발이 푹푹 빠지는 무논이나 찬바람이 살을 에는 보리밭에서의 거친 노동과는 근본적으로 질이 다른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나 다름없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러나 초저녁 잠이 많은 할머 니는 공짜 반공영화만 두 번밖에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집을 떠난 이상 고대광실에서 묵어도 그것은 노예의 삶일 수밖에 없다고 우겼다. 아버지는 논에 물이 없기 때문에 사천 하구에서 모래를 실어다 기름을 섞어 뿌리기로 했 다. 너무 진 뻘땅에 모래 복토도 하고 멸구도 잡는 일석이조의 일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수걸이와 오빠는 잿등 아짐네와 주만이 아저씨네 리어카까지 빌려다 실어날랐고 우리는 각 자 자기 힘에 맞는 짚거렁이 소쿠리 세수대야로 퍼날랐다. 천지는 꿈속인 것처럼 새하얀 떡가루로 뒤덮여 서늘하게 잠겨 있는데 우리 식구들만 구슬 땀을 흘리며 개미들처럼 줄을 지어 똑같은 길을 수없이 왔다갔다했다. 어른들은 누구나 아 이들이 안쓰러워 논둑길에서 부딪칠 때마다 격려의 말을 건넸고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힘이 절로 났다. 기름물은 엎드려서 끼얹어야 하지만 기름모래는 꼿 꼿이 서서 다니며 뿌리기 때문에 언니들은 빗금상처 없이 일을 치렀다. 우리는 이틀 만에 벼가 서 있는 스무 마지기 논의 멸구를 다 잡았다. 과연 위기에 처할 때마다 발휘되는 우리 가족의 단결심은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한시름을 놓게 된 엄마는 본격적으로 큰언니의 결혼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가뭄에 결혼했다는 것이 행여 큰언니의 인생에 틈을 만들까봐, 또는 시댁 사람들에게 털끝만큼이라 도 흉을 보일까봐 만사를 살얼음 밟듯 조심하면서 엄마는 차곡차곡 서둘렀다. 구름처럼 푹 신하게 솜을 켜서 눈이 시리도록 바래진 광목으로 싸고 금실로 봉황이 수놓인 겉껍질을 입 혀 이불을 만들었다. 엄마는 손수 짜놓은 명주 비단을 펼쳐놓고 신랑 키와 비슷해 보이는 마을 청년을 데려다 바지 저고리 길이를 맞추기도 했다. 큰언니가 입을 '반짝이' 라는 옷감 에는 모두 금실이나 은실 무늬가 들어 있었다. 불빛에 펼치면 은하수가 내려온 것처럼 별빛 이 무더기졌다. 서울 사람들은 까다롭기 때문에 언니는 바느질 솜씨 하나에도 온 신경을 썼 다. 할머니까지도 큰언니를 위한 것이라면 털끝 하나라도 흠이 없게 하려고 기를 썼다. 할머 니는 급기야 보리밥에 쌀을 한줌 더 얹으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이제 집을 떠날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보리밥만 먹였다간 두고두고 눈물을 흘리게 될까봐서라는 것이었다. 언니는 그 야말로 내 눈앞에 실제하는 동화 속의 공주, 금쪽 그 자체였다. 시집을 간다는 건 정말로 어 마어마한 축복을 받는 일이었다. 큰언니는 변신도 하지 않고 내 눈앞에서 실제 모습 그대로 신데렐라가 되어버렸다. 나도 어서 커서 시집을 가고 싶었다. 내가 자라야 할 햇수는 열 손가락으론 다 셀 수 없 는 어마어마한 세월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멀고 길었지만 내가 자라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 한 세월일 것이었다. 멀고 지루하지만 나는 희망을 가지기로 했다. 나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동안에도 쑥쑥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쑥쑥 자라고 있다는 증거는 옷이었다. 봄에도 짧았던 옷들은 가을이 되자 이미 꿸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큰언니는 바쁜 중에도 시집가기 전에 내 옷들을 지어놓아야겠다며 엄 마를 설득해서 천을 끊어오게 했다. 하늘색 테트론으론 까만 줄이 들어간 세일러복 원피스 를 만들고 단풍무늬가 있는 겨자색 코르덴으론 스탠드 칼라의 원피스를 만들었다. 특히 코 르덴 원피스는 '간딴나꾸' 라 불리는 자루옷이 아닌 알프스 소녀처럼 치마주름이 풍성하고 등뒤로 길게 나비끈을 묶는 아주 우아한 것이었다. 엉덩이보다 배가 더 나왔다며 다찌니가 내 체형을 비아냥거렸고 겨자색 원피스를 제남이가 기어이 똥색 원피스라고 우겨서 설왕설 래는 많았다. 하지만 나는 굉장히 행복했다. 나는 어쩌면 올 가을에 있을 시제마당에 따라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작년엔 따라가겠다고 사흘 전부터 울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중에 입고 갈 옷이 마땅찮다는 사실만큼은 나도 수긍을 했던 것이다. 몇차례 껍질을 벗은 얼굴은 새살 이 돋아 뽀얗게 되었고 새 옷도 얻게 된 나는 제법 자신감이 생겨났다. 사실 내게 중요한 것은 시제라는 가문의 행사보다도 차례상에 쓰이는 유자였다. 오빠나 제남이가 아버지를 따라 시제를 다녀오면 받아오는 게 꼭 한가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유자 였다. 유자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이상한 매력을 가진 과일이었다. 쓰고 떫고 시어 서 쓸모라곤 없었지만 이 세상 만물과 자신의 존재를 확연히 구분지어버리는 독특한 향내가 있었다. 그래서 시제사엔 빠지지 않았다. 유자는 바로 시제사의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먹을 수도 없는 그 독특한 향내를 발하곤 했다. 그것의 소유주들은 가문의 행사에 참여했던 영광 을 그렇게 오래도록 누렸던 것이다.. 그러나 좋은 일은 잠시였다. 큰언니의 결혼식 준비 때문에 우리 집은 가을걷이를 서둘렀다. 일찍 거둔 콩대를 마당 가 득 널어놓고 할머니는 날마다 구석자리 멍석에서 혼자 깨를 털거나 말려두었던 쑥잎을 바수 거나 찹쌀풀에 적신 들깨 대궁이를 손질하거나 했다. 큰언니도 물감으로 쓸 치자열매와 맨 드라미, 잇꽃 등을 손질했다. 날만 새면 우리 식구들은 모두 자기 담당의 일을 찾아서 언제 나 쉬지 않고 끊임없이 무슨 일인가를 했다. 나는 담밑에 자라던 꽈리를 따다가 꼭지 자리의 술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탱 자가시로 속을 파냈다. 술이 튼튼해야만 이 사이에 넣고 불어도 꽈르르 꽈르르 둥근 소리가 나고 오래 가기 때문이었다. "행남아." 내가 너무 열중해 있어서인지 큰언니가 웃으면서 불렀다. "나는 우리 암소가 거기 앉아 있는 줄 알았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나한테도 들리는 니 숨소리가 왜 너한테는 안 들리까? 항상 자기 숨소리를 들어야 자기 마음을 알고 남의 마음 도 아는 것인디 응? 가서 코 풀고 숨 좀 이쁘게 조용히 쉼서 해라." "야." 큰언니는 절대로 비아냥거리는 법이 없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편 이었다. 큰언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콩대들을 짓밟으며 두엄자리로 뛰어가 휭 코를 풀어서 힘껏 던졌다. 그런데 순간 등뒤에서 이런! 하는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멀리서 지나가기만 해도 저절로 오금이 저리는 순경 하나와 웬 양복차림 아저씨 하나가 대 문을 들어서려다 말고 바짓가랑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내던진 코가 양복쟁이 바짓가 랑이에 가서 찰싹 달라붙은 모양이었다. "오메 어짠다냐! 저누무 가시낭년이 이녁 집 찾아오신 노무 어른들한테, 이것이 대체 뭔 일이다냐아!" 어느새 보았는지 혼비백산한 할머니가 머릿수건을 벗어들고 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썩 썩 비는 시늉으로 양복쟁이의 바짓가랑이를 닦아냈다. "서로간에 재수가 없었는갑소. 철없는 아아가 부러 한 짓은 아닌께 아자씨 용서하시씨요 이? 비싼 바지는 우리 큰아 시케서 제대로 손질해드리께라." "닦아냈으믄 됐제라. 그나저나 이 댁에 이귀엽씨라고 있으믄 빨리 나오락 하시오. 서까지 잠 갈이 있은께로" "뭔 일인디 순사님까장 직접 나오셌어라.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이 없는디라." "000000000000여기가 조낙천씨댁이 아닙니까? 조낙천씨 안사람 이귀엽씨를 좀 델러 왔는 디요." "오메오메 그라고 봉께 우리 메늘아 이름이 이기엡이 맞어라. 그란디 세상천지에 법 없이 도 사는 우리 메늘아는 뭣 땀시라, 뭣 땀시그라요, 야?" "잠깐 가서 조사만 할 것인께 빨리 나오락 하시오" 순경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옆으로 침을 뱉는데 마침 빨간 고추를 한짐 따서 머리에 인 엄 마가 대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순간 수건으로 무릎을 치며 발끈 꼽발을 딛던 할머니가 엄마 를 가로막았다. "어이 잿등네 큰일났네. 순사들이 뭣 땀시 우리 메늘아를 찾네. 그거 여기 내려놓고 핑 우 두뫼 우리 밭에 잠 댕겨오게. 가서 우리 메늘아 잠 델고 오게." "우두뫼요? 우두뫼 어디껜지 갈쳐주기만 하시오. 우리가 직접 갈팅게." 졸지에 잿등 아짐 취급을 받은데다 순경이 자기를 찾는다는 말에 엄마는 날벼락이라도 맞 은 사람처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런 엄마 곁으로 순경이 바싹 다가섰다. 질세라 할머 니도 바싹 다가가 순경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아니 아니라 그럴 것 없이 아주 나랑 같이 갑시다. 나도 뭔 일인지 알어야 쓰겄은께라." 수건을 털어 쓴 할머니가 단호하게 말하며 앞장서자 마지못한 듯 순경은 따라나섰고 양복 쟁이도 엄마를 한번 돌아보며 따라나섰다. 머리에 고추 짐을 인 채로 그들을 한없이 바라보 던 엄마가 후다닥 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길로 대문을 뛰쳐나갔다. 그날 이장 부인과 더불어 마을 부인들이 일곱 명이나 장터거리 지서로 붙잡혀갔다는 소문 이나돌았다. 그속에는 내 친구인 미란이와 분옥이와 복덕이네 엄마도 끼여 있었다. 복덕이네 엄마는 빨래 푸새질을 하다가 붙들려갔고 미란이네 엄마와 분옥이네 엄마는 갯가로 김칫거 리를 씻으러 갔는데 분옥이 동생 분철이가 순경과 형사한테 자랑스레 안내해줘서 잡혀갔다 고 했다. 지난 여름 내내 마을 여자들이 작당을 해서 청오산에 있는 남의 무덤들을 모조리 파내버 렸다고 했다. 추석 성묘를 왔던 서울 사람들이 그 현장을 보고 분노를 해서 소송을 걸었다 는 것이다. 우리 마을뿐 아니라 해송 영춘 마석 현리 종일, 마을마다 여자들이 잡혀가 지서 숙직실에서 자고 다음날 읍내 경찰서 유치장으로 넘겨졌다는 소문이었다. 유치장으로 넘어 간 이상 쉽게 풀려날 수 없으리라고 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웅성웅성 온 고을이 망하려나 보다고 수군거렸다. "살다 살다 벨일을 다 보겄소. 사십년 칠십년 만의 가뭄으론 모자라 다 큰 처녀들이 집을 안 나가는가, 내외하는 부인네들이 소송에를 안 걸리나. 뭔 이런 누무 세상이 다 있으까라." "글씨, 일제 때 정신대다 뭐다 해서 처녀 공출이 있긴 했어도 울매불매 억을하게 끌려가 면 갔제 지 발로 나가는 법 없었고, 동란 때 수인네들이 울력이다 부역이다 불려댕김시로 험한 일은 겪었어도 이렇게 무더기로 잽혀가기까지는 안했는디 참말 자다가 눈알 빠질 일이 따로 없네." 앞 뒤 옆으로 세 개 면에 걸쳐 있는 청오산은 주인이 따고 없는, 그냥 태곳적부터 하늘이 이 고을 사람들에게 내려준 공동의 산이었다. 그래서 병든 사람들은 누구의 허락받을 필요 없이 청오산으로 들어가 옻이나 느릅나무의 뿌리 껍질을 캐다 다려먹고 봄이면 너도 나도 올라가서 화전놀이도 하고 나물을 캐다 먹기도 하고 팔기도 하고 여름에 땀띠가 많이 난 사 람은 계곡을 찾아가 씻기도 하고 조그만 폭포수의 찬물을 맞기도 했다. 꽃 따러 다니는 처 녀들을 쫓아서 총각들도 무수히 오르내렸고 겨울이면 작당을 해서 토끼몰이도 다녔다. 청오산은 그렇게 사람들과 친근한 산이면서 또한 신성한 산이기도 했다. 유사시엔 봉화가 무수히 올랐으며 지금도 고을 어른들이 제복을 입고 기우제를 모시는 그런 산이었다. 그래 서 이 고을에는 그렇게 하늘 가까운 신성한 산 위, 그러니까 중턱 이상에는 묘를 쓰면 안된 다는 불문율이 전해내려오고 있었다. 신성한 산에 더러운 묘를 쓰게 되면 하늘이 노해서 자 연재해가 잇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년째 계속되는 가뭄을 견디다 못해 마을마다 여자들이 호미를 들고 올라가서 묘를 파내렸다고 했다. 그 내력을 알면서도 청오산에 묘를 썼다면 그것은 필시 도둑묘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여름 내내 새벽같이 집을 나갔다가 녹초가 되어 돌아오곤 하던 엄마는 그러니까 바로 청 오산의 묘를 파내리러 다녔던 것이다. 여자들은 남의 조상묘를 함부로 파묘한 '분묘발굴죄' 뿐 아니라 사유재산 침해죄라는 덤터 기까지 쓰게 되었다. 청오산이 바로 묘 주인인 서울 사람의 사유재산이라는 것이다. 이 고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청오산이 생면부지인 어느 개인의 소유물이 되어버렸던 것이 다. 사람들은 청오산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서울 사람은 2대째 국회의원을 지낸 어마어마하게 힘이 센 사람이라고 했다. 그 힘센 사람을 의지해서 다른 묘 주인들도 전부 들고일어났다. 높은 산에 도둑묘를 써놓 고 숨을 죽였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당당한 피해자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 길로 집을 나간 엄마는 큰언니의 결혼준비며 가을걷이를 버려둔 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가 어디로 갔는지 물어보면 안된다는 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다만 그 다음 날 오빠가 외갓집이 있는 현리를 다녀왔고 며칠 후 이모할머니댁이 있는 대섬에서 사람이 다녀갔다. 엄마는 일단 현리고 갔다가 이번 사건과 관련이 없고 훨씬 먼 대섬으로 옮겨간 것 같았다. 대섬의 섬 임자인 이모할머니는 아버지를 친자식처럼 아꼈다. 아버지도 이모할머니댁의 생일이나 기제사 때마다 잊지 않고 찾아 다녔다. 외갓집만큼은 못하겠지만 엄마도 그런대로 지낼 수 있을 거였다. 할머니와 지호기 선생님은 큰언니의 결혼식을 늦가을에서 다음해 이른봄으로 연기하자고 서로 의견을 맞추었다. 천지를 하얗게 뒤덮던 메밀이 밤갈색으로 여물었으나 사람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낫으로 베어 여기저기 벼늘을 쌓아 놓아도 훔쳐가는 사람도 없었지만 우리 집에서는 옷감이 없어졌다. 큰언니의 혼수물인 공단이며 호박단 숙고사 반짝이 등 한복 옷감들이 보따리째 없어진 것이다. 도둑을 맞고도 우리 식구들은 소문나지 않게 하려고 쉬쉬했다. 엄마의 사건 때문에 일이 복잡해지는 걸 막기도 해야 했지만 언니의 결혼준비에 또다른 탈이 붙었다는 소문을 막기 위해서였다. 오빠가 이마에 주름살을 모으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오빠는 태어나서부터 언니들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 때문이었다. 할머니 는 한참 자라는 언니들이 먹는 것이나 쓰는 것을 가지고 억세게 굴 때마다 우리 용남이 것 을 저년들이 다 처먹는다, 다 써버린다, 하면서 이 아무짝에도 쓸데없이 살림만 축내는 밥도 둑년들아! 노골적으로 욕을 했다. 언니들은 으레 그러려니 귓등으로 흘렸지만 오빠만큼은 언제나 절실하게 공감하는 듯했다. 아버지처럼 말수가 없으면서도 할머니 표현대로 하면 속 이 너무나 깊은 오빠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어깨에 지워진 가문의 짐을 충분히 인식 하고 있었다. 그래서 철없는 언니들이 함부로 나대거나 서툰 짓을 하면 오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손위 누나들에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동생한테 뒤통수를 맞은 언니들은 단순하게 그게 억울하고 분통해서 날뛰었지만 그럴수록 오빠는 절대로 옳은 소리만 하기 때문에 할머 니로부터 속이 실겁다거나 오져 죽겠다는 칭찬만 받았다. 아마 오빠가 눈살을 찌푸리기 시작한 것은 큰언니가 시집갈 때 가지고 갈 책을 고르면서 부터였을 것이다. 혼수품으로 사온 재봉틀을 넣으려고 판자로 상자를 짰는데 재봉틀이 흔들 리지 않도록 사이사이 책을 끼워넣었다. 큰언니는 시골 출신이라는 약점을 만회할 방법으로 자신의 독서량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빠는 마루 선반에 줄줄이 꽂힌 책 들을 우리 집안의 지적 수준을 받쳐주는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다. 오빠는 그것들을 전부 고 스란히 지켜야 할 의무라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빠는 계속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옷 감을 도둑맞은 사건에 대해서도 오빠만 생각이 달랐다. 한번 샀는데 없어졌다고 또 사야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오빠는 자신이 기어이 찾아내겠다고 장담까지 했다. 이제 중학생일 뿐인 오빠와 큰언니는 급격히 사이가 나빠졌다. 열살이나 손위인 누나에게도 함부로 눈을 부라릴 수 있는 오빠의 특권의식은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우리 집 식구들의 서열을 굳이 따진다면 오빠는 엄마보다 윗자리인 세 번째쯤 일 것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를 동등한 자리에 놓는다면 두 번째쯤으로. 우리 집에선 어른인 엄마보다 이제 중학생일 뿐인 오빠가 더 존대받았다. 왜냐하면 오빠는 우리 집안의 장손이 니까. 엄마는 물론 엄마 스스로 기꺼이 조씨네 장손인 오빠의 뒷자리로 물러났다. 그것이 바 로 우리 집안의 규범이고 체제이기 때문이었다. 어릴 땐 아버지를 섬기고 출가해선 남편을 섬기며 늙어선 자식을 섬겨야 할 유교적 여자의 운명이 바로 엄마의 생존 이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엄마와 오빠의 관계뿐이었다면 어째도 좋았을 것이다. 쓸데없이 여자로 태어난 언니들이 문제였다. 머리통이 다 큰 누나들이 까마득한 동생으로 부터 속없다, 집안 생각은 않는다 따위 눈을 부릅뜬 꾸중을 듣는다고 생각해보라. 더구나 할 머니 방에서 기거하며 할머니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배우고 할머니의 말투까지 곧잘 흉내내 는 제남이마저 나는 물론 언니들한테 나무라는 투로 말을 한다면. 엄마는 그럴 때마다 누나 들한테 그러는 법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조심성 없는 다찌니가 빨려고 벗어놓은 오빠 옷이 라도 딛고 넘어가면 그 자리에서 죽도록 욕을 먹었다. '가시낭년이 재수없이 사내자식 옷을 넘는다' 는 것이다. 그때 제남이가 혀라도 날름 하는 날엔 다찌니는 천장만장 날뛰다가 기어 이 아버지나 할머니한테까지 혼나곤 했다. 버둥거려봐야 발만 더 빠지는 뻘밭인 게 바로 우 리 집이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아들로 태어나주지 못한 죄가 너무나 컸다. 남자 우선인 우 리 집의 위계질서는 그래서 가끔 위태로울 때가 있었다. 아직 무성한 잎새 틈으로 대추와 감의 붉은빛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제남이와 다찌니의 정성으로 감나무와 대추나무는 제법 물맛을 본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날 마당을 서성거리던 할머니가 번쩍 손을 들더니 감나무와 대추나무를 번갈아 가리키며 추상같이 명령했다. "저노무 것 감이건 대추건 다 따부러라. 지금 당장! 저노무 벌건색, 못 묵어서 부황든 동 네 사람들 환장할라. 아니 가문 하늘에 홧병 지를라. 당장!"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할머니의 느닷없는 명령에 우리는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수호신처럼 오랜 세월 동안 길흉사를 감지하고 집안을 보호해온 할머니의 명령에 이의를 게 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마다 첫눈 올 때까지 불타는 것처럼, 불을 퍼부어놓은 노을처 럼 높은 하늘을 색칠하던 감들을 그늘진 부분은 아직 새파란채 전부 따내려지고 말았다. 그 리고 상처가 있는 감들은 골라서 전부 뒷방것 또딸이에게 건네주었다. 엄마가 없어서 확인 할 길은 없었지만 우리는 모두 그것이 또딸이 짓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돌림병이나 부정의 흔적 같은 베어먹힌 자국의 불길함은 그래서 또딸이에게 떠넘겨지게 되었다. 올해 수확한 삼분의 일 정도가 뒷방것 또딸이의 몫이 되었다. 잇따른 사고와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때문에 할머니의 촉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할머니 는 걸음걸이조차도 물위를 걷는 소금쟁이처럼 아주 조심했다. 분묘발굴죄로 붙들려간 사람들은 광주경찰서 유치장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골목에서 만나 는 사람들마다 추수가 끝나고 찬바람이 불기 전까지 그들이 풀려날 수 있을지를 물었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잡혀간 사람들도 고생이지만 졸지에 안주인을 잃은 가족들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다. 매일 추수는 하나마나 제쳐둔 해 버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모르는 길을 물어 물어 면회를 다녔 다. 고리채를 얻고 시어머니 비녀를 팔고 어렵게 경비를 마련해서 빈 속에 혼이 다 빠져버 릴 것 같은 멀미를 앓으며 새벽차로 가서 기다리면 뒤늦게야 면회가 허락되는데 이녁 당신 임자 하면서 울음보를 터뜨리다 보면 몇마디 이야기를 나누기도 전에 간수가 나타나서 시간 이 다 되었다고 끌고 가버린다는 거였다. 면회를 다녀오면 마을 사람들은 전부 그 집으로 몰려들었다. 돌아가는 사정이나 새로운 소식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면 그 집 할머니나 친 척 부인들이 서둘러서 울음잔치를 한바탕 벌인 다음 별 새로울 것 없는 면회 이야기를 띄엄 띄엄 늘어 놓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며 밤을 새우다 돌아왔다. 전통적 인 위로의 방법이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빚으로 집이나 문전옥답을 내놓은 집들이 생겼다. 할머니가 발휘 한 순간적인 기지로 우리 엄마는 안전했지만 엄마가 없는 우리 집도 그리 평안치만은 않았 다. 누구보다 아버지가 가장 힘이 없어 보였고 우리도 풀이 죽어 지냈다. 추수는 끝났지만 수확량은 예년 오분의 일도 못 되었다. 더욱 말수가 없어진데다 밥맛마저 잃은 아버지가 막 걸리로 끼니를 때우자 할머니는 더욱 극성스럽게 언니들을 닦달했고 언니들도 긴장이 되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언니들은 엄마의 자리를 메우려고 있는 힘을 다했고 우리도 서로 눈치를 보며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최대한으로 노력했다. 시제일이 닥쳐오자 아버지는 다시 활기를 찾는 것 같았다. 나는 온갖 노력을 다했다. 밥상 머리에서 나도 올 시제에 기어이 따라가고 말겠다는 선포를 한 다음부턴 억울하거나 서러운 일이 생겨도 꿀꺽 삼켰고 무슨 일에나 고분고분, 아버지는 물론 가족들의 좋은 평판을 얻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했다. '거기가 어디라고 가시나가 별쭝나게 나선다' 는 할머니의 나무람 때문에 옥신각신하다가 울음보를 터뜨리긴 했지만 그것이 되레 전화위복이 되어 아버지도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올해는 나만 데리고 가기로 한 것이다. 나는 더욱 열심히 할머니의 요강을 씻고 식구들의 고무신을 깨끗이 닦았다. 그날의 흥분을 다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 집이 생기고 딸로서는 처음으로 내가 시제마당에 참여를 하게 된 것이다. 머리를 쫑쫑 땋아서 뒤꼭지에 동그랗게 튼 다음 하늘색 살양말에 겨자색 코르덴 원피스를 입고 새벽밥을 먹으라는데도 흥분 때문에 한 숟갈도 넘기 지 못한 채 나는 길을 나섰다. 아직 어둠이 물러가기 전 청오산은 희붐한 능선만 드러내고 무서리 진 들판의 찬 공기가 옷 속으로 파고 드는데 성큼성큼 걸어가는 키 큰 아버지는 너 무나 위대해보였고 오대조의 시제사에 참여하게 된 나는 이 세상의 더없이 존귀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새벽 첫차를 타기까지 나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고통은 멀미였다. 3학년 때 동화구연대회에 나가느라 읍내까지 차를 타 본 적은 있지만 이번 여행은 그 세 배나 되는 거리였다. 그리고 나도 그때보다 세 배나 흥 분된 상태였다. 나는 그때까지 시제사를 온 고을이 북적거리는 대단위 행사나 떠들썩한 잔 치쯤으로 상상했던 것 같다. 아버지의 가문에 대한 끝없는 긍지와 침이 마르지 않는 자랑 때문이었다. 월출산 줄기 야트막한 야산의 슬렁재라는 곳을 넘어가자 수십 마리의 학이 날아와 군집한 것처럼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과연 많이 모여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1km쯤 슬렁재를 넘는 동안 계속 어지럼증으로 휘청거리던 나는 그러나 산소마당에 들어선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 같은 이상한 충격으로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이 단 한명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내 또래뿐 아니라 내 위또래도 여자 아이들은 단 한명도 눈 에 띄지 않았다. 음식을 장만해온 제지기 아낙들과 그의 어린 딸들이 산소마당 구석지에 몰 려 있고 가까운 곳에 사는 몇몇 집 어린 딸들이 코밑에 떡고물을 묻힌 채 히죽거리며 돌아 다닐 뿐이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제대로 차려입고 정식으로 제사에 참석한 사람은 거의 백 프로 남자들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딸에 대한 극심한 편견이 삼대 독자로 어렵게 대를 이어온 우리 집의 조건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왜 그랬는지 나는 지세마당에 가면 하이디나 클라라나 소공녀처럼 딸로서도 얼마든지 소중한 존재들이 나처럼 새옷을 차려입고 부모들의 극진한 보호를 받으 며 몰려와 있을 줄로 상상했던 것이다. 불철주야로 그리며 먼길을 찾아온 아버지도 그렇게 환대받는 중요한 입장이 아닌 것 같고 나는 남자들뿐인 마당 어디쯤에 서 있어야 할지 내 존재가 그렇게 거추장스러울 수가 없었 다. 급기야 한 조각 떼어먹은 시루떡이 가슴에 걸려 신물까지 토하고 보니 유자고 뭐고 나 는 그만 시제사라면 오만 정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로 재수없는 일이었다. 재작년 사라호 태풍 때 바다로 태풍 구경간 일이 있었다. 바다가 성이 나서 거꾸로 솟는다는 것이다. 바다가 거꾸로 솟다니. 나 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집집마다 울타리 감나무가 넘어지고 지붕이 날아가고 논둑마다 허물어져 벼들이 쓰러지고 길이 끊어지는가 하면 물에 떠내려가는 돼지를 잡으려다 어른이 실종되는 그 어마어마한 재난에 바다도 그만 성을 내고 잇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줄 을 지어 가는 곳은 큰벌이 아닌 거멍다리 쪽이었다. 일제 때 일본인들이 쌀을 공출해가기 위해 대대적인 공사로 만들었다는 거멍다리의 긴 난간에 사람들이 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큰 물은 정말로 처음 보았다. 폭이 넓어진 사천 하구는 그야 말로 바다같았다. 거멍다리에 곧 닿을 듯한 높이로 하구 가득 그야말로 큰물이 거센 물살로 흘러내리는 거였다. 거의 황토빛인 물살엔 돼지 호박 요강 나무등걸 바지게 옷가지들이 되는대로 휩쓸리며 떠 내려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건져 내려고 막대기를 휘젓고 그물을 던지는가 하면 물속에 뛰어들었다가 몇 발자국을 못 나가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사람이 떠내려갔다고 한 떼의 사람들이 사천둑을 따라 몰려왔다가 발을 뻗고 우는 사람만 떠메고 돌아가기도 했다. 거멍다리에 매달린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발을 구르고 손가락질하고 고개를 뻗대며 다리를 왔 다갔다 탄성을 질러댔다. 그 흥분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집에 돌아온 나는 그러나 엄마한테 죽도록 혼이 났다. 이 유는 단 하나 '가시나가 돼가지고 왜 물난리 같은 것에 관심을 가지느냐' 는 거였다. 혼이 나면서도 답답했던 것은 엄마가 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이나 관심 또는 어떤 욕구 자체를 나무란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자고로 주어진 것 외에는 관심도 갖지 말아야 팔자가 순탄한 법이며 욕구가 일어나더라도 국으로 찍어 누르고 다스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왈패, 왈가닥, 청오산 반란군' 하며 얼마나 두고두고 혼이 났던지 나는 내 그 불 같 은 호기심을 다 저주할 정도였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어 졸 때마다 어서 커서 집을 떠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여자에 대 한 그 지독한 편견은 우리 집이나 우리 마을만의 별난 특징이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은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사의 오랜 규범이고 이념이며 체제인지도 알 수 없었 다. 그렇다면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말 그대로 재난이었다. 평생을 통해서 치러야 할 천형인 것이다. 시제마당에서 얻어온 가지 달린 유자는 안방 사진틀 밑에 걸렸다. 나는 그것이 다 말라 비틀어져 마당 두엄자리에 버려지도록 내 소유물에 대한 주장은커녕 애정 한번 표시해본 적 이 없다. 엄마가 분묘발굴죄로 쫓기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집에서 큰언니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 지만 정신적 충격은 아마 오빠와 내가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높은 산의 묘를 파내리는 행위, 그것은 우리 민족의 오랜 망령인 미신이며 어두운 범죄행위라고 지호기 선생님은 몇번이나 강조해서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우리 엄마가 그 망령에 씌어 그런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씻을 수 없는 치욕 같았다. 언니들은 할 머니나 엄마 세대의 오랜 통념에 그렇게까지 큰 거부감은 없는 편이었고 제남이는 아직 사 태에 대한 이해도 없는 어린애였다. 결벽증인 오빠와 겁 많은 나는 곧 걷잡을 수 없는 우울 증에 빠졌다 엄마는 그동안 대섬에서 대섬 특산물인 톳나물과 듬북나물을 따며 주로 소일한 것 같았 다. 대섬을 다녀온 아버지가 따서 말린 듬북을 몇 가마니나 가져온 것이다. 할머니는 그것을 집집마다 가지고 다니며 나누어주었다. 감방에 갇혀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숨어서 고생 하는 사람의 심정도 알아달라는 의미였다. 재산보다도 소중한 게 마을 인심이라는 것이 할 머니의 오랜 지론이었다. 듬북은 기제사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올리는 것인데 톳나물처럼 잔가지가 많고 아주 미끌미끌한 나물이었다. 제사 음식 먹으러 온 조상귀신들이 따라온 친 구 귀신들에게 나누어주기 좋도록 꼭 올리는 것이다. 듬북을 받은 사람들은 쌀이나 보리. 메 밀 등을 가져왔고 보리밭에 북주는 걸 도와주기도 했다. 방아를 찧게 된 아버지는 수걸이의 일년 새경으로 말집네한테 쌀 두 가마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수걸이와 변소의 똥을 펐다. 눈이 오기 전에 보리밭과 마늘밭 고랑에 밑거름 으로 주기 위해서였다. 꼼꼼한 수틀이나 바느질감보다는 좀더 시원스럽고 생산적인 일을 좋아하는 다찌니는 엄마 가 없는 틈을 이용해 날마다 새끼틀을 밟으며 한도 끝도 없는 새끼줄을 꼬았다. 니찌니는 철거덕 척척 일정한 리듬으로 가마니를 짰다. 아버지가 새끼줄과 가마니값을 치러주겠다고 한 것이다. 일용품을 살 때마다 나를 통한 아버지와의 집요한 줄다리기는 여전했고 가설극 장의 영화값이나 레이스 달린 속옷을 갖고 싶을 때마다 공공연히 곡식을 퍼서 무역선을 타 기도 했지만 공식적인 돈벌이도 필요했던 것이다. 아버지가 새벽마다 물먹인 짚뭇을 떡메로 두들겨서 부드럽게 해 주면 다찌니와 니찌니는 쉬지 않고 밤을 새우면서까지 일을 했다. 니 찌니는 돈이 모이면 내년 봄에 자신의 개인 소유로 병아리를 사서 기르는 게 꿈이었다. 닭 모이는 버려진 이삭이나 밥상 아래 떨어진 밥풀을 모아 전부 해결하겠다고 했다. 다찌니는 돈이 모이면 이자놀이를 해서 번 돈으로 도시에 나가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겠다는 되지도 않은 꿈을 꾸었다. 다찌니의 꿈은 공부보다도 여고 교복을 입고 왔다갔다하는 것 자체였다. 어쨌건 언니들이 아버지 몫의 남자 일을 하기 때문에 할머니는 끝없이 곰살맞았고 큰언니는 엄마가 없는 우리를 위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고구마를 삶았다. 똥을 다 푼 아버지는 양지쪽에 앉아서 수걸이에게 이엉 엮는 법을 가르쳤다. 다 엮어진 이엉들은 둥글게 말린 채 하늘 높이 쌓였다. 안채는 기와니까 상관없지만 사랑채와 뒤께 노 인의 오막살이는 물론 동네마당 말집네의 이엉까지도 다 아버지 몫이었다. 수걸이는 하루 종일 낑낑대다 이엉 엮는 법은 겨우 익힌 것 같았으나 지붕 꼭대기에 얹을 용마름은 영 젬 병이었다. 큰언니는 형부의 편지묶음을 깐 바구니에 '장미 505순모' 뭉치를 담아서 날마다 형부의 재 색 스웨터를 짜느라 있는 정성을 다했다. 나는 헌 실 자투리를 주워 이은 내 보물 실뭉텅이 로 목도리를 짜느라 날마다 소 숨을 쉬었다. 큰언니가 아무리 단속을 해도 뜨개질에 몰두하 다 보면 숨소리가 저절로 커져버렸다. 목도리를 짜면서 나는 아주 커다란 고민을 앓기도 했 다. 분묘발굴죄로 쫓기는 엄마를 보더라도 어른들은 그리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 다는 의심 때문이었다. 언니들이 보는 여원 이라는 잡지에는 '왈순 아지매' 라는 만화가 빠지지 않고 연재되었는 데 왈순 아지매가 감기에 걸려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 '콜록콜록' 은 아이들이 남녀가 뽕 따 는 장면을 말할 때 내는 소리였다. 그런데 책에 나온 왈순 아지매가 그런 소리를 내면서 기 침을 하는 거였다. 나는 놀라서 책을 덮었다가 몰래몰래 그 페이지를 펼쳐보며 거기에 어른 들만의 무슨 암호가 들어 있는지를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나는 어른들의 책에 그런 소 리가 쒸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주 이상하고 낯선 자극을 받았다. 만화에 대한 오해는 곧 풀렸지만 나는 어렴풋이 어른들도 그리 완벽한 존재는 아닐지 모 른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감히 어른들이 만들고 지켜온 세계에도 틀린 구석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세상이 틀리지 않고서야 어찌 그 넓은 시제 마당에 하이디 클라라 소공녀가 단 한명도 없을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누가 스스로 아들 딸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단 말인가. 본의가 아닌 운명지어진 그것에 그런 편견을 부여한 다면 그건 너무나 잔혹한 처사 같았다. 어른들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른 채 사는 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농한기에도 저마다의 일을 붙들고 김을 뿜는 어느날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동백나무 밑에 서 있던 오빠가 나를 불렀다. 만화책을 빌려오라는 것이다. 엄희자의 순정 만화 같은 것말고 범인을 잡는 추리만화를 빌려오라고 했다. 오빠가 건네온 오원짜리 금강 산이 그려진 파란 지전으로 만화책을 한아름 골라온 나는 심부름값으로 오빠 방에 들어가 만화를 함께 볼 수 있었다. 오빠가 잘못 골라왔다고 던져버린, 투명인간이 되어 원수를 갚는 이야기나 서울 영화배우가 시골에 왔는데 시골 처녀들이 대접한다고 아이스께끼를 사 가다 가 산 넘고 물 건너는 도중에 다 녹아버린 이야기는 정말로 재미있었다. 나는 데굴데굴 구 르며 웃다가 오빠 발에 채어서 금방 죽을 듯이 흐느껴 울고, 또 이내 까먹고 깔깔 웃다가 급전하는 만화의 슬픈 장면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곤 했다. 오빠는 그런 나에게 염증이 나서 다시는 만화책을 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가 참지 못하고 또 돈을 꺼내주며 만화책을 빌려오라고 했다. 오빠는 공부 때보다 더 진지하게 이맛살을 모은 채 만화에 열중했다. 오빠 는 어쩌면 만화에서 어떤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 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어떤 문제의 실 마리를 얻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한참 만화에 빠져 있는데 등잔불의 심지를 돋우던 오빠 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나를 불렀다. "행남아." "이?" 나는 만화에 열중해 있었으므로 건성으로 대답했다. "너 만화보다 더 재밌는 거 구경시켜주까?" "뭐가니?" "일단, 어떤 경우에도 찍소리만 냈단 봐라. 그 자리서 천당 갈 테니 조심해야 돼. 뭔 말이 지 알겄냐?" 무턱대고 찍소리만 냈단 봐라니, 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오빠의 눈빛은 너 무나 진지했다. "나만 따라와봐.' 훅 등잔불을 꺼버린 오빠가 조심스레 방문을 밀었다. 아버지도 언니들도 불을 끄고 일을 맞춘 깊은 밤, 너무나 두꺼운 어둠을 밀려 오빠가 쓰윽 나섰다. 그믐인지 하늘엔 별 하나 떠 있지 않았다. 졸지에 어둠속으로 따라나간 나는 오빠의 바짓말을 부여잡고 더듬거리며 신발 을 찾아 신었다. 기름을 쓰지 않으려고 애초 불도 켜지 않은 할머니방과 내가 오빠 방에서 공부하는 걸로 아는 아버지의 안방과 언니들의 아랫방 창호들이 어둠속에서 비현실적으로 희붐하게 떠 보 였다. 오빠가 내 손을 잡고 살금살금 마당을 건넜다. 오빠는 소가 잠들어 있는 외양간을 지 나고 가마니틀과 새끼틀이 놓인 헛간을 지나더니 겨울 땔감인 철 나무벼늘이 묵직하게 쌓인 으슥한 모퉁이도 지났다. 나는 왠지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앞 뒤 설명없이 엄포부터 놓는 오빠가 조금씩 무서워지려 했다. 내가 조금씩 버팅기려 할수록 오빠는 더욱 강하게 내 손을 잡아끌며 집모퉁이를 돌았다. 오빠는 만화 속의 가죽옷을 입은 탐정이나 베트콩을 염탐하는 맹호부대 용사라도 된 것처럼 뒤안 담벼락에 몸을 착 붙여서 옆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매미 처럼 몸을 날려 살구나무에 철썩 달라붙더니 나도 나무 밑에 주저앉으라고 했다. "앉어 앉어, 이 빙신아 숨소리 좀 내지 말고." 나는 오빠가 만화보다 재밌다고 한 게 무엇인지 궁금해서 소 숨소리를 더욱 멈출 수가 없 었다. 오빠는 나무에 달라붙은 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박쥐사냥을 나온 밤구렁이가 두 찌니의 살구나무를 타고 내려오는 소리라도 찾는 것 같았다. 나도 웅크리고 앉아 무턱대고 오빠처럼 귀를 기울였다. 그때였다.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또딸이의 뒷방에서 두런 두런 나는 그 소리는 분명 사람 소리였다. "이제 가시면 다시는 아니 오겠지요. 웅기씨이 흑흑흑!" "돌아오지 못한다 할지라도 난 영원히 숙희씨를 잊지 못할 거요."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웅기씨라면, 지웅기는 바로 큰언니의 약혼자 이름이었고 숙희는 뒷방것 또딸이의 본명이었다. 엄마의 파묘 사건으로 결혼식이 이루어진 그 틈사이 형부와 또딸이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더란 말인가. 돌하르방, 쌀자루, 문둥이처럼 흉하고 천한 허천병자 또딸이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리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큰언니는 속도 모른 채 형부의 스웨터를 짜느라 정성을 다하는데 이렇게 배반을 당해도 된단 말인가. 나는 입을 벌린 채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서 이렇게 새옷을 지어입고 나는 날마다 사장께를 돌았지요. 사장 나무 뿌리 밑에 앉아 계신 성황님에게 당신을 돌려달라고 빌고 또 빌었지요. 날이 가고 달 이 가도 편지 한 장 없는 다신 때문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내가 이제라도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소. 숙희! 못난 나를 용서하오! 한때라도 명 희의 미모에 그만 정신을 잃고 홀렸던 나를 용서해주구려, 흑흑흑." 너무나 애절한 두 사람의 목서리 때문에 나는 잠깐 또딸이가 어떤 마법에 걸린 공주였을 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의 선전과 큰언니의 미모에 정신을 잃었던 형부가 이제야 마법에 걸린 또딸이의 정체를 알아본 것이다. 또딸이의 본 모습은 어쩌면 큰언니보다도 엄 앵란이나 김지미보다도 아름다울지도 모른다. 그때 오빠가 내 옆으로 주저앉으며 '미친년!' 했다. 또딸이가 일인이역의 대사를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여름에 보리쌀 없어진 것도 감 베먹고 대추 따간 것도 큰누나 옷감 훔쳐간 것도 다 저것이 한 짓이란께. 어무니 안 기신께 지 세상 만나갖고 날마다 저 짓이여. 날마다 성냥개 비 숯으로 눈썹 그리고 내 물감 훔쳐다 울긋불긋 도깨비 화장한 얼굴로 인자는 아주 영화배 우가 따로 없어." 오빠가 씹어뱉는 중에도 또딸이의 대사는 계속되고 있었다. "당신 없는 세상을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요. 당신 손으로 나를 죽여주세요. 당신 손에 죽을 수만 있다면 나는 저승에 가서도 미소를 지을 거예요." 또딸이도 장터거리 가설극장에 영화가 들어올 때마다 빠지지 않고 구경했던 게 틀림없었 다. 그러지 않고야 저렇게 멋있는 대사를 줄줄 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언니들은 원래 영 화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지지 않고 다 구경했다. '시네마스코프 총천연색!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화! 기회는 한번밖에 없어요. 때를 놓 치면 영원히 후회할 수밖에 없는 영화, 돌아오지 않는 해병! 내 동생 영희야, 따뜻한 조국의 품에서 이 오빠의 몫까지 부디 행복하게 살아다오! 흑흑흑, 오빠! 오빠! 목메어 불러도 대답 없는 돌아오지 않는 해병!' 쌍나팔을 사방에 단 트럭이 신작로를 미친 듯 헤집고 다니며 선전을 해대면 언니들은 해 가 다 넘어가기도 전에 미리 밥을 차려놓고 빨리빨리 먹지 않는다고 닦달을 했다. 화장을 하고 새옷을 꺼내 입고 빨리 영화구경을 가기 위해서였다. 내용이 건전하고 좋은 영화라는 평판이 있는 거면 아버지가 직접 돈을 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언니들은 우리들을 하나씩 등에 업은 다음 큰 옷으로 덮고 어린아이라고 속여서 데리고 갈 때도 있었고 할머니가 따라 가서 우리 집은 식구가 많으니까 어린애들은 깎아달라고 사정을 할 때도 있었다. 덕분에 엄 마는 돈 내는 영화는 단 한편도 보지 못했으나 내용은 다 알고 있었다. 엄마가 한숨 자다 일어날 쯤에 돌아온 언니들이 영화 내용을 생생하게 재연해주었던 것이다. 틀린 대목은 서 로 수정해가며 셋이서 다투다시피 재연했기 때문에 내용은 거의 완벽하게 전해졌다. 따라가 지 못할 땐 퉁을 부리고 울다 잠들었던 나도 슬며시 일어나서 어둠속의 엄마 언니들과 함께 흑흑흑 흐느껴 울기도 하고 깔깔깔 웃다가 오밤중에 윗방 할머니가 깰까봐 입을 막기도 했 다. 이야기가 다 끝날 쯤이면 자는 척하던 아버지가 '아 다들 가서 안 잘 거냐' 며 이제 막 잠 깬 것 같은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언니들은 후다닥 아랫 방으로 몰려가버렸다. 그래서 우리 집은 언니들만 영화구경을 하고 돌아와도 아버지까지 온 식구가 영화내용을 다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뒷방것 또딸이가 영화구경을 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만화보다 재밌지?" "응."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속에서 오빠와 나는 서로를 향해 씁쓸히 웃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때였다. 오빠가 갑자기 달려들며 내 입을 틀어막았다. 누군가 어떤 그림자가 바람처럼 훌 쩍 우리 담을 넘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리없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 듯이 그 그림자가 우리를 마구 흔들었다. 오빠의 가슴에서 퉁퉁퉁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내 가슴에서는 발발발 문풍지 떠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검은 그림자는 얇고 가벼운 종잇장 처럼 안방 뒷문에 착 달라붙었다. 또다시 큰언니의 혼숫감을 훔치러 온 도둑인 것 같았다. 큰언니의 잃어버린 옷감은 또딸이의 소행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숨을 멈춘 채 시간도 멈춰버린 것 같은 착각 속에 빠졌다. 그때였다. "낙천이! 낙천이!' 그 그림자가 숨죽여 아버지를 불렀다. 분명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였다. "낙천이! 낙천이!" 너무나 다급하고 절실하고 간절한, 뼈에 사무칠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버지도 곧 잠이 깼 는지 안에서 반응이 있었다. '낙천이, 날세 나. 나 금석이, 서금석일세." 서금석, 내 친구 수자가 꿈에도 그리던 이름 서금석. 바로 수자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말채찍을 흔들며 끝없는 신작로를 따라가다 길을 잃었다는 수자네 아버지 서금석이 돌아온 것이다. 수자가 연을 높이 띄우고 말집네가 명태처럼 말라 비틀어진 몸뚱 이로 절규하며 부르던 서금석 그가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가 내 아버지이기나 한 것처럼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오빠의 손길을 뿌리치며 뛰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오빠가 더욱 억 센 손길로 내 얼굴을 틀어쥐며 주저앉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지난 봄날 수걸이를 데려오겠 다는 아버지로 하여금 산울음 같은 소리를 내게 만들었던 바로 그 사나이였다. 날치처럼 바 다를 날고 고춧가루 서 말을 먹고 뻘밭 삼십리를 긴다는 바로 그 장본인인 것이다. 9. 나는 내가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 없다. "행남이 누나야, 여찌나야 여기 잠 봐봐봐." "더러운 장딴지는 왜 자꼬 보라고오." "장딴지가 고등어 같단께. 장딴지가 고등어 돼부렀어어." "모지리 빙신, 사람 장딴지가 워치케 고등어가 된다고 그래애." "장딴지가 고등어같이 상해부렀어어 잉잉." 뻘로 칠갑을 한 다리를 가리키며 떼를 쓰던 제남이가 그만 주저앉아 잉잉 울기 시작했다. 나도 다리에 힘이 풀리고 골이 아프기 시작했다. "내 다리가 고등어 돼불믄 워칙 하냐고오 엉엉." 길바닥에 다리를 마저 뻗는 게 제남이는 골통을 부리기로 작정을 한 눈치였다. 다리가 아 프니까 엉뚱한 고등어 타령을 늘어놓는 것이다. 고등어는 아무리 싱싱한 것도 배를 가르면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며 속이 곯아 있기 일쑤였다. 꼭 통통한 고등어처럼 생긴 장딴지 가 아프니까 속이 곯아 있은 것 같은 상상이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한나절 내내 짱뚱어를 잡는다고 뻘밭을 헤맸으니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플 것이었다. 나도 물론 배가 고프고 다리 가 아팠다. "짱뚱이 더럽다고 할머니가 두엄에 던져불면 워칙하냐고오!" 제남이는 다시 짱뚱어를 물고 늘어질 모양이었다. "아니랑께, 짱뚱이탕이 추어탕보다 맛있다고 그때 잿등 아짐이 분명히 말했단께?" 나는 배창자가 땅기도록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짱뚱어를 푹 고아서 뼈를 걸러버리고 된장에 풋고추 마늘을 많이 빻아 넣어 텁텁하게 시래깃국을 끓이면 그렇게 맛있다고 잿등 아짐이 분명 말했던 것이다. 제남이처럼 주저앉게 될까봐 나는 눈을 깜박이며 다리의 힘을 잃지 않으려고 있는 힘을 다했다. 하긴 배퉁이와 눈알만 디룩디룩할 뿐 몸뚱이가 곧 꼬리로 빠져버린 짱쭝어는 생긴 게 너무 우스워서 먹고 싶지 않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바다는 너무 무서운 곳이 되어버렸다. 수자네 아버지 서금석과 수걸이가 포함된 남파간첩 네 명이 바다에서 사살된 후부터였다. 아버지와 뒤께 노인이 불려가서 고초를 겪 고 돌아온 재작년부터 바다의 곳곳에 해경 초소가 들어서게 된 것이다. 거멍게와 노루목 귀 바위에 일반인들은 접근이 금지되었다. 조각배나 삼마니 그물로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잇는 남포 어부들도 마찬가지였다. 남포 어떤 사람은 딸의 수학여행비를 벌려고 새벽그물을 보러 나갔다가 해경의 조준사격을 받고 다리병신이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바다는 어느새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다의 생물들은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 되 어버렸다. 그러나 사천 하구 쪽에는 짱뚱어처럼 짠물인지 민물인지 주소가 확실치 않는 생물들이 떼 지어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날마다 아버지에게 기름진 것을 먹이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그 래서 이왕 노는 품으로 짱뚱어를 잡아 효도를 하자는 게 내 의견이었던 것이다. "빨리 일어나아. 할머니 또 동네방네 우리 찾으러 댕겼다간 아부지한테 혼나아." 아버지에게 혼날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아니 이 세상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옛날보다 훨씬 무서워졌다. 아니, 무섭다기보다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아버지는 옛날처럼 등골이 휘어지도록 열심히 일을 하지도 라디오 뉴스와 '농민의 벗' 이 라는 월간지와 신문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냥 햇볕이 드는 마루끝이나 먼 들판이 내다보이 는 골목 끝머리에 하염없이 앉아 있곤 했다. 그것은 눈을 부라리며 호령하거나 솥뚜껑같은 손바닥을 쳐올리며 겁을 주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아버지라는 말에 제남이도 더 이 상 어쩔 수 없는 눈길로 나를 쳐다보았다. "여찌나야, 오늘은 엄마 오까?" "듬북이 미역 다 팔아야 온다고 했은께 당당 멀었어어. 몇번이나 말을 해야 알아묵는디 야? 멍충이 빙신." "그라믄 다찌나가 사온 사탕 또딸이가 안 묵고 선반에 아직 있으까?' "거울로 다 봐놓고도 자꼬 물으면 워칙해애?!" "우리 하나만 내려 묵자. 엄마가 하도 안 온께 우리가 내려 묵었다고 하제 뭐." "그래. 사탕 내려줄 팅께 빨랑 일어나!" 궁둥이를 들까 말까 하며 계속 떠보던 제남이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사탕은 지난 설날 다 찌니가 사온 것이었다. 똑같이 방직공장에 취직한 니찌니는 돈을 모아서 가져오고 다찌니는 몸속에 들어가면 그대로 피가 된다는 포도주와 아버지의 약을 사왔다. 그리고 우리들 몫으 로 사탕을 두 근이나 사왔는데 엄마는 그것을 포개놓은 반닫이농 꼭대기에 올려놓고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내려주었다. 엄마가 듬북이 장사를 가버리고 없으면 행여 또딸이나 생쥐가 들어와 사탕을 물어가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 때문에 우리는 반닫이 꼭대기를 자주 쳐다보곤 했다. 그래도 영 불안한 생각이 들면 우리 중 하나는 엎드리고 하나는 거울을 들 고 등 위로 올라서서 사탕이 아직 있는지 없는지 비춰보며 확인을 했다. 뱀처럼 길고 길게 휘어진 사천둑은 돌아올 때엔 몇 배나 늘어나 있는 것 같았다. 아가리 를 딱딱 벌린 채 갈대에 꿰인 짱뚱어는 껍질조차 말라붙어 볼품이라곤 없는데 배가 너무 고 픈데다 비린내가 역겨워서 나는 금방 토할 것 같았다. "행남아, 아니 여찌나야. 우리 짱뚱이를 잡을 게 아니라 김일성이를 잡으러 가자." 제남이는 윗형제들이 모두 사라져버리자 나한테 비로소 여찌나라는 호칭을 쓰기 시작했 다. 하지만 나는 누나라는 호칭을 듣는 게 이렇게 피곤한 일인 줄은 정말 몰랐다. 화가 난다 고 함부로 때릴 수가 있는가, 귀찮다고 떼버릴 수가 있는가. 정말로 골치였다. "김일성이를 잡아서 뭐하게야?" "잡으믄 상금 타서 부자 되고 부자 되믄 아부지 약 사고 또 갈아서 젓도 담고." "모지리 빙신, 워치케 사람을 갈아서 젓 담는디야?" "갈아서 마신께 젓도 담제 뭐. 고래괴기 소금동이에 너놓고 꺼내 묵는 거맨치로 꺼내 묵 고 갈아서 젓도 담고." "문딩아 사람을 워치케 묵냐고오!" 피곤과 짜증 때문이었다. 나도 몰래 벌컥 발길질을 하자 제남이가 일부러 픽 쓰러졌다. 어 렵사리 일으켜 겨우 몇걸음 뗐을 뿐인데 또 주저앉아버린 것이다. 나는 드디어 울컥 하며 속이 넘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길섶으로 고개를 돌리고 웩웩 속을 뱉어냈다. 노랗게 쓴 물 이 쪼르르 넘어왔다. 캑캑거리며 앞이빨로 혀바닥을 긁어서 끈적한 침까지 뱉다보니 귀가 멍멍했다. 발을 뻗대며 통성을 터뜨리는 제남이의 울음소리가 모깃소리처럼 가느다랗게 들 려왔다. "우리 담벼락이랑 동사무소 지붕이랑 장터거리 골목골목마다 '때려잡자 공산당 갈아 마시 자 김일성!' 이라고 쓰여 있은께 나도 그라제 엉엉. 어른들이 먼저 찢어 죽이자 김일성! 갈 아 마시자 김일성! 그랬은께 나도 그랬제 엉엉 잉잉." 정말 제남이의 말대로 때려잡자, 찢어 죽이자,. 갈아 마시자 같은 반공표어는 눈에 띄는 곳이나 편편한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씌어 있었다. 블록담이나 슬레이트, 양철지붕, 동네마당, 사천둑, 거멍다리 그리고 먼산 절멱이나 잔디밭, 심지어는 학교 운동장과 신작로 위에도 씌어 있었다. 그런 표어를 볼 때마다 사람을 어떻게 갈아 마시느냐고 물고 늘어지다 가 꿀밤을 얻어먹던 제남이가 거꾸로 김일성이를 잡아서 갈아 먹자고 떼를 쓰는 것이다. 제 남이는 우리 식구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 "모지리 빙신아, 그라믄 너 혼자 김일성이 잡으러 가거라. 잡아서 반찬도 하고 젓도 담가 라. 집에 오지 말고 지금 당장 잡으러 가거라." 속을 뱉어내며 내가 돌아서버리자 제남이가 더욱 큰 소리로 엉엉 울어젖히기 시작했다. "뽕! 엄마 오믄 사탕 묵었다고 일러부러! 뽕 너 혼자 사탕 묵으믄 다 일러부러! 뽕뽕! 으 앙!" 내가 못 들은 척 걸어와버리자 제남이의 울음소리도 바쁘게 쫓아왔다. 제남이는 일을 만 들어서 당하고 울어야 직성이 풀렸다. 제남이는 원해 바보였다. 거기다 뭔가가 더욱 나빠지 고 있었다. 학교를 싫어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할머니가 엄마를 나무랄 때 자기가 괜히 사이 렌처럼 자지러지게 우는 것도 그렇고 조금만 비위에 안 맞거나 거슬리거나 이해가 안되는 일은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그런 제남이를 아무데도 떠넘길 데가 없어진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너무나 피곤했다. 아버지는 역시 사장께와 놀미대미와 큰벌과 새벌과 거멍숲이 다 내다보이는 뚜껑례네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모든 것이 환히 내다보이는 곳에 앉아 있지만 어느 곳을 바라 보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않는지도 몰랐다. 듬북이 장사를 간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봄볕이 너무 엷은지 몸을 웅크린 채 쪼그린 모습이 다 늙 어빠진 늙은이 같았다. 아버지가 끝내 우리를 아는 척하지 않자 우리도 슬그머니 그 앞을 지나쳐버렸다. 이년이나 연이은 가뭄을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듯 그해 겨울엔 눈이 날마다 산더미처럼 쌓 였다. 그 눈보라를 헤치고 지호기 선생님의 부인이 우리 집을 찾아오던 날이었다. 큰언니는 우 리 식구들의 내복을 빨아서 한꺼번에 가마솥에 삶고 있었다. 이가 끓지 못하도록 소독을 하 는 것이다. 그런데 시종 냉랭한 얼굴이던 지호기 선생님의 부인이 할머니방에서 나와 부엌 을 잠깐 일별하고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빨래솥에 김이 오른지 한참이 됐는데도 큰언니가 머리통을 싸고 있던 목도리를 줄줄 풀어내더니 땔감을 집어넣듯이 아궁이에 집어넣고 부지 깽이로 쑥 밀어넣었다. 그리곤 다시 후다닥 스웨터를 벗어서 아궁이로 쑥 밀어넣어버렸다. 큰언니는 또 양말을 쑥쑥 벗어서 아궁이로 밀어넣어버렸다. 스웨터가 너무 커서 불길이 자 지러지니까 고개를 갸우뚱 디밀고 들여다보며 부지깽이로 들쑤셔서 공기를 불어넣었다. 밥 을 하거나 소죽을 삶을 때 불때는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언니는 다시 새로 만들어 입은 월남치마를 벗어서 밀어넣으려 했다. 그때 할머니방을 나오던 엄마가 이것이 '뭔일이다냐! 이것이 뭔일이다냐!' 하며 부엌으로 뛰어들엇다. 그때야 정신을 차린 큰언니가 부지깽이를 내던지며 자신의 몸뚱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길로 아랫방으로 뛰어간 큰언니는 몇날이나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때 큰언니의 스웨터는 물론 우리 식구들의 내복도 모두 숯 덩이가 되어버렸다. 너무나 추웠던 겨울이었다. 엄마처럼 성격이 온순한 큰언니의 겉으로 드러난 방황은 그것뿐이었다. 오빠가 광주로 전 학을 가자 큰언니는 밥을 해주기 위해서 따라갔다. 한번 집을 떠난 큰언니는 추석 설 명절 에도 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오빠가 한달에 한번씩 토요일에 내려와서 식량과 양념과 김치 를 가지고 일요일에 돌아갔다. 큰언니는 수예점에서 일감을 받아다가 병풍 수를 놓는다고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방세를 치르고 오빠의 참고서와 체육복을 사주고 잡비도 보태준다 고 했다. 니찌니는 교회에 더욱 열중이었고 다찌니마저 소즘에 절인 푸성귀처럼 풀이 죽더니 죽자 사자 니찌니를 따라다니며 새벽기도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기도의 응답이었는지 니찌니와 다찌니는 추석에 다니러 온 순영이 언니를 따라서 집을 나 갈 수 있게 되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진 순영이 언니는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만 큼 아름다워 보였다. 무엇보다 어떻게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꽉 끼는 '뽀삐바지' 와 '삐딱구두' 차림의 세련된 모습이 어느 정도의 성공을 믿게 했다. 엄마는 힘들면 언제라도 돌아오라고 다짐을 두고 또 두며 직접 언니들의 보따리를 싸주었다. 미숫 가루와 멸치와 김가루는 비상식량으로 싸고 공장 주인에게 주라고 햇찹쌀 두 되도 싸주었 다. 아버지는 나더러 비단 짜는 여자가 되라고 뽕나무를 심었지만 정작 직녀가 된 것은 다 찌니와 니찌니였다. 가뭄에 큰언니의 결혼식 준비로 돈을 다 써버린 아버지는 병원비를 대기 위해 제일 먼저 소를 팔았고 하나둘 논밭도 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보다 먼저 엄마의 분묘발굴사건으로 우리는 놀미대미 세 마지기를 팔 수밖에 없었다. 숨어 다니던 수고는 소용없이 벌금을 물어 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짓던 고모네 전답은 전부 남에게 넘기게 되었다. 오십 마지기 이상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갑자기 열 마 지기 정도 소농으로 전락하고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식구나 노동력은 필요치 않게 되 었다. 봄이 되자 마을마다 가뭄으로 인한 이농이 급증했다. 일제와 6.25를 겪은 이후 돈을 벌러 가거나 공부를 하러 떠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가솔을 전부 이끌고 이렇게 많이 고향을 등 지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그것을 재빨리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가문 의 명운에 별 영향력이 없는 손녀딸 둘만은 신식 시대의 흐름을 따　 살아보는 것도 괜찮다 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년 만에 돌변한 의식의 대전환이었다. 가뭄 탓도 있었지만 경제개발 오개년계획에 의한 의도적인 사회변화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오로지 아버지의 짐을 덜겠다는 계산이었는지 모른다. 물론 언니들도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과 눈의 정기를 잃어버 린 아버지와 어린 동생들이 못 미더워 울며불며 떠나긴 했으나 도시생활에 대한 기대와 들 뜬 마음이 더 컸기 때문에 큰 탈은 없었다. 다찌니는 끔에도 그리던 연두색 미니투피스를 마음껏 뽐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문제는 시찌니였다. 학교 선생님이 되는 게 일평생 꿈이었지만 일류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도 시찌니는 아무 할 일을 얻지 못했다. 어디나 필기시험엔 합격을 했지만 면접이 끝나고 신원조회를 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가정교사를 하던 집에서도 쫓겨난 시찌니는 니 찌니와 다찌니가 기숙사를 나와 자취를 시작한 산동네 판잣집 셋방에 얹혀살기도 하고 광주 로 내려와 큰언니와 오빠의 단칸방에 얹혀 살기도 했다. 사촌동생의 공부를 돕기 위해 고모 네 집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고모와 고모부가 하도 싸우는 바람에 그만 퉁겨나오기도 했다. 공무원이던 고모부도 직장에서 밀려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가문의 미래를 한몸에 진 채 전령처럼 어둔 새벽의 첫차를 타고 우리 집에선 처음으 로 먼길을 떠났던 시찌니는, 사고무친한 서울생활을 홀몸으로 개척했던 시찌니의 노력과 수 고는 그렇게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언니들의 억압과 구박에 불만이 많았다. 그러나 언니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 리자 나는 더할 수 없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집안의 청소를 도맡아야 했으며 할머니 의 부엌살림도 도와야 했고 무엇보다 제남이의 학교 숙제까지 온갖 치다꺼리를 다 해야했 다. 무엇보다 내 머리를 빗겨줄 사람이 없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땋 아서 늘어뜨리기도 하고 동그랗게 쪽을 찌기도 하고 선녀처럼 틀을 지어 올리기도 하며 온 갖 멋을 다 부리고 살아왔다. 하지만 내 손으론 단 한번도 빗어본 적이 없었다. 머리에 이가 끓고 서캐가 슬자 보다 못한 엄마가 어느날 나를 끌고 잿등을 찾아갔다. 남의 소를 훔치다 가 들켜서 감방에 갔던 잿등 병택이라는 사람이 감방에서 이발기술을 배워왔던 것이다. 병 택이는 자기네 집 생나무 울타리 밑에서 판자때기로 짠 긴 의자에 나를 앉혀놓고 다우다 보 자기를 씌운 다음 내 긴 머리를 단숨에 싹둑싹둑 잘라버렸다. 나는 저절로 눈물이 퐁퐁 쏟 아졌다. 내 머리는 밥주발이나 짚가리 뚜껑을 엎어놓은 것처럼 되뚱하게 쳐올라가버렸던 것 이다. 엄마는 양은그릇과 바꿀 수 있는 숱 좋은 내 머리채가 오져서 입이 벌어졌지만 나는 뒤통수 자체가 없어져버린 것 같은 허전함을 오래도록 겪어야 했다. "다시는 사람 없는디 댕기지 마라. 큰일 나. 어째 행남이 너는 한 번 하는 말 못 알아묵고 동생까지 끄질고 댕기매 이 속을 태우냐 응? 재수없이 문둥이보담 더 무서운 공비한테 잽히 믄 워쩔라고 그러냔 말이다 응? 이나마 집구석 홀라당 넘어가는 꼴 안 당하려거든 지발 핼 미 말 새기거라." 아버지의 밥 반찬감으로 짱뚱어를 잡아왔기 때문에 할머니의 잔소리는 그 정도로 된 것 같았다. 팔다리를 대강 씻고 들어온 우리는 한참을 토닥거렸다. "너는 정확하게 못 맞춘께 내가 올라가얀다 말여. 되려 저 속에다 밀어불믄 워칙하냐고 오." "너는 가시난디 내가 워치케 밑에 엎드리냐고오. 내가 머시만께 올라가야제에." 나는 할 수 없이 땅에 엎드렸다. 내 등위로 올라선 제남이가 빗자루를 몇번 까닥거리자 사탕을 싼 회종이는 쉽게 떨어졌다. 그러나 너무 가볍게 나는 듯이 떨어지는 느낌이 온몸에 힘이 빠질 정도로 서운했다. "하나밖에 없네." 구르듯 내려와서 회종이를 먼저 주운 제남이가 역시 김 빠지는 소리를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또딸이가 솔래솔래 내려 먹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또딸이의 짓이라면 제남이도 그냥 탓 없이 체념을 했다. 또딸이는 우리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겨울에 마룻방 선반에 얹힌 김도 그런 식으로 내려 먹곤 했다. 등 위에서 부채질 을 해 가지고 떨어뜨린 김을 제남이가 구르듯 내려와 얼른 주워서 장수를 세는 것이다. 그 런데 제남이는 언제나 한두 장씩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나를 속였다. 김을 입속에 넣었다가 숨이 막힐 뻔하기도 했다. 제남이는 선선히 사탕 한 개를 내놓았다. 나는 엄마가 늘 그러는 것처럼 사탕을 헝겊에 싸서 이빨로 깨뜨린 다음 튼 덩어리는 제남이에게 주고 나 는 작은 조각과 남은 가루만 먹었다. "또딸아, 또딸이 이것아, 핑 못 나오겄냐! 핑 나와서 작은 솥에 불때라 빨리! 행남아 너도 어서 나와서 또딸이 솥엣것 못 퍼묵게 지켜라 어서. 어서 나와." 짱뚱어 손질을 마쳤는지 할머니가 불같이 다그쳤다. 언니들이 한꺼번에 사라져버리자 굼 벵이처럼 뒷방에만 박혀 있던 또딸이가 억지로 볼려나와 집안 일을 거들곤 했다. 그러나 또 딸이에게 먹을 것을 맡긴다는 건 호랑이에게 염소를 맡기는 거나 같은 일이었다. 성냥숯 대신 눈썹을 그리라고 내가 까만 색연필을 전해준 이후로 또딸이는 나에게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나도 또딸이에게 특별히 적대감 같은 걸 가질 이유는 없었다. 아니 나는 또딸 이에게 우리 언니들 중 그 누구보다도 굉장한 흥미랄까 호기심 같은 걸 가지게 되었다. 그 래서 또딸이가 솥 안의 음식을 훔쳐먹을까 봐 감시를 하는 일은 정말 고역이었다. 그래도 나는 할 수 없이 방을 나와 꼭 또딸이처럼 생긴, 부엌문 앞 절구통에 걸터앉았다. 제남이도 따라 나와서 내 옆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얼굴에 울긋불긋 분칠을 하고 눈썹을 새까맣게 칠한 또딸이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또딸이가 아닌 어디선가 아주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통이 굵은 대나무를 들고 막 변소를 나오고 있었다. 또 똥통에서 대나무를 꺼낸 모양이었다. 오늘밤 잠들기 전에 아버지가 마셔야 할 약이었다. 할머니는 똥이 묻은 대나무를 두엄더미에 쓱쓱 문지른 다음 신문지로 닦고 다시 물을 퍼 다가 깨끗이 씻었다.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에 대나무를 작두로 짝 벌려서 그 안에 고인 물 을 양푼으로 받아 아버지에게 먹이려는 것이다. 우리 변소는 재작년 가을에 다 퍼버렸기 때 문에 오래 묵은 똥이 없었다. 하지만 마을에서 대나무를 담가주겠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 기 때문에 할머니는 할 수 없이 일년밖에 묵지 않은 우리 변소에 대나무를 담근 것이다. 뒤 께 노인의 오막살이도 재작년 겨울에 소개되어버렸기 때문에 변소도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 이다. 대나무는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현리 외갓집에서도 거절했다는 말이 있었다. 할머니가 엄마를 공격할 때 가슴을 치면서 외친 말이었다. 아버지도 처음엔 병원에 입원했었다. 어딘가로 불려가서 석달 만에 초죽음이 되어 나타났 던 아버지는 그 길로 광주 기독병원에 입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논을 팔고 밭을 팔고 갖은 노력을 해도 아버지의 몸은 추슬러지지 않았다. 같이 불려갔던 뒤께 노인은 똥물을 마시고 거뜬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훨씬 젊은 아버지는 해를 넘기고도 몸을 감잡지 못했다. 아버지는 어쩌면 병이 낳는 걸 속으로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 었다. 스스로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똥물로도 치료가 되지 않는 지병을 핑계로 아버지는 만사에 손을 놓아버렸다. 아버지는 이차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의무 뿐 아니라 한 인간, 한 존재로서의 의미조차 방기해버 린 것 같았다. 도대체가 이 세상 어떤 것에도 관심은커녕 시선조차 맞추려 들지를 않았다. 아버지는 어쩌면 뜻하지 않게 얻은 생애 첫 휴가처럼 이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차 라리 즐기는 거나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할머니가 아이들이 짱뚱어를 잡아왔다고 해도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짱뚱어에 고춧가루를 좀 넣겠냐고 물어도 대꾸없이 후룩후룩 국물만 열심히 떠먹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후룩후룩 떠먹는 것이 흡족해서 아무 탓도 안했다. 제남이는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잠에 나가 떨어졌고 나는 언제나처럼 냉랭하고 조용한 식 사 때문에 아무 맛도 무른 채 밥을 먹고 있었다. 밥을 먹을 때마다 나는 천장을 향해 입을 쫙 벌리고 길게 찢은 김치를 집어넣는 니찌니의 모습이나 다찌니의 수다스런 웃음소리가 그 리워서 미칠 것 같았다. 설거지를 떠넘기려고 다투던 모습이나 놀짝하게 구운 갈치토막에 똑같이 젓가락을 박아놓고 서로 노려보며 움직이지 않던 모습이 너무나 그리웠다. "자 행남이는 가서 숭늉 떠옴시로 또딸이더러 밥 다 묵었으믄 설거지 하락 해라." 새삼 떠맡게 된, 노구로는 너무나 벅찬 일과와 아버지에 대한 근심 때문에 녹초가 되어버 린 할머니가 또딸이를 부르는 일마저 나에게 밀었다. 나는 군말 없이 일어나 샛문을 밀고 나갔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둑한 우리 부뚜막에 등을 구부린 채 걸터앉아 있었다. 다 저물녘 에 찾아온 손이 차마 밥을 청하지 못해 자신의 신세를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은 지나는 길손이나 동냥치 심지어는 미친 걸식꾼에게도 밥을 거절해본 적이 없었다. 먹던 밥 이라도 덜어서 주는 게 우리 집의 인심이었다. 그러나 한 갈래로 묶은 탐스러운 머리채며 깨끗하게 흘러내린 어깨선이 심상찮은 모습이었다 "시찌니." 나는 행여나 하고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행남아!' 역시 시찌니였다. 창백하고 어두운 시찌니의 얼굴을 발겨난 순간 나는 갑자기 눈물이 후 두둑 떨어졌다. 알 수 없는 것이 울컥 가슴을 치밀자 주먹만한 통증이 등줄기로 쭉 뻗쳐 올 라갔다. 그리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이 퐁퐁 솟았다. 내가 무작정으로 흐느껴 울자 시찌니가 나를 안고 말없이 등을 토닥였다. 뜻밖에도 따뜻한 시찌니의 손길 때문에 내 슬픔 은 더욱 봇물처럼 터졌다. 그동안 참고 참았던 것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공포 나 불안이나 외로움 자체가 눈물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시찌니, 왜 인제야 왔어. 왜 인제야 왔어. 시찌니가 진즉 왔으믄 나도 학교에서 오줌 안 쌌어어 엉엉." 내 일급비밀을, 내 머릿속에서조차 지워버렸던 말을 부지중에 뱉어놓고 나는 그 충격으로 엉엉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뒷방문 내던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해 다 저물었는디 누 집에 초상이 났다더냐 응? 이눔의 가시낭년들이 시방, 집구석 을 찾아왔으믄 어른 뵙고 인사할 생각은 않고 밖에서 조문부터 하느냐고!" 할머니였다. 할머니의 노기에 지질린 나는 단숨에 꿀꺽 울음을 삼켰고 시찌니도 고개를 숙인 채 샛문으로 올라섰다. 추레한 몰골의 시찌니가 절을 올리자 할머니가 쩟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시밭 을 헤매다가 다 저물녘에 지쳐서 돌아온 손녀딸에게 할머니는 추호의 동정도 없는 것 같았 다. 시찌니가 절을 올리자 아버지는 마침 그 때에야 몸을 옆으로 돌려서 벽에 걸린 웃옷의 담배를 꺼냈다. 시찌니가 돌아온 지 사흘을 넘기지 못하고 할머니가 경계하던 일이 그예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는 그 사람이 아버지의 아내이건 딸이건 말 한마디라도 아버지를 다치게 할까봐 언제 나 전전긍긍이었다. 그런데 시찌니가 아버지를 정면으로 마주한 것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시찌니도 우리처럼 아버지를 경원하고 있는 게 틀림 없었다. 시찌니도 다찌니처럼 할머니를 탁본한 다혈질이었다. 내가 왜 학교에서 오줌을 싸게 되었는지를 듣게 된 시찌니가 입술을 깨물더니 다짜고짜 아버지 앞으로 돌아앉은 것이다. "아버지, 아이들이 학교를 무서워하고 있어요. 아버지도 아셔야 해요." 시찌니의 난데없는 말을 얼른 알아먹지 못한 아버지가 눈만 껌벅거렸다. 무릎 위에 팔을 걸쳐놓고 온몸은 바람벽에 부려놓은 그대로였다. "반공시간엔 교감 선생님이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교단에 세워놓고 그때의 사건을 실감나 게 설명하고 모의간첩 훈련을 할 땐 아이들이 자기조에 넣어주질 않는대요, 전교 반공웅변 대회나 맹호부대 용사들 귀향 환영식을 할 때마다 애들은 내내 고개를 들 수 없대요, 다 큰 우리는 견디어낼 수 있어요. 하지만 애들이 무슨 죄가 있나요? 아버지, 아이들이 위축되지 않도록 뭔가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나요." 시찌니는 격해지지 않으려고 몇번이나 입술을 깨물면서 호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시찌 니의 따발총처럼 빠르고, 그 어감 때문에 진저리와 울먹임이 섞인 a말들이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아버렸다. 낯색에 어떤 변화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시찌 니는 입술을 떨면서 그러는 아버지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괜히 아버지를 괴롭히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아버지가 우리에 게 새삼 해 줄 것은 없었다. 아버지가 간첩들의 비상식량을 대준 게 아니고 수걸이의 새경 을 주었던 사실은 우리도 다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부모 같은 김선태 노인과 종일댁을 도 왔던 것이지 절대로 지하간첩을 도와준 게 아니었다. 누구보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의 진짜 슬픔은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버지도 시찌니도 알고 있는 것이었 다. 아버지가 석달 동안이나 뼈를 부수는 고초를 겪으면서 밝힌 결백함은 우리가 먼저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오빠와 나는 그날 사건의 현장에 있었고 수자의 아버지 서금석과 우리 아버지의 만남을 처음부터 끝까지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자네가 살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우리 수걸이놈 걷어준 것 인사라도 하려고 이렇게 왔네. 나는 바빠서 이만 가볼 테니 부디 몸 성히 잘 계시게.' 서금석의 속삭임은 우리에게도 들렸다. 18년만의 해후에 대한 감격 때문이었겠지만 서금 석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격정적이었고 조급하게 떨리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그는 담을 넘어올 때처럼 넘어갈 때도 바람처럼 훌쩍 날아서 사라져버렸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아버지의 결백 여부는 우리에겐 이미 문젯거리조차 아니었다. 나는 물론 그날의 일로 남모르는 오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나는 그가 서금석이라고 자신 의 신분을 밝혔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도 몰래 뛰쳐나가 그를 반기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착 달라붙은 가죽옷을 입은 도둑놈보다도 눈이 옆으로 째진 사기꾼보다도 노름꾼 강도 살인범 그 어떤 흉악범보다도 더 무섭고 흉하고 잔악하고 못된, 머리는 도깨비뿔에 피칠갑 을 한 인두겁의 괴로 공산당 간첩이었던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내 아버지이기나 한 것처럼 내가 뛰쳐나가서 반길 뻔했던 그가 바로 전쟁을 도발하려고 공작을 꾸미고 다니는 어둠의 존재, 호시탐탐 우리의 행복과 안녕을 노리는 북괴의 꼭두각시 간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강원도 삼척에 사는 이승복 어린이는 먹을 것을 내놓으라며 총을 겨누고 위협하는 공비에게 당당히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외쳤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승복 어린이는 나보다 한 살밖에 더 먹지 않았지만 공비의 총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면 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외쳤다는 것이다. 내가 서금석이 반가워서 뛰쳐나가려던 그로부터 불과 한 달도 되지 않은 시간의 일이라고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조국의 원수 공산당에게 당당하게 맞서 싸우고 장렬히 산화해간 이승복 어린이만 생각하면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다. 아버지는 결백할지 모르지만 나 의 죄는 숨길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간첩선이 나타난 이후로 우리 학교는 극성스러울 만치 자주 교내 웅변대회를 열었다. 그 리고 웅변대회에 출전한 연사들은 누구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똑같은 제목으로 탁자를 치며 피를 토하듯 울부짖곤 했다. 찢어지는 마이크 소리가 교내 하늘을 넘어 먼 들판까지 울려퍼지면 나는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나의 죄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교감 선 생님이 간첩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설명을 하기 위해 나를 불러놓고 이렇게 가깝고 평범 한 우리 친구의 아버지가 바로 간첩의 표적이 되었다며 길고 긴 반공교육을 늘어놓는 거였 다. 나는 전교생이 의혹과 공포와 두려움의 눈길로 쳐다보는 교단의 한켠에서 고개를 숙인 채 오줌을 줄줄 싸고 말았다. 하지만 그 정도의 죄값뿐이라면 내 힘으로도 감당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분명 결백했고 나는 마음뿐 오빠의 손아귀에 잡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새벽이었다. 서금석이라는 존재의 시커먼 구름을 머리에 쓴 채 오빠방에서 잠이 들었던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꿈인 줄 알았다. "낙천아 낙천아." 숨죽인 그 부르짖음은 분명 노인의 목소리였다. 사지를 허둥거리며 정신없이 달려온 듯 균형감이라곤 없는 숨차고 절박한 음성이었다. 벌컥 방문 내던지는 소리가 나고 갑작스런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터졌다. 산이나 들이 우는 것 같은 그 울음과는 또다른 아주 성마른 울음소리였다. "아이고 아버님, 아니 어머님까지 이 새벽에. 지가 먼저 내려가 뵐라고 했는디 당최 발이 안 떨어져서. 아이고 어머니 이 죽일놈을 용서해주시오. 이놈을 죽여주시요오." 아버지였다. 밤새 잠을 못 이룬 듯 갈라터지고 쉰 목소리였다. "아이고 낙천아, 이놈아 그랑께 그것이 참말이란 말이냐." 밑도 끝도 없이 그것이 참말이냐고 종일댁이 비명에 가깝게 울부짖었다. 그리고 곧 난데 없이 아이고 아이고 곡소리를 터뜨렸다. 윗방의 할머니가 뛰쳐나왔고 아랫방의 언니들도 모 두 웅성거리며 뛰쳐나왔다. 나는 신발을 몇번이나 고쳐 신으며 마당을 건너서 오빠의 등뒤 에 붙어섰다. "도대체가 워치케 된 일이더냐." 노인도 목이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상기도 숨이 벅찬 듯 두 번이나 손을 크게 저었다. 아 버지가 절망스레 왈칵 주저앉았다. 나는 아버지가 기절을 한 줄 알았다. 너무나 급작스레 벌 어진 사태를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있었다. "종하형이랑 종구형은 내가 죽였소." 청천벽력처럼 아버지가 느닷없는 소리를 했다. "종하형이랑 종구형을 내 손으로 죽였단 말이요." 아버지가 갑자기 미친 것 같았다. 노인과 종일댁이 일평생을 사무쳐서 그토록 그리워한 종하형과 종구형을 아버지가 죽였다니. 아버지 당신도 혈연처럼 그리워하던 그 종하형과 종 구형을 아버지가 죽였다니, 아버지가 갑자기 어떻게 된 것만 같았다. "형들은 10.1폭동 때 주동자였다고 자루에 담아 돌을 달았었는디 나보고 나와서 밀라고 했단 말이요. 맨 마지막까지 배에 남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옆구리에 총을 쏨시로 밀라고 했 소. 그래서 있는 힘껏 밀어부렀소,. 나도 같이 떨어질라고 힘껏 밀었는디 놈들이 나를 붙잡 습디다. 사상을 확인했은께 살려준다고라." 아버지는 준비한 것처럼 쏜살같이 말을 뱉었다. 그리고는 탁탁 손바닥으로 마루를 두 번 치더니 그대로 엎어져버렸다. 아버지가 종하형과 종구형을 죽이다니, 자다가 날벼락이라는 말 꼭 그대로였다. 너무나 급작스런 충격 때문에 나는 다른 말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나 는 발이 땅에 붙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뱅뱅 돌기 시작했다. 단추 같았다. 구멍에 실을 넣어 뱅뱅 돌리다 잡아당기면 갑자기 생겨난 빵빵한 동력으로 단추가 톱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뭔가가 그렇게 내 머릿속을 마구 썰어대기 시작했다. 그때 철푸덕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것이 종일댁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이어 갈라 터진 네 번째 목소리는 바로 할머니였다. "아니 이 꼭두 신새벽에 자다 봉창을 뚜드려도 유분수제, 낙천아 니가 시방 그것이 뭔 소 린 줄이나 알고 하는 소리냐.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니가 종하를 쥑이다니 종구를 쥑이다 니, 성님 시숙님, 시방 이것이 믿기기나 하는 소리라고 듣고 계시오. 낙천아 니가 시방 정신 이 나가부렀구나." 그러나 할머니의 주장엔 어딘가 드센 힘이 빠져 있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절망이엇다. 나 는 손발이 바들바들 떨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급기야 이까지 딱딱 마주치며 떨어대 자 오빠가 팔꿈치로 나를 떠밀며 빨리 들어가라고 위협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을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가기엔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 아버지가 총알처럼 빠르게 악을 쓰듯 이 새되게 소리쳤다. "나는 살 수밖에 없었소. 죽기로 했던만큼 있는 힘을 다해서 살았소. 형들의 목숨값으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은께라. 그럼시로 막연히 그 죄상들을 낱낱이 밝힐 날이 올 거라고 생 각했소. 그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죽은 듯이, 살아 있기만 하믄 된다고 생각했소." "우리한테 한마디만 일러줬더라믄 그 오랜 수고도 가슴애피도 안 했을 틴디야." 기가 막힌 듯 넋을 놓아버린 노인이 푹 가라앉은 소리로 말했다. 종일댁은 새로 시작한 긴 울음의 꼭지를 넘어가는 중이었다. "대섬에서 살다 나와봉께 아짐은 이미 거멍숲 비손을 댕기는 길이셨고, 아재랑 아짐이 기 운을 잃을깨미, 내 죄벌은 고사하고 형들이 죽었다는 사실만으로 아짐이 실신하고 절명이라 도 해버릴 것 같아서, 입을 문 채 이 날을 기다려왔소." 노인의 목소리를 따라서 아버지도 목서리가 차분해졌다. 나락의 바닥에 닿아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했다가 아재 아짐이라고 했다가 나는 왠지 그것이 아버지의 횡 설수설인 것처럼 들렸다. 그것은 만행을 저지른 자의 불안감 때문인 것 같았다. 강직하고 격 이 바르던 아버지의 그런 자세는 갑작스런 파륜으로 이해되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이다니, 더구나 노인과 종일댁의 자식들을, 그리고 그걿게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속여오다니. 나는 바들바들 떨면서 담장과 지붕 능선이 희붐해 보이는 새벽의 어둠 속에서 사라져 버린 하늘을 막막히 바라보았다. 빵빵한 동력으로 단추가 썰어낸 것이 드디어 나에게서 분리되어 떠나가는 것 같았다. 나의 우주를 만들어주었고 지켜주던 절대자 가 내 눈앞에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벽이나 어둠 또는 허공 속으로 아버지의 존재가, 그 의미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되았다. 금석이는 니가 총에 맞아 죽은 줄로 알고 있더라. 양쪽 옆구리에 분명히 총을 두 번이나 맞았다고, 그래서 너는 느그 조상들이 도왔고 우리 아아들은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 키로 할란다. 첫문에 사실을 다 말해줘서 고맙구나. 가세, 일어나." 노인이 목이 막혀서 헉헉거리는 종일댁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할머니가 노인의 바짓가랑 이를 거머잡았다. "시숙님 내 말도 잠 듣고 가시오. 우리 아아 목숨 붙은 것이 죄가 되아 일평생 지옥을 살 아왔소. 그것만은 잠 알아주시오. 옆구리에 구멍이 난 채로 즈그 이종사촌들이랑 온 바다를 다 뒤집어 종하랑 종구 시신을 건졌더라요. 그 험한 세상에 그 험한 만여 물살을 다 뒤집고 더터서 기어이 찾아냈더라요. 종하랑 종구는 시방 대섬에 묻혀 있소. 아아가 해마다 성묘하 고 제사도 지낸다요. 시숙님 성님, 이래도 원망만 하실라요. 아아도 사람의 도리를 다할라고 있는 힘 없는 힘 죽을 욕으로 살아온 사람이오." 그때 마침 큰언니가 남폿불을 켜서 심지를 올리고 있었다. 자다 나온 할머니는 완전히 산 발을 한 모습이었다. 종일댁이 결국 혼절하듯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자 노인이 억지로 일으 켜 세웠다. "알았소. 자 가세, 그만 일어나." 노인과 종일댁은 더 이상의 충격은 감당할 수가 없다는 듯 짧은 대답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리고 온 세상이 뒤집힌 듯한 공포를 몰고 간첩선 이야기가 터지더니 한낮이 지나기도 전 에 아버지와 노인과 말집네는 나란히 어디론가 불려갔다가 석달 만에야 돌아온 것이었다. 앞 뒤 내용이야 어떤 것이건 아버지가 노인의 자식들을 떠밀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충격이 되고 말았다. 세상을 향해 우리는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의좋은 형제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몰래 가져다 나르던 아버지와 노인의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결국 아 버지의 위선에 다름아니었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드러나버린 것이다. 할머니는 인간의 도리 를 다했노라 주장했지만 그것은 아버지의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마음속의 죄 책감을 그런 식으로 갚아왓던 것이다. 백일하에 드러난 아버지의 위선은 우리가 가난뱅이가 되고 아버지가 간첩혐의를 받아 뼈가 녹는 고초를 겪고 이웃의 경원을 당하고 언니들의 앞 길이 망가지고 나와 제남이가 외톨이로 소외된 그 어는 것보다 나쁜 일이었다. 시찌니의 출현으로 우리 집의 공기는 아예 살얼음판이 되어버렸다. 시찌니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불쑥불쑥 아무거나 묻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고개를 처박은 채 밥을 먹던 시찌 니가 갑자기 젓가락질을 멈추더니 아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식구들이 줄어든 이후로 우리 는 동그란 두레상을 펴고 다함께 밥을 먹었다. "아버지, 보도연맹이란 게 뭔가요?" "..." 아버지는 시찌니의 말을 못 알아먹은 것도 같고 미처 못 들은 것도 같았다. 대꾸 없이 규 칙적으로 숟갈질만 계속했다. 엄마가 나무람도 격려도 아닌 멍한 눈길로 돌아보자 시찌니가 다시 물었다. "전쟁시에 전향한 사상범들이 보도연맹원이 되었다면서요?" 그제서야 뛸 듯이 깜짝 놀란 건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반사적인 듯 숟가락으로 탁 밥상을 때렸다. 할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오줌을 싼 이야기를 한 것도 시찌니가 아버지를 공격한 것 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이누무 가시나가 시방 뭔소리라냐? 이나마 집구석 홀라당 까먹지 못해 어느 상년에 날아 간 까마귀 깃털이냐고! 이런 순 방정이 있능가." "할머니는 좀 가만히 계세요." "뭣이 어쩌고 저째?" "진상을 알고 싶은 것뿐인데 할머니가 왜 그러시냐고요." "아이고 내 가슴아! 가시낭년 갈쳐논께 애비한테 진상을 밝히라고? 아나 이년아, 너 잘났 다. 뼛골 빠지게 농사지어 높은 학교 갈쳐논께 뭐 진상을 밝혀?" "아이고 어무니 진정하세라. 철없는 아아가 저도 답답해서 묻는 소리를 갖고 괜히." "뭐 괜히라고오? 이것이 뭔 꼴이다냐, 아이고! 진상은 밝혀서 뭐할래? 니 애비 고발할래? 새파랗게 어린 가시낭년이 눈 빳빳이 뜨고 지애비 닦달하는 이것이 시방, 에미 니 눈에는 이것이 시방 범상한 일로 보인단 말이지야." 사태가 뜻밖의 곳으로 급전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까무러칠 것처럼 분노하며 엄마와 시찌니를 향해 번갈아 팔을 마구 휘젓자 엄마도 덜컥 사태를 파악한 듯 언성을 높였다. "어무니이 무신 말씸을! 이것아 빌어 빨리! 가시낭년이 입에 올릴 말이 따로 있제, 어서!" "앉은자리 선자리 먼지 한톨 없이 일구월심 인간의 도리로 정성을 다해왔건만, 아이고 억 울해라. 자다가 홍두깨더라고 자다가 인사 한 번 받고 세상사 이런 고초가 없는디, 사람 운 수가 한번 어그러진께 밥상머리에서, 자식년까지, 눈 빳빳이 뜨고 문초를 하네 그랴." "할머니 제발, 묻지도 못한단 말예요?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어서 묻는 거예요. 나도 알고 싶다구요." 누가 봐도 할머니의 과민반응이었다. 아버지 역시 눈을 왈칵 벌려 뜨고 시찌니와 엄마를 번갈아 노려보다가 할머니의 지나친 반응이 부담스러운 듯 슬며시 숟가락을 놓고 일어서버 렸다. 아버지가 중간에 밥숟갈을 놓는 게 안타까워서 할머니는 또 다다닥 가슴 쥐어뜯는 시 늉을 했다. 도대체 보도연맹이 뭐길래 그 한마디만으로 할머니가 저렇게 까무러칠 듯 화를 낸단 말인가. 하긴 정확한 말뜻은 알 수 없지만 거기에 무시무시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았다.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모이를 쪼던 닭들이 이렇다 할 만한 전후 사정도 없이 눈 깜짝할 순 간에 깃을 치며 뛰어올라 서로의 벼슬을 찢어발기듯 그렇게 한순간 이해할 수 없는 말 한마 디에 모든 것을 던지는 어른들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등줄기가 자꾸 동그랗게 오무라들곤 했 다. 심은희 선생님이 노인의 큰아들인 김종하의 약혼자였다는 사실은 뒤에야 밝혀졌다. 심은 희 선생님과 수자가 사라진 학교는 텅 빈 도깨비건물만 같았다. 아니 나는 수자만 떠올리면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공포감에 휩쓸렸다. 나는 수자가 누구였는지도 기억할 수 없었다. 수자가 그토록 목놓아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간첩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억상실의 이유는 충분했다. 수걸이마저 잃은 말집네가 아버지처럼 어딘가를 다녀와서 방안 가득 각혈을 해놓고 죽어 버리자 수자는 아주 먼데로 식모살이를 떠났다. 도시의 부자들은 식모가 잘못을 저지르면 불에 달군 연탄집게로 때린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에게는 제정신으로 수자를 기억할 힘이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구였으며 무엇이었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어느 때보 다도 초라했고 주눅이 들었다. 나는 노인하고의 날들도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왜 노인을 찾아다녔으며 어떤 이야기들을 들었는지도 까마득히 잊었다. 청산도를 다녀온 간첩들은 거멍게에 배를 대 놓고 사천둑을 따라 와서 일차로 노인의 집을 찾아갔다는 거였다. 마을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노인은 그전부터 북한의 지령을 받고 종일댁으로 하여금 날이면 날마다 망을 보게 하고 먼바다를 나다녔으며 일부러 사찬둘 아래 외딴집으로 이사를 했었다는 소문이었 다. 노인이 바로 그 보이지 않는 공포의 검은 그림자, 지하간첩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그동안 노인에게 홀려서 보지 못했던 노인의 진짜 모습을 상상했다. 우리가 미 술시간마다 그리는 포스터의 빨갱이처럼 노인은 부사리 소뿔과 피칠갑 얼굴에 불펴진 눈을 가진 거멍숲 도깨비의 모습으로 밤마다 꿈속을 찾아오곤 했다. '너였구나 니가 우리 아아들 을 밀어 부렀구나' 하며 아버지가 아닌 나를 쫓아올 때도 있었다. 노인이라는 존재는 내 눈앞에 떠오른 순간 바로 번개처럼 나를 자지러지게 하고 마는 한 도 끝도 없는 공포 자체였다. 하지만 노인은 어디를 가나 내가 가는 곳의 시야 끝 어느 한쪽에 꼭 그 모습을 드러냈다. 뒤께 오막살이를 소개당한 노인은 면사무소 옆 지서가 빤히 건너다 보이는 우대미 외딴집으 로 이사를 했다. 사장나무 그늘에서 건너다보면 노인은 언제나 모기장을 씌워서 장대 끝에 매달아 말리던 생선을 손보고 있거나 울타리가 없는 텃밭에서 가지나무에 지주대를 받쳐주 거나 하고 있었다. 새벌 논으로 새참 심부름을 가다보면 노인은 여전히 낚시장대를 소리나 게 출렁이며 동네 마당을 지나가고 있었고 하교길에 뭔가가 미심쩍어서 돌아보면 멀고 먼 사천둑 위나 거멍숲을 빠져나온 하얀 신작로 어디쯤을 햇빛속으로 곧 사라져버릴 듯 아른아 른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두리번거려서라도 노인을 찾았고 찾은 즉시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다. 시찌니가 오기 전에는 일부러 제남이를 끌고 사천둑을 서성거리며 하구께에 앉아 있는 노인을 몰래 바라보다 서둘러 돌아오기도 몇번이었다. 육학년이 되자 중학교에 진학할 입시생들은 밤이 되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과외수 업 때문이었다. 나는 스스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집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학교에는 아버지가 아파서 진학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날마다 시찌니와 낚시를 다녔다. 시찌니는 우리를 학교에 다녀오기 바쁘게 데리고 들판으로 나갔다. 시찌니도 더 이상 할머 니나 아버지와 부딪치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에 차라리 밖으로 나대는 거였다. 우리로서는 정말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드디어 의지처를 얻게 된 우리는 시찌니의 치마꼬리에 매달려서 미친 듯 들판을 쏘아다녔다. 논마다 충분히 물을 잡아 초벌갈이로 뒤집어놓은 먼 들판은 기름을 발라놓은 것처럼 눈부 신 빛을 튀기고 민들레와 제비꽃과 미나리 아재비가 다투듯 피어나서 논둑마다 장식을 하고 있었다. 나는 긴 머리채를 잃고 오래도록 슬퍼했지만 시찌니가 만들어준 토끼풀꽃 화관을 쓰곤 그만 마음을 풀었다. 제남이도 맨발을 벗고 뱀 나온다 뱀 나온다 소리에 기겁을 하면 서도 소복하게 자란 쑥무더기를 밟아대며 까르르 깔깔 입천장이 보이도록 웃어젖히곤 했다. 민물고둥으로 게낚시를 하자고 제안을 한 건 제남이었다. 밤똥 싸면 똥통에서 올라와 똥구 멍을 씻어준다는 털손처럼 집게발에 털이 덥수룩한 참게는 민물고동을 제일 좋아한다. 물풀 이 많은 서답내와 돌덩이를 얽어서 보를 막은 만복천은 참게의 천국이었다. 우리는 게를 만지다가 작두처럼 살벌하게 생긴 집게발에 물리게 되면 재빨리 '똥 마렵다 놔주라! 똥 마렵다 놔주라!' 하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면 정말로 게가 집게발의 힘을 슬며시 풀어버렸다. 무작정 손을 뿌리치며 나 죽는다고 소리쳤다간 게는 손가락에 피멍이 들도록 더욱 세게 조였다. 그래서 시찌니는 똥 마렵다 놔주라는 주문이 미신이 아니라 위급할수록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서 게의 마음이 풀어지게 하는 심리요법이라고 가르쳐주었다. 위 급한 일에 부닥치면 우리 할머니 같은 기지를 발휘하던가 오히려 똥 마렵다 놔주라 같은 재 미있는 말을 떠올리라는 것이다. 햇볕이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자 시찌니는 니찌니가 쓰던 곰팡이 핀 밀짚모자를 꺼내 썼고 우리는 토란잎을 따서 머리에 쓰고 다녔다. 토란밭을 작살내겠다고 엄마가 나무라면 호박잎 을 대신 쓰고 다니기도 했다. 우리는 시를 외우고 노래를 부르며 낚시를 하다가 너무 더우 면 옷을 활활 벗어버리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시찌니가 구멍 뚫은 양재기에 담아 가지고 다니던 까만 빨랫비누 조각으로 머리도 감겨주고 몸의 때도 벗겨주었다. 밥상머리에 서 아버지를 마주하는 일만 아니라면 대체로 시름없는 나날이었다. 그날도 우리는 둠벙처럼 동그랗게 홈이 파인 서답내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쑥을 뜯어다 귀를 막고 물속을 한참 끼어다니다 보니 누군가가 널찍한 서답돌에 지게를 받치는 게 보였 다. 나는 처음에 길가던 사람이 발을 씻거나 수리조합에 다니는 물감독이 물 수위를 보려는 것인 졸 알았다. 밀짚모자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게에서 빨래통을 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하얀 빨래가 소복한 나무통을 내리는 바람에 너무나 기이 해서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뜻밖에도 그 사람은 노인이었다. 노인을 그렇게 가까이서 바라보기는 이년 만이었다. 나는 나도 몰래 물 밖으로 몸을 내민 채 꼿꼿이 서 있었고 둑 위에다 지게를 치워 놓고 돌아오던 노인이 내 얼굴에서 딱 눈길을 멈추었다. 이제야말로 나는 옴짝달싹할 방법이 없었다. 몸뚱이를 그 자리에 세워둔 채 혼이 물바가지처럼 주르르 흘러내리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눈에서 그 만 주르르 눈물이 흐른 것이다. 얼른 눈을 깜박여보아도 눈물은 더욱 펑펑 쏟아졌다. 다 저 문 날 우리 부뚜막에서 뜻하지 않게 시찌니는 발견했던 것처럼 나는 급기야 울컥울컥 어깨 까지 들썩이며 눈물을 쏟았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몇번이나 노인의 얼굴을 확인했다. 도깨비뿔에 피칠갑의 흔적은 어디 에도 없었다. 움푹 팬 눈자위나 푸석해진 수염만 아니라면 노인은 다정한 옛 모습 그대로였 다. 옛날의 그리움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어쩌면 이런 해후를 손꼽아 기다렸 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할아부지!" 나는 목이 메어서 한마디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런, 우리 검은 눈이 아니냐?" 노인도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다시 확인했다. 엉킨 낚싯줄을 풀던 시찌니도 막 물속을 기 어나오던 제남이도 그러는 우리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노인이 바로 아버지의 '웃집 아재' 라는 사실을 알게 된 시찌니가 팔을 걷어붙이며 빨래를 대신 하겠다고 나섰다. 노인이 괜찮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빨래를 뺏다시피 한 시찌니는 고개를 처박은 채 묵묵히 방망이를 퍽퍽 두들겨가며 맑은 물이 똑똑 떨어지도록 빨래 한통 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물기를 없앤 비누통과 방망이를 통 위에 얌전히 얹어놓고 고개를 숙인 채 팔소매를 풀어 내리던 시찌니가 갑자기 서답돌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던 노인이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저희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 말을 겨우 마친 시찌니의 눈에서 와르르 눈물이 쏟아졌다. 시찌니의 느닷없는 행동 때문 에 그렇지 않아도 고개를 처박은 채 고무신 속의 물방게만 집요하게 괴롭히던 우리는 뛸 듯 이 놀랐다. 더구나 우리는 시찌니가 아버지를 아주 미워하는 줄 알고 있었다. 할머니가 과민 하게 아버지를 보호하려 들 때마다 시찌니가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기 때문이다. 노인 도 얼굴을 뒤로 빼며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반밖에 타지 않은 담배를 서답돌에 눌러 꺼서 재를 턴 다음 다시 쌈지에 담으며 천천히 시찌니를 돌아보았다. 서답돌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갑자기 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했다. "바로 앉아라. 네가 그럴 필요는 없니라. 느그 아부지는 용서를 받고 말고 할 것이 없는 사람이다. 아 바루 앉으래두? 백주 대낮에 뭔 짓이냐. 뵈기 싫다. 아 어서." "할머니가 충격으로 문밖 출입도 못하시고 눈까지 잃으셨다는 거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할 아버지께서 빨래를 오신 거잖아요. 저희가 앞으로 빨래랑 청소랑 해드리겠어요. 저희 할머니 처럼 모실게요. 제발 아버지를 용서해주세요, 할아버지." 시찌니가 눈물로 호소하자 노인은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첫 연기를 후 뱉어놓고 헛! 하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얼굴을 편안하게 고쳤다. "사람이 살다보면 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일도 더러 만나고 그러는 법이다. 낙천이가 불 가항력을 만나 내내 지옥을 살아온 것 나도 안다. 나도 내내 지옥을 살아왔다만 이제 와서 잘잘못을 가리고 용서를 하고 말고 옛일 덧들여서 좋을 거가 뭣이겄냐. 그저 팔자 소관이거 니 서로간에 입 다물고 조용히 잊는 것만이 최상이니라." 손가락에 노란 진물이 배도록 담배를 끝까지 태운 노인이 허공을 쓸어 보며 자리를 털었 다. 시찌니가 덥석 노인의 빨래통을 부여잡았다. "할아버지, 제발 저희를 용서해 주세요. 저희는 모두 아버지가 저지른 과거의 일로 주눅이 들어 있어요. 저렇게 어린애들까지 위축이 되어 기를 못 펴요. 학교에도 친구들에게도 집에 도 마음을 못 붙이고 들판만 쏘다니며 살아요." 시찌니가 절규하자 빨래통을 들어 올리려던 노인이 조용히 나를 돌아보았다. 염려와 충격 이 함께 들어 있는 눈빛이었다. 나는 차마 노인의 눈을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종일댁은 절망으로 앉은뱅이가 되고 그것도 모자라 눈먼 봉사까지 되었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고 우리 의 주눅을 호소한다는 것은 정말로 염치없는 일인 것 같았다. 시찌니가 지나치게 이기적인 것이다. 나는 시선을 얼른 물위로 던져 버렸다. 한떼의 피라미들이 물살을 거슬러서 온몸의 비늘을 깨끗이 씻어 빗고는 대한뉴스의 비행기 쇼처럼 싹 방향을 바꿔가고 있었다. 그때 노 인이 빨래통을 놔둔 채 훌쩍 서답돌을 건너왔다. "아가, 검은눈아." 노인이 내 곁에 쭈그려 앉으며 나를 불렀다. 나는 가슴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그 보송하던 살빛은 다 어디로 가고 키만 앙상하게 커부렀구나, 쯧쯧." 노인이 새삼 이리저리 나를 살피며 혀를 찼다. "아그들은 친구들하고 뛰댕기고 공부나 하고 그러는 것이제 어른들 일에 관심을 갖고 그 러믄 못쓴다. 아부지 일로 니가 마음을 상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당최 그러지 마라, 못 써." 노인은 나를 강하게 설득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하다는 건 노인도 알고 있었다. 노인이 쩟, 하고 마뜩찮은 소리를 내며 하늘을 힐끗 쳐다보았다. "오라, 그라고 봉께 우리 검은눈이 마음이 상해서 그렇게 할애비를 멀리 했었구나. 언제 거멍다리로 한번 오니라. 내가 땅꽈리 이만큼 따주마, 응? 둑 옆댕이에 무데기로 열렸더라." 노인이 한번 더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쯧쯧 혀를 차더니 성큼 서답돌을 건너갔다. 그리고 빨래통을 들고 둑을 올라가더니 지게에 지고 둑 아래로 이내 사라져버렸다. 10. 날 좀 잡아가거라 색소폰 아저씨만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좀더 행복했을 것이다. 뱀 나온다고 서로를 놀리며 논고둥을 잡을 때도 발바닥만한 게를 낚아올릴 때도 시찌니는 깔깔거리고 기뻐하며 여간 행복해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기뻐하는 순간순간에도 딱딱하 게 굳어버리곤 하는 시찌니의 얼굴을 나는 놓치지 않고 있었다. 마을과 들과 서답내를 넘어 만복천까지 울려퍼지는 색소폰 소리 때문이었다. 시찌니가 마을에 돌아온 후 색소폰 아저씨 의 날궂이 음악은 돌연 시도 때도 없는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을 가득 채운 음악소리는 정말이지 꿈속의 일처럼 모든 것을 비현실적으로 느끼게 만 들어버리곤 했다. 나는 순간순간 나 자신이 팔팔거리는 수백마리의 나비가 된 것 같곤 했다. 돌돌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여가는 맑은 도랑물이 되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지랑이처럼 그저 한없이 흔들리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색소폰 아저씨가 즐겨 부는 곡 이름은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그냥 익숙한 선율에 귀를 맡기고 마음을 맡길 뿐이었다. 그러다보면 저절로 영혼까지 하늘 꼭대기로 따라 올라가는 기분이 되곤 했다. 어 떤 날은 나도 아는 유행가를 연속으로 쉬지 않고 불어젖힐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들판에 서 일을 하던 사람들도 바쁜 손길을 늦추며 목청껏 따라 불렀다. 그러나 색소폰 아저씨가 부는 유행가는 거의가 사랑의 절망을 노래하는 슬픈 것들뿐이었다. 맺지 못할 인연일랑 생 각을 말자고 하거나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괴로운 시련이 그칠 줄 몰랐다면서 사랑이라면 하지 말 것을 하고 피를 토하듯 가슴을 쥐어짜듯 한숨과 슬픔으로 흐느끼는 노래들이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하고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맺지 못할 인연일랑 생각을 말자고 하면서 날이면 날마다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나는 색소폰 아저씨의 음악을 누구보다 좋아했다. 사천을 가득 메우 고 곤곤하게 흐르는 물살처럼 마을 하늘을 꽉 메우고 흐르는 그 아름다운 선율은 아주 어린 날부터 내 가슴도 가득 적시며 오늘까지 흘러왔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음악을 전해주는 우 리 마을의 하늘을 사랑하는 것처럼 색소폰 아저씨도 음악을 전할 수 있게 해준 하늘만 사랑 했으면 하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는 언제나 비 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담벼락 그늘로만 숨어다녔다. 마을마다 콩 쿠르 대회가 있으면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초빙되어 가서 밤새워 색소폰을 불다 새벽같이 돌아오면 또 세상과 담쌓고 말았다. 수백 마리의 구렁이를 고아 먹어야 낫는다는 폐병을 앓 는 색소폰 아저씨는 어쩌면 이 세상 무엇보다도 자신의 비극을 사랑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린날부터 그의 음악을 들으며 감정상태를 낱낱이 새겼던 나는 그 자신도 모르는 그의 마 음을 다 알 것 같았다. 나는 그렇게나 열렬히 자신의 비극을 사랑하는 사람은 우리 시찌니에게 가당치 않다고 생 각했다. 시찌니는 누가 뭐라건 우리 가문의 명운을 한 몸에 지고 신천지에 보내진 개척자였 으며 아직도 우리의 별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나는 시찌니가 민대갈네 손자의 음악에 넘어 가버릴까봐 그것이 항상 걱정이었다. 나는 원래 걱정이 많은 사람인 것이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립다' 는 유행가가 흐 를 때였다. 낚싯줄을 촐랑거리며 게를 유혹하던 제남이가 갑자기 눈을 우는 것처럼 찌푸리 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아오' 익숙하게 뽑아젖혔 다. 시찌니가 못 본 척하려다가 풀썩 웃음을 터뜨렸다. "제남아, 어린애가 무슨 그런 노래를 부른다니?" "나는 학교 노래보담 슬픈 노래가 더 좋아." 시찌니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버렸다. 제남이는 학교를 너무나 싫어했다. 아니 무서워했다. 제남이는 학교는 그만 다니고 집에서 놀다가 커서 대학에 바로 가겠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도 슬 픈 유행가가 좋았다. 그것은 슬픔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아는 이 세상의 모든 유행가는 다 우리 큰언니 같은 사랑의 실패뿐이었다. 나는 노래를 통해서 우리 큰언니 의 슬픔을 이해했다. 아무 죄없이 사랑을 잃고 느리게 박동하는 자신의 심장에 귀를 기울인 채 낮이나 밤이나 바늘을 퐁퐁 뽑아올리는 큰언니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가슴이 시렸다. 그날부터 시찌니는 우리한테 극성스레 노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 자, 진주 조개잡이, 섬집 아기, 등대지기 등등이었다. 중고등학교에 가면 배운다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보다' 라거나 '강나루 건너 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같은 아름다운 시도 외우게 했다. 우리는 목젖 이 너덜거릴 정도로 바락바락 노래를 따라 부르고 목이 아프면 목구멍에 기름을 바르듯이 시를 낭송하곤 했다. 나는 시찌니가 색소폰 아저씨를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 다. 그러나 사건은 엉뚱하게 터져나왔다. 시찌니가 색소폰 아저씨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소문 이었다. 잿등 아짐이 품앗이 갔다가 듣게 된 것을 엄마에게 귀띔해 준 것이었다. 우리 식구 들만 까마득히 모른 채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는 거였다. 엄마는 처음에 시찌니만 불러 놓고 닦달을 했다. 네가 도대체 어떻게 행동하고 다녔기에 그런 소문이 났냐는 거였다. 시찌 니는 헛소문이라며 팔팔 뛰었다. 엄마는 그럴수록 다 큰 가시낭년이, 대학까지 나온 가시낭 년이 혼사길 안 막힐까봐 들개마냥 들판만 쏘다니더니 기어이 일을 만들었다고 시찌니를 때 리기까지 했다. 마을에서 소외된 분풀이까지였다. 시찌니가 억울하다고 소리치며 그만 흐느 꼈다. 마당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기던 할머니가 엄마를 불러냈다. 그런 식으로 다룰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집구석이 자빠질라믄 빨랫줄에 널어논 치맛자락부터 바람을 타더라고 바로 그짝이다. 아 아만 닦달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께 에미는 날 따라온나." 할머니는 치맛자락을 휙 잡아당겨서 허리끈으로 깡똥하게 치켜묶은 다음 손바닥으로 쓱쓱 머리를 쓸어빗고 본등 뒷길을 돌아 아리대미로 내려갔다. 전투를 치르러 가는 군인처럼 절 도있는 걸음걸이였다. "사람을 잡아도 유분수제 처니가 애를 배다니. 내 아무리 운수가 사나워 오늘날 이 지경 이라제만 동네 인심이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아무리 가운이 기울었기로 어디로 봐서 그런 놈하고 짝을 맺을 거라고,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삐삐빼빼 촐래나 불 어대는 그런 베짱이 풀버러지 같은 인사를 감히, 아나 이놈! 아무리 한다고 너 같은 놈이 감히 내 집을 넘본단 말이더냐." 할머니는 생각할수록 억울한지 바쁜 걸음 중에도 땅! 발을 구르며 울분을 터뜨렸다. 정확 히 동네 인심을 향한 것인지 색소폰 아저씨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 풀벌레처 럼 노래만 부르는 민대갈네 손자라면 불가촉 천민이라도 된다는 듯한 태도였다. 할머니는 색소폰이라는 발음이 낯설 때마다 '그 뭣이냐 오라 씩 모시기 퐁' 이라고 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색소폰을 대나무에 갈대청을 붙인 촐래로 격하해서 부르고 있었다. "내 비록 삼재팔난을 당하여 자라못은 하고 있다만 두고 봐라, 우리 집안이 으떻게 지켜 졌는디. 더한 고초 더한 역경, 산 넘어 산 넘고 물 건너 또 물을 만나도 다 헤쳐왔어. 에미 는 이런 때일수록 새끼들 단속 잘 하고 마음 단단히 묵어야 돼. 털끈이라도 구멍이 안 새게 단속을 하란 말여." 할머니는 또 억장이 무너진다는 듯 길 가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며 주먹으로 가슴을 누르 고 발을 땅땅 구르며 엄마를 단속했다. 시찌니의 소문으로 할머니는 비로소 우리 집의 몰락 을 실감한 것 같았다. 대문을 젖혀둔 채 색소폰 소리가 그친 민대갈네는 조용하다 못해 고적하기까지 했다. 뒷 문으로만 통하는 사랑채에서 만날 들려오던 민대가리 할아버지의 주문 외우는 소리도 그쳐 있었다. 할머니는 심호흡으로 아랫배에 힘을 주며 무작정 색소폰 아저씨부터 불러댔다. "문영아 이놈, 문영이 집에 있거덩 나 잠 보자!" 할머니의 고래땅 같은 소리에 작은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던지 비에 젖은 것처럼 후줄그 레 늘어진 색소폰 아저씨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내다보았다. 할머니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으 라며 호통부터 쳤다. 안경을 찾아쓰고 할머니와 엄마를 확인한 색소폰 아저씨가 잠결이어서 인지 정말로 우당탕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우리 시째가 니 아를 뱄다고들 허는디, 참말이냐? 곧대로만 불어라. 일은 순리대로 치를 것인께 곧대로만 불어. 만약 거짓말을 했다간 너 죽고 나 죽는 사단이 나고야 말 것인께. 그 랑께 그것이 참말이더란 말이냐?" "아, 아니요." "뭐라고? 아 이 늙은이한테도 들리게 큰 소리로 말해!" 색소폰 아저씨는 의외로 순순하게 대답했지만 할머니는 기를 제압하려고 일부러 무섭게 다그쳤다. "아, 아니라고요오." "그라믄 애초에 소문은 누가 만들었냐, 너냐? 니가 소문을 만들었어? 너로구나." "..." 단도직입으로 손가락을 들이대며 너냐고 물어대자 얼떨결에 당한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그 것이 사실인지 색소폰 아저씨는 고개를 수그린 채 묵묵부답이었다. 번데기처럼 쭈그린 모습 이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알았다! 하면서 할머니가 돌아섰다. 할머니는 곧 잿등으로 올라 우대미 동사무소로 향했다. 욋소리쟁이한테 우리 집으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달라고 부탁햇 다. 엄마한테는 양조장에 연락해서 막걸리 한 말을 불러오고 술안주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보리타작도 모내기도 여름 밭갈이도 다 끝나고 농한기에 든 사람들은 심심하던 차에 무슨 일인가 하고 비죽비죽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어지간히 모여들자 할머니는 먼저 술을 한잔씩 돌린 다음에 마을에 이러이러한 소문이 돈다던데 사실이냐고 큰소리로 물었다. 아무도 대답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는 욋소리쟁이를 시켜서 색소폰 아저씨를 불러오게 했다. 색소폰 아저씨는 곧 죄인처럼 고개를 처박은 채 불려왔다. 할머니는 소문의 진상을 다시 물었다. 색 소폰 아저씨는 물론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헛소문을 누가 만들었냐고 다그쳐 묻자 모른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긴 머리카락과 잠자리처럼 큰 안경에 가려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쩟 혀를 차며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이러지들 맙시다 이러지들 맙시다!" 금방까지 분에 못 이겨 고압적이던 할머니의 목소리가 갑자기 사설조로 넘어갔다. 울음을 터뜨릴 듯한 갑작스런 할머니의 태도에 사람들이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처니가 아를 배다니라, 금하리 조씨네 딸리 혼전 수태를 하다니라. 다같은 하늘이고 한 울타리 안에 자식 기르고 삼시로 제발 이러지들 맙시다. 더더구나 문영이 이 아야말로 신병 에 제 몸뚱이 하나도 건사가 어려운디 가당키나 한 일이요, 가당키나 한 일이여? 불쌍한 아 한테 말 한마디라도 보태주지는 못할망정 그런 모함이 어디 있단 말이요, 그런 모함이." 할머니가 뜻밖에 색소폰 아저씨를 같은 피해자로 껴안으면서 은연중에 가당찮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공동이 가해자 입장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금방 낯을 쭈그러뜨리며 그동안 의 어떤 것도 본의가 아니었음을 변명하려고 애를 썼다. 괜히 불려와서 이상한 일을 당한다 싶다가 막걸리 한잔에 기분이 풀어진 것이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권커니 잣거니 이 틈 저 틈으로 술을 돌리며 쉴새없이 탄식하고 호소했다. "무서도 무서도 세치 혀끝으로 옮는 재앙이 젤 무섭다 안합디여. 예 말이요 동네 사람들, 제발 예전과 같이 우리 잠 바로 봐주시오. 동란 때 낮밤으로 바뀌는 세상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었답디야. 운때 사나운 우리 낙천이가 겪는 일을 자기 일이라고 한번 생각해보 시오. 안 그래도 원통절통한 사람한테 워치케 이런 추하고 애먼 소문까지 뒤집어 씌운단 말 이요 그래." 할머니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그동안의 소외감에 대한 설움인 것 같았다. 동란 때 같은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에 할머니의 호소가 금방 먹혀들어간 것 같았 다. 운때 사나운 우리 낙천이라 겪는 일을 자기 일이라고 한번 생각해보라는 말에 여기저기 서 '그라고말고 그라고말고' 중얼거리며 눈물을 찍어내기까지 했다. 급기야 술이 한잔씩 얼큰해진 사람들은 저마다 변명처럼 한마디씩 하고 나섰다. 똥통에 대나무를 담가주지 않은 것도 품앗이를 기피한 것도 헛소문을 미리 막아주지 않은 것도 다 본심은 그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츰 기분이 좋아진 할머니는 텃밭의 오이와 가지를 마 구 따다가 치맛자락에 썩썩 문질러 닦고 팍팍 쪼개주며 안주도 술도 얼마든지 먹고 마시라 고 호기를 부렸다. 흥이 난 누군가가 무릎장단을 때리며 놀다 가소 노올다 가소오, 노랫가락 을 뽑자 앞집 주만이 아저씨네 할머니가 영화배우 사진이 붙은 부채를 소고처럼 놀리며 덩 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덩달이로 흥이 난 한몰댁이 부엌 설거지통에 물바가지를 담아 와서 두당당 두당당 박자를 맞추자 마당은 갑자기 춤 노래판이 되어버렸다. 때아닌 한여름 저물녘의 이상한 놀이판이었다. 그렇게 해서 할머니는 이웃들의 마음을 얼마간 되돌려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맛이었 다. 시찌니가 금족령을 당한 것이다. 대문 밖엔 한 발짝도 나가지 말라는 할머니의 엄명이 있었다. 들개처럼 싸돌아다니니까 풀버러지 베짱이 같은 사내가 함부로 넘보고 소문에 말리 게 된다는 논리였다. 선머슴아처럼 요리나 집안청소 같은 건 취미가 없고 바느질이나 수예 같은 것은 더욱 젬병인 시찌니가 몸살을 하면 할수록 할머니의 경계는 더욱 삼엄해졌다. 견 디다 못한 시찌니가 빨래통을 이고 나오고 우리는 쥐똥나무 울타리 밑에 숨겨놓은 낚싯대를 살금살금 들고 나와서 해질녘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가 시찌니는 결국 엄마한테 지겟작 대기로 흠씬 두들겨맞게 되었다. 서답내에서 노인을 만난 바로 그날이었다. 박달나무 작대기로 맞아 아프기도 하고 원통하기도 하고 자기 신세가 한없이 답답하기도 한 시찌니는 급기야 열을 팔팔 끓이며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버렸다. 아버지는 모든 것에 관심을 버렸기 때문에 뽕나무벌레 같은 민방약조차 구해다줄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가 피멍 이 든 곳에 된장을 바르려고 하자 그것은 시찌니가 한사코 거절했다. 뒷방것 또딸이처럼 약 한첩 없이 호된 병을 치르게 된 시찌니는 일주일 만에야 병석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햇빛에 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머리를 감은 다음 가방을 싸기 시작 했다 집을 나가서 어떻게든 살 궁리를 찾겠다는 거였다. "행남아, 제남이 데리고 공부 열심히 해. 돈 많이 벌면 꼭 데려갈게. 너희만큼은 아무도 모르는 넓은 세상 좋은 세상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게 해줄 테니 기다려, 응?" 시찌니는 슬픈 영화의 대사처럼 내 손을 꼭 부여잡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떠나가버렸다. 정작 황금의 시간인 여름방학이 다가왔는데 시찌니가 떠나버린 것이다. 우리는 코가 석 자나 빠진 것처럼 다시 풀이 죽어버렸다. 그 많은 소외의 시간 그 적나라 한 햇빛 그 공포의 적막을 다시 우리 힘으로 이겨내야 했다, 등을 활처럼 휘고 두 손을 가 릿대처럼 뻗쳐서 그 모든 것을 밀고 나가야 할 것이었다. 중학교에 진학할 아이들은 방학임에도 학교에 나갔다. 의붓엄마 밑에서 자라거나 겨떡만 먹어 변소에서 일을 볼 때마다 밑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집 아이들만 방학을 맞은 셈이었 다. 나는 정말로 중학교라는 또 하나의 모욕과 굴욕과 공포를 맞고 싶지 않았다. 그냥 쥐죽 은 듯이 지내다가 뽕나무를 심은 아버지의 바람처럼 베짜는 여자나 되고 싶었다. 시찌니 니 찌니처럼 하늘색 유니폼에 스카프를 쓰고 기계 사이나 왔다갔다하면서 천상의 직녀가 될 것 이었다. 나는 학교에도 집에도 거짓말을 하고 여름방학이라는 무진장의 시간을 배당받았다. 우리는 여전히 밥만 먹으면 낚싯대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농한기를 맞은 엄마는 수요가 한정된 듬북이보다는 물량도 많고 단가도 높은 마늘로 품종을 바꿔서 장사하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아침 일찍 부대자루와 손저울을 들고 집을 나가면 해가 져서야 자기 몸뚱이보다 큰 짐을 이고 발을 끌며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리어카를 끌고 나가 어디 외진 곳에 모아둔 나머지 짐을 실어왔다. 그럴 때는 항상 내가 운전을 하고 제남이가 밀며 엄마를 리어카에 싣고 짐 있는 곳으로 달려갔는데 그럴 때마다 엄마가 너무나 행복해했기 때문에 우리도 무 척 행복했다. 그러나 리어카짐을 뒤에서 밀며 돌아올 때는 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땅거미 때문에 앞의 엄마가 자꾸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 같았고 달이 뜰 때는 더욱 무서웠다. 길가에 보이는 것마다 이상한 그림자를 만들며 출렁이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엄마랑 함께 하는 그런 시간은 너무나 행복한 편이었다. 언제나 낮이 문제였다. 집안일은 자연히 할머니와 또딸이의 몫이었다. 할머니는 닳은 부지깽이를 들고 돼지몰이 하듯 또딸이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며 일을 시켰다. 그러나 몸이 둔한 또딸이는 일을 더 망 쳐놓기 일쑤였다. 텃밭의 잡초를 뽑으라고 하면 잡초를 뽑는 만큼 곡식도 엉덩이로 뭉개 버 렸다. 마당도 같은 방향으로 쓸지를 못했고 물을 길라고 하면 멀쩡한 두레박을 우물벽에 마 구 부딪쳐 일부러 그런 것처럼 찌그려놓았다. 설거지를 시켜도 맡아놓고 그릇을 깼고 빨래 도 때는 정작 빠지지 않고 힘센 방망이질 때문에 여기저기 구멍만 생겨버렸다. 또딸이는 정 말 아무데도 쓸모가 없었다. 많이 먹고 많이 싸기 때문에 또딸이는 거름 만드는 데나 쓰이 는 사람이라는 게 할머니의 정평이었다. 때문에 할머니는 언제나 걱정이었다. 또딸이의 장래 가 아니라 오빠의 장래 때문이었다. 시집도 못 가고 이 집안에 영원히 남게 되면 오빠가 평 생 거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빠의 짐이 무거울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한숨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더욱 그악스레 또딸이를 훈련시키려 들었다. 보릿가마처럼 넓고 두툼한 또딸이의 등판을 철썩철썩 갈기며 우두뫼 밭에까지 끌고 다녔다. 고추밭이며 콩밭에 호랑이 가 새끼를 칠 정도로 잡초가 우거졌으니 또딸이더러 무조건 처리를 하라는 거였다. 그래서 집에는 목침을 모로 세워서 머리를 높여놓고 하루 종일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낮잠을 자는 아버지 뿐이었다. 아버지뿐인 집에선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무작정 집을 뛰 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늘 사천을 타고 내려가 거멍다리께가 멀찍이 바라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사천 하구, 거멍다리 밑에는 언제나 노인이 먼저 나와 앉아 있었다. 노인은 종일댁 대신 집안일은 한꺼번에 뚝딱 해치우고 날만 새면 성큼성큼 먼 길을 걸어와서 낚시를 드리우는 것이다. 고래를 잡아왔던 조각배는 해경에게 압수당했기 때문에 입해금지가 된 먼바다가 내 다보이는 거멍다리 밑에 나와 앉아서 시세없는 망둥이나 낚는 것이다. 노인은 바라볼수록 흰 옷을 입은 허깨비만 같았다. 미동도 없이 육신만 뭍에 앉혀놓은 채 혼은 물속세계로 들어가버린 것 같았다. 노인은 서답내에서 우리에게 땅꽈리를 따주겠다는 약속을 했엇다. 거멍다리 밑으로 찾아 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시찌니는 종일댁을 친할머니처럼 모시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말았다. 지겟 작대기로 두들겨맞고 앓다가 아예 집을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것처 럼 왠지 염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조금씩 노인에게 다가가는 연습을 했다. 그날도 우리는 사천 하구의 거멍다리가 멀찍이 건너다보이는 곳에서 망둥이를 낚고 있었 다. 노인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보이지 않자 나는 낚시에 별 흥이 나지 않았다. 토란잎도 찌그러진 우산도 소용없는 너무나 뜨거운 햇볕 때문에 우리는 어깻죽지의 땀띠를 벅벅 긁어 대며 일찌감치 엄마 마중이나 가자 말자 싸움을 시작했다. 밀개떡도 야금야금 다 갉아먹어 버렸고 돌밑으로 피서를 가버린 망둥이도 잘 잡히지 않고 짜증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는 날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자주 짜증을 내고 골통을 부리며 싸움이 잦곤 했는데 우리 를 저절로 녹게 하고 풀어주는 뭔가가,. 바로 색소폰 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우리 마당에 이상한 놀이판이 벌어졌던 그날 이후 우리 마을 하늘엔 색소폰 소리가 한번도 흐르지 않았던 것이다. 가자. 좀 있다 가자. 나 혼자 간다. 가거라. 내 쫄대 내놔. 뽕! 칵! 왜때려, 말로 해. 토드락 토드락 한참 싸우고 있는데 사천둑 위 사람의 그림자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이었다. 밀린 빨래라도 해치우느라 늦어진 모양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일부러 우리를 찾 아온 것 같았다. 우리가 먼저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하자 노인이 반색을 했다. "오오냐 내 니놈들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왔니라. 그란디 할애비가 땅꽈리를 꽈준대도 귀 뜩도 않은 게 할마님이 내 귀한 새끼들, 함시로 맛있는 것을 많이 해주는구나. 그러냐?" "..." "가나. 우리 집 할마씨 따다주고 남은 게 또 있을 게다." 노인이 재촉하자 우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낚싯대를 챙겼다. 그리고 말없이 졸졸 따라갔다. 둑 옆댕이에는 정말 땅꽈리가 네 그루나 나란히 서 있었다. 땅꽈리는 모양이 꽈리와 똑같 아도 농익으면 비파나무 열매처럼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인 군것질감이다. 콩밭이나 수수밭 에 숨어살기 때문에 밭에 다녀온 엄마가 몸빼의 주머니를 뒤질 때마다 불 튀는 쟁탈전을 벌 이게 하는 것이었다. 땅꽈리를 따고 제남이랑 똑같이 분배하느라 고개를 디민 채 옥신각신 하다가 돌아보니 노인은 어느새 낚시를 드리워놓고 앉아 있었다. "느그 아부지가 느그만 했을 때 재밌는 이약 하나 해줄까나?" 우리가 나란히 곁에 붙어앉자 노인이 희미하게 웃으며 돌아보았다. 재있는 이야기라는 말 에 껍질 깐 땅꽈리를 톡톡 소리나게 깨물어 먹던 제남이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나는 아 버지라는 말에 어딘가가 찔끔 지질렸다. "쩌어기 저 웃뫼산 꼭대기, 신사당 자리 보이지야? 지금은 딸각다리만 남았다만 옛날 일 제 때는 일본놈들 천황한테 참배를 댕기던 신사당이란게 있었다." 웃뫼 꼭대기는 거멍숲 너머로 내다보였다. 웃뫼 꼭대기 신사당은 우리가 태어나려고 생각 도 못한 해방 때에 헐려버렸지만 노인이 딸각다리라고 말하는 시멘트 계단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평평한 들밭인 우두뫼 우리 밭에서부터 높은 산꼭대기인 신사당 자리까지는 앞머리가 할딱 까진 소자 대머리처럼 전부가 계단식 밭이었다. 면내 어디에서나 신사당이 잘 보이라고 일본인들이 개간했다는 것이다. "우리 아아들이 중학교를 댕길 때였은께 느그 아부지는 아마 국민학교 육학년이나 됐었을 거로. 걸핏하믄 살얼음 추위에 줄 맞춰서 저 높은 디까지 참배를 댕길라믄 혈기에 소가지가 터질락 안했겄냐." 노인이 어느새 눈을 가늘게 뜨고 잔잔하게 흔들리는 물결을 바라 보았다. 아주 멀고 그리 운 것을 길어올리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서 이놈들이 그믐밤에 신사당으로 오줌싸러 가자고 나섰던 모양이라. 그래서 으떻게 저떻게 신사당까지 쳐들어가서 세 몬이 질퍽하니 오줌 싸는 디까지는 성공을 했는디, 돌아 오는 길에 우리 작은놈이 딸각다리에서 그만 실족을 해부렀구나." 우리가 덜컥 가슴을 움켜쥐자 노인이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 과장되게 목소리를 높였다. "워매매! 비명 소리에 개가 컹컹 짖어대고 한 아래 일본놈 집에서는 과다당 문짝을 내던 지매 누구냐 잡아라 미나미나 코로세! 다 죽여라! 함시로 뛰쳐나오고 난리가 났는디, 발목을 분질렀으니 꼼짝없이 잡힐 판이라. 그란디 금석이 놈은 워낙에 말을 좋아해서 그때 일본놈 집에서 말 믹이는 꼴머슴을 살고 있었거덩." 금석이, 서금석이. 날치처럼 바다를 날고 뻘밭 삼십리를 긴다는 사람, 그리고 월북했다가 돌아와서 우리 아버지의 인생에 어깃장을 질러버린 남파간첩. 그 전율의 이름을 노인이 심 상하게 들먹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전율의 이름을 듣자 수자의 얼굴이 곧 따라 올라 왔다. 수자와 함께 보낸 찬란했던 날들도 물론 떠올랐다. 거품처럼 미미한 존재로 바다에 누 워 너무나 큰 하늘을 바라보던 일, 고래처럼 물의 부력을 타고 하늘 높이 솟아오르던 놀이, 노인을 기다리던 모래밭에서 박수를 치며 뛰어오르던 일, 오자미 줄넘기 고무줄 도둑놈잡기 사장나무 그늘의 공기놀이와 연날리기, 쪼그리고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채 손톱으로 흙을 파면서 나는 새삼스런 그리움에 미칠 것 같았다. "본시 날쌘 놈이라 젤 먼저 쫓아와보니 한 말 동무들이라. 산속으로 빨리 피하라 이르고 는 지가 사냥개 모가지를 휘둘러 끌고는 산꼭대기로 올라가부렀어. 덕분에 우리 아아들이나 낙천이는 즈그 동무들간에 알게 모르게 영웅이 됐제, 일본천황 신사당에 오줌 싼 영웅." 오줌 싼 영웅이라는 말에 제남이가 그만 히히힛 웃어젖혔다. 노인도 허허 웃으며 만족스 레 돌아보았다. 아버지한테 그런 짖궂고 용감한 어린시절이 있었다니 나도 신이 났다. 생각 해보면 우리보다 노인이 우리 아버지를 훨씬 많이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서금석의 뒷얘기도 나는 무척 궁금했다. "그란디 그 사람은 워치케 됐어라? 말집네 그 사람, 수자네 아부지 괜찮었어라?" "왜, 일본놈 사냥개 모가지가 다 벗겨져부렀는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제. 금석이놈만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매를 때려서는 본보기로 꼴망태에 담아 사꾸라 높은 가지에 매달아놨 어. 느그 학교 가다 보믄 면사무소 앞에 벚나무 많이 보이지야? 바로 그 나무에다 매달았다. 그란디 워낙 별난 놈이기는 하제만 낮이나 밤이나 대롱대롱 매달려서 되레 재밌다는 투라. 그냥 거기서 오줌똥 싸매 노래 부름시로 헤롱헤롱 노는 거라. 끝내 굶어 실신한 걸 끌어내 렸는디 친구들 이름은 끝까지 안 불었제." "우아, 용가리 통뼈였구나." "통뼈다 뿐이냐. 당최 겁이 없는 놈이었제." 우리가 감탄을 하자 노인이 슬쩍 말꼬리를 잘랐다. 그러고 보면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람 들은 누구나 용감하고 훌륭했던 것 같았다. 무엇보다 노인의 자식들은 일찌감치 일본 유학 을 떠나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거운 진짜 독립투사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새벌 땅 절반을 가지고 있던 노인의 재산도 독립운동에 다 쓰였다고 했다. 우리가 이웃인 뚜껑례 소 자 민대가리 할아버지나 놀리며 재미있어하는 나이에 그들은 벌써 나라와 민족의 적인 일본 을 상대로 크고 작은 싸움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날의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오늘에 와서 다 무슨 소용인가. 아버지는 형제처 럼 믿고 따르던 종하와 종구 형을 만여바다 속으로 밀어뜨렸으며 서금석은 결국 우리 아버 지를 만여보다 더 검은 수렁으로 밀어뜨려버렸다. 우리 아버지는 바보 수걸이를 온전한 사 람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집으로 데려와 일을 가르치고 새경까지 주었다. 그 어린날 의 은혜를 잊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그 보갚음의 대가가 결국 이런 수렁이었다. 운명의 장 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느그는 내가 느그 아부지를 아직도 원망하리라 생각하고 있지야?"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처럼 노인이 불쑥 말했다. 너무나 무겁고 부담스러운 우리의 주제였 다. 나는 가슴이 덜컥 하면서 고개가 푹 꺾여버렸다. 노인이 슬며시 내 머리통을 쓸어내렸 다. "아니다. 우리는 느그 아부지가 우리 아아들을 밀어분 그 대목만 갖고 원망을 하는 그런 속 좁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처음에사 놀래고 분하고 원통했다만 우리는 느그 아부지를 안다. 어릴 적부텀 천성도 알고 됨됨이도 알고, 알믄서도 원망만 하믄 우리가 그른 사람들이제." "..." "우리는 금석이놈도 용서를 했다. 느그 아부지 수걸이놈 데려다 일 가르치더구나. 그런 사 람을 우리가 모를 리 있겄냐? 애비 죽인 원수라도 목이 마르다믄 물부터 떠주고 볼일 볼 사 람이 바로 낙천이다. 그런 사람이 으쩌다가 이런 세상을 만나 그런 함정에 빠지고 말았는 지." 나는 문득 그토록 궁금해하던 아버지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금석 이놈을 용서했단 말은 또 무엇인가. 아버지가 수걸이를 데려왔던 것은 어린날의 은혜 때문 만이 아닌 또다른 사연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서금석이 도대체 무슨 일을 저 질렀기에 사람들이 그리도 오래도록 경원했던가. 놓친 연을 쫓아가는 수자의 치열한 모습을 바라보며 사장나무 그늘에서 윷종지를 던지다 말고 넋이 빠졌던 사람들의 탄식이 떠올랐다. '저것이 시방 사람새낀가 들짐승인가.' '서금석이 그 사람 판박일세 판박이!' '아 그것이사 본시 저질러서 당한 내림인께 그라제.' 서금석이 무슨 일을 저질렀던 것일까. 심사만 틀어지면 사장나무 그늘에 서서 날 잡아가 라고 꽥꽥 소리를 지르던 염소수염 할아버지도 떠올랐다.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꽥꽥 알아먹 을 수 없는 소리로 수많은 말을 쏟아놓기도 했다. 그중에 '금석이 놈 하루 서장 하는 바람에 천지가 결딴났다' 는 말도 자주 했고 '그놈은 해방이 망쳐놨다' 는 말도 했다. 염소수염 할아 버지가 그런 소리를 지껄이면 사람들은 슬금슬금 사장나무 그늘을 떠나버렸다. 기억하고 싶 지 않은 어떤 두려움이나 괴로움을 피해가는 그런 얼굴들이었다. 도대체 어른들의 세계는 얼마나 크고 복잡하기에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한 수수께끼가 되는가. "우리는 느그 아부지를 용서하고 말고 할 것이 없다. 옆구리에 총까지 맞고 저 역시 산 목숨이 아니라고 생각했든 것, 그래서 저도 따라 죽을라고 힘껏 밀어분 것, 그림겉이 훤히 보이는 일 아니냐. 그란디 이제 와서 뭔 용서를 하고 말고 하것냐. 제 몫몫 나쁜 꿈이었든 것을 이제 와서 어쩌겄냐 말이다." 노인이 하늘 먼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거멍숲 너머 웃뫼산 너머 청오산 너머 창망한 공 간엔 우주로 가는 길처럼 솜털구름이 층을 이루며 높게 펼쳐져 있었다. 그 끝은 쳐다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 느그 아부지도 다 알고 있다. 지난 초여름 우리 아아들 제삿 날에 느그 아부지가 쓴 지방문으로 소지도 올렸은께. 어른들은 이렇게 아무 말 없이도 서로 를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벱이다. 그랑께 느그 아그들은 어른들 일에 괜한 신경을 쓰매 이래저래 속을 태우고 마음을 상할 이유가 없다. 당최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 그 말이 여. 뭔 말인지 알아묵겄냐?" "..." 그래도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데 노인이 푸욱 한숨을 쉬었다. 모든 것을 날려버린 빈 가슴에서 부는 바람소리 같았다. "느그는 자라거든 제발 옳고 그른 것 따로 없는 존 세상 만들어서 살아라. 서로 싸우고 죽여 얻는 것은 안 얻는만 못해. 이 세상 어떤 그런 가치는 없다 이 말이여." 노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회한과 슬픔에 잠긴 목소리였다. 노인이 있는 힘껏 진실을 말했다는 사실은 저절로 느껴졌다. 시찌니의 하소연에 충격을 받은 노인이 나의 위축을 염 려하며 일부러 오늘을 준비했다는 걸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노인 을 위로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아끼는 노인의 진정어린 마음밖에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옆구리를 총으로 쏘고 노인의 자식들을 자루에 담 아 돌을 달았으며 또 사상을 확인했으니 살려준다며 아버지로 하여금 굴욕의 생을 계속케 한 그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그 잔혹한 세월의 장본인들이 다 어디로 갔기에 숨죽인 신음소 리만 남아 있는가. 도대체 얼마나 큰 가치를 위한 것이었기에 천지가 결딴났으며 이렇게 오 래도록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단 말인가. 어쨌건 어른들은 정말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다 아는 것일까. 지난 초여름 아버지 는 모처럼 뒷마당에서 목욕을 하더니 밤늦게까지 어딘가를 다녀왔다. 해마다 농번기가 끝난 대섬 이모할머니댁을 다녀오던 그때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노인의 집으로 종구와 종하 형의 제사를 다녀온 셈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왜 아직도 길게 누운 자세로만 일상을 사는 것 일까. 할머니의 치맛자락으로 도피해서 무위도식하며 제남이보다 더 어린 나이로 퇴행하는 가. 아버지가 밥맛이 없다고 숟가락을 슬며시 내려놓으면 할머니는 기겁을 해서 냄비를 들 고 장터거리로 줄달음을 쳐 전문 음식점에서 육개장이나 보신탕을 사왔다. 아버지는 무엇엔 가의 분노를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 "검은눈아, 느그 조상은 어디에서 왔다고 하드냐." 내가 물속에 눈을 박은 채 생각에 잠겨 있자 노인이 어느새 전혀 다른 목소리가 되어 난 데없는 것을 물었다. "영암이라." 나는 수십마리 학이 군집해 있던 슬렁재 너머 시제마당을 떠올리며 대뜸 영암이라고 대답 했다. "영암, 허 영암. 그래 영암에서 오고말고. 그란디 영암보다 훨씬 멀고 뿌리깊은 곳이 어딘 지 알고 있냐? 내가 오늘은 아주 맘묵고 이야기 하나를 또 해줄거나?" "야." 나는 이야기라는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우리는 정말 쉽게 옛날의 관계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래 우리 검은눈은 영리하고 차분하니께 할애비 이야기라믄 잘 들어뒀다가 나중에라도 깨득을 하고말고. 아주 먼먼 고랫적 갑오년 이야기를 해주마. 그란께로 아주 먼 옛날 갑오년 에도 순진한 백성들이 나래비로 죽어가매 희생을 치른 전쟁이 있었구나. 동학군이라고 너도 들어봤지야?" "야." 나는 얼른 대답했다. 노인이 나더러 영리하다는 말에 긴장도 했거니와 동학혁명이라면 대 강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목은 까먹었지만 녹두장군이 주인공인 라디오 연속극 덕분이었 다. 녹두장군 가는 곳에 하늘도 울고 땅도 흐느꼈다는 주제가처럼 붉은 피로 산하를 물들이 며 아주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탐관오리들의 포악한 정치에 견디다 못해 힘없는 백성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서 관군한테 마구 대항을 했다는 것이다. 녹두장군이 결국 관군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길가마다 그 숨죽인 흐느낌 때문에 나도 눈물 바가지깨나 흘렸었다.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동학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나는 약간 어리둥 절한 기분이 되었다. 노인도 곧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어 나를 들여다보았다. "동학군 이약은 누가 해주던고?" "라디오 연속극에서라. 밤 아홉시에 했는디 오빠도 나도 코 훌쩍이고 바시락거린다고 언 니들 방에 못 들어오게 하믄 막 떼를 써갖고 다 들었어라." "오라, 그러믄 녹두장군이 누군지도 알겄네?" "야." "와따, 우리 검은눈이 실금실금 밖으로만 나돌아도 어느새 그런 것까지 얻어들었구나. 그 래, 나는 녹두장군이 효수당학고 누구도 입을 다물어분 그 뒷얘기를 해주마. 전쟁이 끝나고 난리가 평정되다봉께 관군한테 대항했던 사람들은 모두가 역적이라, 죽은 자도 산 자도 모 두 대역죄인이 되아부렀는디, 그이들은 물론 그 후손들이 다 워치케 됐을 것 같으냐. 죽창을 들고 벌판을 달리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스며들었겄냐 그 말이다." 이야기를 해주겠다던 노인이 되레 나한테 물었다. 노인은 아까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었고 나는 괜히 긴장했다. 동학군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노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회복하려면 좀더 진지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용감했던 어린 시절 을 일부러 들려준 노인의 의도를 생각한다면 더욱 그랬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글세 대역죄 인의 딱지를 받고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 갈 만한 곳이 대체 어디일까. 그때는 자동차도 기 차도 없던 시절이었다. 말이나 나귀가 아니라면 발바닥 두 개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것 이다. 발바닥 두 개로 산속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절간의 중이 되거나 아니면 뚜껑례네 부모처럼 솥단지를 이고 다니며 유랑하거나 소자처럼 미치거나 민대가리 할아버지처럼 머리 를 빡빡 밀고 주문만 외우는 이상한 사람이 되거나, 그 이상은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대역죄인이라는 손가락질을 피해서 신분을 숨기고 동가숙 서가식하던 한 무리가 있었구 나. 마을마다 날아오는 돌팔매를 피해서 자꾸자꾸 낯선 곳으로만 떠돌게 되았겄제. 그러다 부자 동네에 이르믄 큰 집 사랑채를 빌려 짚신이나 버들고리를 엮어주고는 밥을 빌어먹고 봄이 되믄 다시 떠돌고, 정착할 곳을 찾아 천지사방을 떠돌기를 일곱 해, 거지 중에서도 상 거지떼 아니었겄냐." "애기들도 있었어라?" "있었제. 젖 달라 빽빽 우는 세 살짜리하고 다섯 살짜리하고 코흘리개 일곱 살짜리, 흥부 네 새끼들마냥 주렁주렁 자그만치 아홉이었다 아홉. 그란디 다 죽었어, 염병에 걸려 한꺼번 에 다섯이 죽고 동상에 걸려 죽고 배곯아 죽고." 목이 잠기는지 노인이 컥 밭은기침을 했다. 노인은 당신이 목격한 실제 상황을 이야기하 는 것 같았다. 새삼스레 한이나 슬픔 따위 감정이 섞인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말매듭의 결기 가 분명 그랬다. 노인은 일흔여덟살이니까 아주 어린 나이로 갑오년의 현장을 목격했을 수 도 있다. 지금 노인은 자신이 동학군의 후손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순간 아주 이상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뚜껑례네나 말집네와 같은 어조로 불리는 민 대갈네랑 노인네가 한치라도 다를 게 무언가 말이다. 사람들이 불가촉 천민이라도 된다는 듯 경시하던 민대갈네와 노인네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니까 노인은 지금 아주 엄청난 사실을 털어놓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 아래 세상의 끝으로 가믄 땅끝 어딘가에 임자없는 빈 땅이 있다는 소 문을 듣게 되었단다. 검은눈아 네 생각엔 그런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어야 옳겄냐, 주야로 발을 재게 놀려 그 땅을 찾아가야 옳겄냐." "찾아가야 옳아라." "암은, 찾아가야 옳고말고. 그렇게 두 집 식구가 의논을 해서 먼길을 떠나게 되았는디 하 루는 소나무 밑에서 자고 하루는 논둑 밑에서 새매 사흘 밤낮을 걸어서 당도하고 보니 참말 로 바다겉이 넓고 광활한 빈 땅이 눈이 시리도록 널널하게 펼쳐져 있는 거라. 그란디 그 빈 땅은 곡식을 심을 수 없는 뻘땅이었다. 간문에 전 소금땅." "꼬막이 새가 되어 날아가분 땅." "오라, 그걸 기억하다니 역시나 우리 검은눈이로구나. 그래서 두 집 사람들은 갈대를 베어 비바람 피할 곳을 만들고 간물이 드나드는 곳에 보를 막았단다. 먹을 것이 없어서 풀뿌리를 씹고 입을 것이 없어서 반 벗은 몸으로 보를 막았어, 허기진 몸으로 돌을 나르다 쓰러지고 낸둥 쌓아논 돌벽이 파도에 쓰러지믄 다시 일어나 또 쌓고 피투성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몸 을 내던져 기어이 저 둑을 쌓았구나." 노인이 감회어린 눈으로 사천둑을 가리켰다. 들판을 휘감는 사천둑이며 청오산 아래 저수 지, 거멍다리 같은 대단위 공사로 만들어진 것은 모두 일제시대 때 것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일은 조선 사람들이 노예처럼 다 했는데도 자기네가 농토를 만들었다며 곡식을 전부 공출해 갔다고 했다. 거멍다리도 공출미를 어란진 배로 실어가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사천둑은 새벌 쪽의 일부분이 아주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쓰인 돌이 다이 너마이트로 바위산을 헐어낸 것이 아니고 바닷가에서 주워나른 닳은 것일 뿐만 아니라 쌓은 받식도 눈에 띄게 달랐다. 거기에 그런 욕사가 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신분을 숨긴 채 죽을 둥 살 둥 보를 막았던 사람들은 또 뻘땅의 간물을 우려내느라 둠벙 을 파고 도랑을 내고 고생은 끝날 줄을 몰랐구나. 그란디 쪼깐씩 쪼깐씩 소출도 늘어나고 코흘리개 아아들이 자라 장가도 간 어느날 그만 나라가 망해분 거라. 못 묵고 못 입고 골병 에 사무친 부모들에 한 맺힌 자식들 역시 한풀이 한번 해볼 틈 없이 일제의 갖은 압박을 견 딜 수밖에 없었다. 또 그 자식들 역시 전쟁의 아수라 속에서도 땅을 지키고 자식을 낳아 대 를 이으매 돌밭길 가시밭길을 다 헤쳐왔고. 이만하믄 니가 생각기에도 여간 장한 사람들이 아니지야?" "야." "그렇다믄 이런 뿌리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 아부지가 잠깐 으떤 구렁텅이에 발이 빠졌다 고 해서 저마저 코를 빠뜨리고 기운을 잃어야 옳겄냐, 그럴수록이 참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뒷날을 기약해야 옳겄냐?" "..." 난데없는 질문에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노인은 우리 조상의 내력을 말하고 있었단 말인가. 나의 주눅을 치유하고 나를 부추기기 위해 끝장을 보고 싶은 노인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 조상이 뚜껑례네 부모처럼 솥단지 하나 이고 산천 을 떠돌던 거지떼, 민대갈네 같은 동학교도였다는 사실은 그냥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지 금까지 조상에 관한 것이라면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세세하게 들어왔지만 이런 이야기는 정말 로 처음이었다. 나는 너무나 당황해서 제남이를 슬쩍 돌아보았다. 제남이는 어느새 꽈리껍질 을 손에 쥔 채 코를 불며 졸고 있었다. "너는 느그 증조부님도 조부님도 못 뵈었지야?" "..." "앞으로는 사는 것이 힘들 때마다 저 새벌을 봐라. 잘 보믄 끙끙 돌을 져나르고 둠벙을 파고 씨를 뿌리는 거인들이 보일 것이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대역죄인이란 누명까지 모든 것을 옛일로 돌려버린 어른들이시다. 느그도 그렇게 살어야 한다. 이제 그 어른들의 자 손은 느그뿐이고, 기억하고 새겨줄 이도 느그뿐인께. 이 시절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견뎌 이 기고 있는 힘을 다한 연후라야 할말도 있는 법인께." 나는 아직도 혼란 속에 있는데 노인이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쓸어 내렸다. 따뜻한 사랑과 위로가 섞인 그런 손길이었다. "언제 기회 봐서 느그 아부지한테도 내 이렇게 이를란다. 낙천이 니 어려움이 아무리 크 다 한들 조상님네만 하겄냐고. 어쩌냐, 너도 이 할애비가 그렇게 했으믄 좋겄지야?" "..." "그 종자, 그 피가 어디로 간다더냐. 걱정 마라. 느그 아부지도 이제 곧 기운을 차리고 일 어설팅께." 노인이 그제서야 생각난다는 듯 낚싯대를 들어올렸다. 미끼가 없는 빈 낚시였다. 노인은 정말 고기를 낚으러 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할 일이라도 마친 듯 노인이 자리를 털고 일어 섰다. 그때 밀짚모자에 핫바지 자락을 달달 걷어붙인 어떤 사람이 자전거를 달려오다 급정 거로 멈춰섰다. 미란네 삼촌 같았다. "어르신 여기 계셔서 아직 모르시겄네라. 동네에 줄초상이 나부렀는디이." "줄초상이라니, 누가?" "잿등 한몰댁이랑 민대갈네, 아구구 내 입, 이학씨네 막내아들 그 씩씨풍 불던 딴따라 아 들이 죽었단께라." "문식이네나 이학씨네나 어르신들이 아니고 자식들이?" 노인이 기절할 듯 놀라 치물었다. 문식이는 춘희네의 죽은 큰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그러니 까 춘희네 할아버지인 고령의 염소수염 할아버지를 놔두고 그의 며느리인 한몰댁이 죽고 역 시 고령인 민대가리 할아버지가 아닌 그의 손자인 색소폰 아저씨가 죽었기 때문에 노인은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되물은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다리가 후들거렸다. 색소폰 아저 씨가 갑자기 왜 죽은 걸까. 우리 시찌니로 인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비관해서 자살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우리 할머니의 추궁에 충격을 받아 끝내 쓰러지고 만 것일까. 나는 우리 가족이 또 하나의 죽음에 연루될까봐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허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됐는고?" "한몰댁은 장 보고 오는 길에 달려오는 삼륜차 피하다가 산비탈 벼랑으로 낙상하고라, 이 학씨네 막내아들은 풀밭에 누워 하늘바라기하다가 뱀한테 물렸는디 워낙 허약한 사랑이라 손쓸 새도 없이 그냥 자지러졌다 안하요." "허 참, 거 낭패로구만. 다 살고 말년에들 숭한 꼴을 보게 생겼으이." "그나저나 지는 큰산 밑 작은 댁으로 이학씨 모시러 가는 길인디요, 갑작시런 일에 사람 들이 우왕좌왕한께로 어르신이 얼른 가보세야 일에 각단이 서겄는디요오." "알었네만 일이사 젊은네들이 들고 나서믄 저절로 돌아가는 것이고. 허 참 거." 노인이 혀를 차자 미란네 삼촌이 '댕겨 올랍니다' 하며 다시 쏜살같이 자전거로 달려갔다. 나는 얼른 제남이를 일으켜 세우고 자리를 정리했다. 색소폰 아저씨가 우리 가족과는 아무 상관없이 전혀 엉뚱한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에 나는 적이 안도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바 람 한점 없이 답답한 하늘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바람 없는 세상을 상상이나 할 수 있 을까. 음악을 잃어버린 하늘도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염소수염 할아버지도 며느리를 하늘 처럼 믿고 살아왔다. 이 세상 유일한 믿음처럼 한몰댁의 부양과 위로에만 의지해서 살아온 것이다. 그 하늘을 잃었으니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또 얼마나 애통한 소리로 울부짖을 것인 가. "날 좀 잡아가거라! 이놈들아, 날 좀 잡아가거라!" 11. 죽기에 좋은 계절 니찌니와 다찌니가 추석을 쇠러 오면서 내 운동화를 사왔다. 중학생들도 멋쟁이들만 신는 끈 달린 맹꽁이 운동화였다. 큰언니와 시찌니는 빠졌지만 서울 언니들과 오빠만 돌아와도 우리 집은 제법 시끌벅적했다. 나는 송편도 식혜도 관심이 없고 오직 다찌니만 졸졸 따라다 녔다. 어쩌면 우리 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은 다찌니인지 몰랐다. 다찌니는 서울 생활 일년 만에 서울박사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 이것 좀 봐봐요. 팔 아프게 비누질 안해도 이렇게 거품이 일어난다니까요. 여기에 가만히 담가놓기만 해도 빨래가 저절로 돼요오. 방망이질이나 삶을 필요도 없고 문지를 필 요도 없다니까요." "세상 좋아졌다. 빨래 한번 할라믄 서답냇둑에 솥 걸어놓고 잿물 내려서 두들겨 빨고 삶 고 하던 때가 엊그젠디." "할머니 이런 것뿐인 줄 알아요. 단추만 눌러도 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진다거나 꼭지만 돌려도 물이 폭포처럼 쏟아진다거나 그런 건 촌스런 이야기고요, 테레비! 테레비라는 게 있 거든요. 그게 뭔 줄 알아요? 라디오하고 똑같이 뉴스도 하고 연속극도 하는 건데요 저 가설 극장 영화처럼 진짜 사람들이 나와갖고 말도 하고 움직이는 그런 기곈데 안방에 누워서 떡 먹으면서도 보고 밥 먹으면서도 보고 그런다니까요." "여그도 유선방송인가 머신가 그런 것 생겨갖고 집집마다 됫박만한 것 제비집겉이 기둥에 다 달아놓고 김삿갓 북한 방랑기매 장수 만세, 전설 따라 삼천리 다 해준다. 뿐이냐, 동사무 소에도 쌍나팔이 생겨갖고 욋소리쟁이가 골목골목 뛰댕기매 소락지 지를 필요도 없이 이장 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마이크에다 대고 하고 잡은 얘기 다 하고 그런단다." "아이 참 할머니두,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냉장고! 냉장고라는 것두 있는데요. 쇳덩이로 된 찬장 같은 건데요 거기다 뭐든지 넣어 두면 상하지도 않고 시어지지도 않고 한달 두달 끄떡없는 기계거든요. 우리 사장님댁 마루에 있는데요 거기서 꺼낸 물맛이요 사이다는 저리 가라예요." "말새끼는 제주로 보내고 사람새끼는 서울로 보내라더니 거 보고 들은 것도 많다." 다찌니는 테레비 테레비! 냉장고 냉장고! 거의 비명처럼 발음하며 연일 서울 선전에 열을 올렸다. 할머니는 윗방 마루에 걸터앉아 있고 우리는 모두가 그 앞 우물가 돌쩌귀에 모여 앉아 있었다. 돌솥을 걸어놓고 약을 다리는 엄마는 뭔가 조마조마한 눈치지만 나와 제남이 는 이랬어요 저랬어요 하며 완전히 서울말씨를 익힌 다찌니한테 거의 넋을 놓고 있었다. 그때까지 조용하기만 하던 니찌니가 슬며시 끼여들었다. "공장 하루 쉬어준단께 사장집에 가서 애 봐줬다요. 차라리 공장 변소청소를 하제 애보개 가 뭐여, 자존심도 없이." "애 보니까 귀엽고 맛있는 것도 먹고 다리 뻗친 일 안하고 편해서 좋기만 하더라. 너는 빠나나도 못 먹어 봤지? 자가용도 못 타봤지? 그런 집에서 살 수만 있다면, 야간학교만 보 내준다면 당장 애보개가 아니라 식모살이라도 할 거야 난." 다찌니가 그예 또 학교 이야기로 못박는 소리를 하자 엄마도 할머니도 못 들은 척했다. 옛날에 식모살이 경험이 있는 니찌니는 입을 비죽했다. 니찌니는 자존심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가루비누도 미젠디 사장집에서 세 숟갈 훔쳤다요. 엄마 보여준다고, 순 도둑년." "나 없으면 하루도 못 사는 사람이 누군데 그래? 밤새 일하라고 잠 안오는 약 주니까 무 슨 보약인 줄 알고 한꺼번에 퍼먹고 애밴년처럼 구역질이나 하고, 공장장한테 혼나믄 찔찔 짜기만 하고." 다찌니가 발끈하자 니찌니가 눈을 흘기다가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공장장한테 혼난다는 말에 엄마도 할머니도 눈이 덜컥 흔들렸다. 밤새 일하라고 잠 안 오는 약을 먹인다는 것이 다. 과연 공장은 내가 상상한 것 같은 천상의 일터가 아님이 분명했다. 니찌니가 병이 들어 서 절뚝거리며 돌아온 것이다. 니찌니의 다리는 멸치젓 동이처럼 푸르뎅뎅한 빛으로 퉁퉁 부어 있었다. 하루 종일 선 자세로 쉴틈 없이 베짜는 기계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다리에 알 이 배겼는데 그것이 그만 병으로 굳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추석 차례를 지내자 마자 새벽같이 호미와 망태를 들고 청오산을 찾아갔다. 니찌니에게 다려먹일 약초를 캐기 위해서였다. 파묘사건 이후 청오산 쪽으론 침도 뱉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일이 다급해지자 어쩔 수가 없었다. "엄마, 우리도 서울 가서 살아요. 논밭은 죽자사자 일해도 일년에 한번밖에 소득이 안 나 지만 도시에선 쌀가게 하나만 차려도 날이면 날마다 금쪽 같은 현금을 쥐어준다니까요. 이 옹에 엄마 그렇게 손발이 닳고 모리 꽁댕이가 벗겨지도록 이고 지고 장사 다닐 바에는 아예 넓은 데서 본격적으로 하자구요. 제발 우리 행남이 제남이만큼은 이 케케묵은 촌구석에 썩 게 하지 말고 전깃불 환한 곳에서 사람답게 기르자구요." "가시낭년이 방정맞게 집안일을 들었다 놨다, 어느 베락을 낮고 싶어서." "놔둬라. 넓은 디 가서 보고 들은 것이 많은 것 같은께 일삼아 들어보기나 하자." 할머니는 의외로 다찌니의 주장들이 밉지는 않은 눈치였다. 여러 가지 선물 중에서도 아 버지의 비타민 보약에 감동을 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다찌니는 항상 꾸중만 듣다 보니 조금만 인정 받으면 그만 흥분해 버리는 게 탈이었다. "근데 난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 우리 조상님네는 도대체 어쩌자고 애초 이런 귀 빠진 곳에 터를 잡아가지고 기차에 뻐스를 몇번이나 갈아타고 그것도 차시간 맞추려면 서너 시간 씩 기다리는 건 예사고 그나마 여의치 않으면 중간에 자야 하고. 조상이 원망스럽다니까 조 상이 원망스러워." "베락맞을 년. 터를 잘못 잡아 배라고 곯았으믄 조상 팔아묵겄다고 나서겄다. 그래 이 세 상 누가 너만 못해서 다들 고향지키고 산다더냐? 선산 팽개치고 전답 팔 줄 몰라 다들 땅 파묵고 사느냐고!" "엄마는 그럼 우리집이 끝까지 죄인처럼 기죽은 채로 이 촌구석에서 썩어야 옳단 말예요? 서울 사람들은요 서로가 누구건 상관을 않는다구요. 이웃간에 성씨도 모르고도 잘만 지낸다 니가요. 근데 이 촌구석은 어쩐 줄 알아요? 그저께도 읍에서 버스 갈아타려고 기다리는데 어쨌는 줄 아느냐구요? 어떤 남자가 우리더러 금하리 가느냐고 묻다가 갑자기 자기네끼리 수군수군하는데 기분 나빠 죽을 뻔 했다니까요. 다시는 내가 고향에 오나봐요! 다시 오면 사람 새끼가 아니에요!" 다찌니가 갑자기 울부짖었다. 이틀 동안 그걸 참느라고 무진 애를 쓴 모양이었다. 할머니 도 엄마도 깜짝 놀라 눈만 크게 벌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서성이며 대화를 엿듣던 오 빠는 집모퉁이로 슬그머니 돌아가버렸다. 바로 할머니의 등 뒤 윗방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 었다. 언니들이 떠난 후 아랫방은 쓰지 않았기 때문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그래서 언니들 에게 안방을 내어준 아버지는 잠깐 할머니의 윗방으로 피난을 가 있었던 것이다. 낮잠을 자 지 않았다면 다찌니의 울부짖음은 아버지의 귓속으로도 고스란히 들어갔을 거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우리 모두의 현실인 것을. 할머니도 이제 지쳤는지 쩟 혀만 찼다. "가시낭년 저것은 지 에미가 윗목에 엎어논 것을 뒤집어 살려놨더니 공도 모르고 일레 저 모양이여. 지가 언제부터 서울사람 됐다고 이랬어요 저랬어요 백여시 방정에 집안 뿌리까지 들었다 놨다, 오지 마라 오지 마. 다시는 오지 말고 돈이나 벌어서 시집 잘 갈 궁리들이나 해라. 우리는 짝 찾아줄 힘도 없고 시집 잘 보낼 힘도 없은께 그리 알고 독하게들 맘 묵어 라." 할머니가 힘이 빠진 소리로 못박아 말하자 니찌니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니찌니는 공 장생활에도 적응을 잘 못해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했으나 엄마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던 것 이다. 니찌니는 다리 뿐 아니라 귀에도 이상이 있는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기계의 굉음 속에 살다보니 집에 와서도 귓속이 쟁쟁하다는 것이었다. 니찌니는 약간 얼뜨기가 된 것처럼 말 귀를 빨리 못 알아먹었다. 천상의 선녀들처럼 편해 보이던 베짜기가 그렇게 힘든 노역이라 는 것이다. 하지만 니찌니와 다찌니만큼은 아버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좋은 남자 를 만나 그럭저럭 결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아무리 힘이 들어도 직장생활은 계 속해야 한다는 게 엄마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부랴부랴 약초를 캐다 달이는 것이다. 추석 명절인데도 우리 식구는 아무도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뱅뱅 돌았다 큰언니한 테 또 중매가 들어왔다고 하는데 우리 식구는 그런 것에도 별 흥미를 못 느꼈다. 광주 고모 가 중매했는데 오빠의 말에 의하면 새 신랑감은 굉장한 부자라고 했다. 철물점 심부름꾼으 로 잔뼈가 굵은 사람인데 독립하자마자 가뭄에 혼난 사람들이 집집마다 펌프샘 파는 게 대 유행이 되는 바람에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키가 작아서 오빠는 썩 내 키지 않는다고 했다. 오빠보다 한 뼘이나 작은 땅딸보라는 것이다. 나 역시 아무리 부자라지 만 뚜껑례네 엿장수 같은 땅딸보한테 큰언니가 시집을 간다면 너무나 슬플 것 같았다. 다찌니는 할머니 오래 살면 돈 벌어서 비행기 태워줄 거라는 약속을 하고 버스에 올랐지 만 간장처럼 새카맣고 쓰디쓴 약을 댓병으로 두 개나 담아든 니찌니는 울먹이느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집을 떠났다. 빈말일망정 다찌니의 효심에 할머니는 내내 기분이 좋았 고 내키지 않는 돈벌이를 다시 떠난 니찌니 때문에 엄마는 내내 우울했다. 나는 뜻밖에도 또딸이를 새로 발견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 나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싶 었었다. 한몰댁과 색소폰 아저씨의 장례를 통한 아버지의 변화를 무척이나 고대한 것이다. 앞뒤로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시원한 바람에 머리칼을 살랑거리며 마루에 누워 낮잠이나 즐기 던 아버지가 노인에게 불려나가는 걸 보면서 나는 기대해 마지 않았다. 노인이 그렇게나 간 곡히 그리고 자상하게 나를 위로하고 설득했던 것처럼 아버지도 변호시킬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나는 날마다 기다렸다. 아버지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지켜보고 싶었다. 조상들 의 진짜 뿌리와 고통의 세월과 그 수고의 이유를 낱낱이 듣게 된다면 아버지는 절대로 그냥 누워서 인생을 마무리할 수는 없을 거였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아버지는 다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었다. 한몰댁은 집이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동네 추렴으로 장례를 지낼 수밖에 없었다. 늙어 죽 은 호상이나 병사도 아닌 삼륜차 때문에 생긴 사고사였기 때문에 충격이 큰 마을 사람들은 되는대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우리 집에서는 쌀과 광목 한필을 부조하고 할머니는 특 별히 녹두묵을 한 다라이나 쑤어갔다. 엄마는 부엌일을 도맡느라 초상집에서 아예 날밤을 새고 있었다. 한몰댁이 우리 엄마의 친구일 뿐 아니라 죽은 남편도 바로 우리 아버지와 절 친한 친구였고 6.25때 같은 사건을 겪다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새삼 삼륜차 같은 문명의 이기에 치를 떨었다. 자동차가 생기고 편리해졌으나 위험부담 또한 얼마나 커졌는가에 대해 서로 떠들었다. 월남을 다녀온 미국 숭배자인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자동차가 하도 많아서 아무도 구 경하지 않으며 차가 되레 사람을 비켜 다닌다는 것이다. 꿈 같은 이야기였다. 좁은 신작로에 트럭이라도 한 대 달려오면 요란한 클랙슨 소리에 질겁을 한 사람들이 죽을 둥 살 둥 논둑 길로 피해 달아나거나 먼지 뒤발이 된 채 먹먹해진 귓 속을 후벼파기 일쑤인게 바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떠들고 먹고 마시고 슬퍼하면서 척척 장례준비를 서둘고 있 었다. 하지만 훨씬 부자인 민대갈네는 되레 사람이 꾀지 않아서 문제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색소폰 아저씨가 앓던 폐병 때문이었다. 결핵균이 옮을까봐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백근짜리 돼지를 잡고 급하게 쌀을 씻어 가마솥에 김을 올려도 사람들이 잘 먹으려 하지 않 는다는 것이다. 한몰댁네 마당 한켠 조용한 곳을 지키고 있다가 해질녘에 돌아온 아버지를 노인이 찾아왔 다. "가자. 궂은 일에 그러는 벱이 아니다. 내남 없이 모두 달려들어 거들어도 벅찬 일인디 중 병에 죽었다고 다들 꺼린다 안하냐. 한동네 삼시로 그러는 벱이 아니다. 어 차리고 나온나." "아아는 지 몸도 못 추리는디 안 들여다본다고 누가 욕이사 할랍디야." 할머니가 얼른 양팔을 벌리고 나섰다. "알고 보믄 아아하고 나하고야말로 그럴 처지가 아니요. 숭한 병이 아니라 더한 것이라도 우리가 거들어야 하고말고라." "그럴 처지가 아니라니라. 그 집 막내딸이 우리 손주들하고 동무인 것 말고는 사돈네 팔 촌 구정물 한방울도 안 튀었소." "알고 보믄 피보다 진한 것이 튀었제라. 어쨌든 이번 일은 우리 몫인 것 같은께 암말 마 시오." 노인이 잘라 말하자 할머니가 입만 딱 벌렸다. 나는 그 말속의 의미심장한 뜻을 다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렇다 저렇다는커녕 예 한마디도 없이 어느새 엿가락 같은 몸뚱이를 일 으켜 웃옷을 찾아 입고 신발을 찾아 신었다. 아버지는 어쩌면 이런 기회를 기다렸던 것 같 았다. 색소폰 아저씨는 작은댁에서 낳은 동생들까지 형제들이 많았다. 그래도 다들 시신에 가까 이하기를 꺼리기 때문에 노인이 호상을 맡고 아버지가 결국 염을 한 것 같았다. 장례는 다 음날 바로 치러졌다. 여름 시신은 빨리 상할 뿐 아니라 시신의 병원균은 더욱 급속한 번식 을 하기 때문이었다. 마을 청년들은 여느때와 다르게 하얀 마스크에 흰 장갑까지 끼고 완전 무장을 한 차림으로 상여를 멨다. 꽃상여가 아닌 백상여는 산이 아닌 바닷가 거멍게를 향하고 있었다. 매장이 아닌 화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와 노인은 화부노릇을 하기 위해 그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 상 여는 노인의 지시대로 모래밭에 놓여진 다음 다시 간단한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상여가 벗 겨진 관은 미리 쌓아놓은 산더미 같은 장작더미 위에 놓여졌다. 거멍숲에서 베어온 생솔가 지 한 짐이 다시 지붕처럼 그 위를 덮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장작더미 위에 기름을 끼 얹자 성냥을 켜든 색소폰 아저씨의 큰형이 목쉰 소리로 울부짖었다. "문영아! 느그 집에 불났다. 빨리 나온나! 빨리 나온나아!" 만약에 몸뚱이에 집착하여 혼이 아직 머물러 있다면 어서 떠날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고 했다. 불은 순식간에 불기둥을 솟구치며 하늘 높이 타올랐다. 사람들은 상여를 부수어 불 길 속에 던지고 마스크와 장갑과 모자를 벗어서 꽃처럼 불길 속으로 던지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관이 다 타버리고 뜨거운 불길에 오그라든 시신이 벌떡 일어나 앉자 비위가 약한 사람들 은 하나둘 화장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멀리 쫓겨나서도 기를 쓰며 구경하던 아이들까지 기 겁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까지 남아 있을 속셈인 것 같았다. 불길이 너 무 싸면 바닷물을 뿌려서 적당히 재우고 불길이 너무 자지러져 숯검둥이 시신이 내다보이면 장작을 더 많이 던져넣어 불길을 올렸다. 나는 모래구릉에 배를 갈고 엎드린 채 눈만 내밀 고 화장의 과정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색소폰 아저씨는 아주 어린날부터 내 마음의 하늘에 서 살던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파고드는 아름다운 선율로 인생의 슬픔과 사랑의 안 타까움과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한 몸부림을 다 들려주곤 했다. 나는 뒤늦게야 이제는 영원 히 끝나버린 것들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아버지가 무엇인가에 열중하여 생기있게 몸을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노 인이 그 사이 어떤 충고나 나에게 들려준 만큼의 새로운 사실을 귀띔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 을 것이다. 아버지는 거의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 같았다.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활활 깃을 치는 것처럼 화부 일에 열중이었다. 나는 그것이 색소폰 아저씨가 이생의 못다 한 것 들과 함께 한줌 재로 돌아가는 슬픈 의식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아버지 가 활활 깃을 치듯 살아오를 재생의 의식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줌 재가 되어가는 한 존재의 슬픔에 눈물을 흘려야 할지, 아버지의 변화에 대한 기대로 가슴을 두근거려야 할지 알지 못한 채 불길이 잦아지고 숯잉걸마저 하얗게 식은 후까지 색소폰 아저씨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모래구릉에 그렇게 엎드려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나치게 극적인 변화를 꿈꾸었던 것일까. 화장터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할머 니가 대문 앞에 피워놓은 짚불을 넘고 왕소금으로 두들겨 맞더니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조용히 자리에 누워버렸다. 자석에 달라붙는 쇳덩이 같았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낮이나 밤이나 목침만 높이 베고 일어날 줄 몰랐다. 나는 아버지가 식사를 마치고 숟가 락을 놓을 때마다 저 길로 일어서서 행여 삽자루를 들고 논밭으로 나가지 않을까, 변소를 다녀오는 것을 보면서도 흙벽에 세워둔 빗자루를 들고 행여 마당을 쓸지 않을까, 낮잠을 자 다 벌떡 일어나서 물꼬를 보러 가지 않을까, 나의 꿈이 현실로 바뀌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 렸다. 나는 아버지가 자신의 불운과 온갖 회한과 분노와 무기력까지도 활활 태워버리기를, 한줌 재처럼 무의미한 것으로 돌려버리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어른들은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법이라고 노인은 분명 말했다. 그래서 나는 대역죄인이라는 돌팔매와 굶주림과 헐벗음까지도 다 옛일로 돌려버린 우리 조상들처럼, 아버지도 그렇게 곧 그들의 후손다운 모습으로 변하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는 대신 아버지 주변을 맴돌며 아버지가 변화하는 아주 작은 기미라도 찾으려고 기를 썼다. 그러나 집안만 뱅글뱅글 돌며 내가 찾은 건 엉뚱하게도 또딸이였다. 또딸이는 어쩌면 천재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또딸이는 영화대사라면 장터거리 가설극장 에서 상영한 것은 무엇이든 달달 외우고 있었다. 알고 보니 또딸이는 영화광이었다. '미워도 다시 한번' 이라는 영화가 들어왓을 때였다. 유부남인 신영균과 미혼모인 문희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가 너무 슬퍼서 사상 유례없이 연 삼일 상영을 하고 있었다. 전날 관 람을 한 아이들은 종일토록 새삼 훌쩍이며 영화 이야기뿐이었다,. 언니들이 떠나버린 후로 영화구경의 기회를 잃었던 나도 이번에는 몸이 달았다. 하루 종 일 먼길을 걸어 다니는 엄마는 영화 같은 것엔 관심도 없고 나 혼자 다녀오라고 돈을 줄 리 도 만무했다. 돈이 없는 아이들은 대부분 영사기가 돌아가는 트럭 뒤켠을 서성거리다가 마 음씨 좋게 생긴 사람이 줄을 서면 살짝 다가가 옷자락을 붙들고 그 사람 자식이나 동생인 것처럼 따라갔다. 또 어떤 아이들은 가설극장 바깥을 빙빙 돌다가 틈을 봐서 천막을 들추고 잽싸게 끼여 들어가거나 개구멍을 지키는 사람에게 통사정을 해서 들어가기도 했다. 몰래 들어가다 들키는 날엔 매를 맞거나 영화가 상영되는 화면 앞에 벌을 서서 거꾸로 영사기에 서 쏟아지는 빛줄기만 눈이 멀도록 바라보아야 했다. 오래도록 고심을 하다가 나는 암탉이 둥지를 놔두고 마루밑에다 낳아놓은 계란 두 알을 훔쳐냈다. 그리고 양쪽 바지주머니에 하나씩 넣고 얼굴에 뒤집어쓴 거미줄을 뜯어내며 어두 운 마을길을 더듬어 갔다. 나는 몸이 잽싸지 못하기 때문에 통사정을 해야겠다는 판단 때문 이었다. 영화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지 또박또박 아나운서의 뉴스 전하는 소리가 새어나오고 있 었다. 나는 곧장 화면이 설치된 천막 뒤켠을 찾아갔다. 그러나 천막 뒤쪽은 천막 기둥을 받 쳐놓은 받침대들이 발길을 가로막고 더구나 주변은 동그랗게 도랑이 파여 있었다. 이렇게 어둡고 험한 곳을 어떻게 달려 다니고 틈을 찾아 끼어들어간다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누구네 돼지 오줌이 흐르고 있을지도 모를 도랑에 몇번이나 발을 빠뜨 리며 주변을 몇바퀴나 돌아보았지만 그렇게 무섭다는 기도는커녕 그 극성스런 아이들도 한 명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영화가 시작되는지 문희를 대신한 고은정의 일부러 목을 떨어서 만든 목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왔다.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목이 다 탈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나는 어디서도 어떤 기미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화면 바로 뒤편이 갑자기 들춰지며 후다닥 후다닥 생쥐처럼 날쌘 아이들이 빛속으로 뛰어들어가는 게 보였다. 눈 깜 짝할 순간이었다.. 그리고 곧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장화를 신은 키 큰 아저씨들이 잡아 라 거기 서! 소리치며 달려왔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뿔뿔 기어서 도랑 건너 아이들이 튀어나오던 토란밭으로 기어들어갔다. 재수없는 어떤 아이 가 기도에게 덜미를 잡혀서 강아지처럼 동동 들려가는 게 내다보였다. 너무나 험악한 광경 이었으므로 나는 말 그대로 사지가 발발 떨렸다. 우산처럼 넓은 토란잎 아래 주저앉아 한참 만에 정신을 차려보니 가랑이께가 축축했다. 아차, 주머니에 손을 넣어보니 기도에게 주려고 가져온 계란은 벌써 흘러버리고 와자작 깨진 껍질만 손에 잡혔다. 낭패였다. 영화는커녕 엄 마한테 빳빳하게 풀먹은 바지를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그것이 큰 일이었다. 그런데 토란밭 저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가설극장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따로 있는데 그 배우 들의 대사를 똑같이 따라 외우는 또다른 목소리가 있었다. 나는 극장보다는 그쪽으로 가만 히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분명 우리 또딸이의 목소리였다. 어이도 없고 기가 막혀서 나는 내 처지도 깜박 잊고 또딸이 변사의 대사에만 오래도록 귀 를 기울였다. 그런데 영화 내용이 삼분의 이쯤 흘러가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갈 수 있 도록 미리서 천막을 걷는 게 보였다. 그때 어두운 토란밭 위로 또딸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 리고 뒤뚱뒤뚱 화면이 환히 보이는 사람들 쪽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나는 최면에 걸린 사 람처럼 또딸이의 뒤통수에 눈을 박은 채 따라갔다. 또딸이는 사람들 틈 가운데로 비집고 들 어가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사라지자 사방의 백열전등을 환히 밝히고 극장 일꾼들이 천막을 돌돌 감아 새끼줄로 묶고 말뚝을 뽑기 시작했다. 그런데 울긋불긋하게 화장을 한 또 딸이가 뒤늦게야 엉거주춤 일어서더니 사람들이 깔고 앉았던 종잇장들을 들추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뿔싸 나는 머리가 다 아찔했다. 또딸이는 사람들이 흘리고 간 동전이나 껌 또는 사탕 등을 그렇게 줍고 다니는 거였다. 아침잠이 없는 아이들은 장날 영화만 상영하면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서 극장터로 줄달 음을 쳤다. 사람들이 떨어뜨린 동전이나 껌을 줍기 위해서였다. 날쌔고 재수가 좋은 아이들 은 동전뿐 아니라 오원이나 십원 또는 백원짜리 지전을 주울 때도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와서 주운 돈을 자랑하고 사탕을 사서 빨고 다니면 나도 새벽 일찍 일어나서 한번만이라도 그렇게 눈먼 돈을 주워보리라 중대 결심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심을 단 한 번도 실천에 옮겨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또딸이가 그렇게 당장 뒷설거지를 하고 다니는 거였다. 나는 넋이 빠진 채로 굼벵이처럼 뒤뚱뒤뚱 돌아 다니는 또딸이를 그저 바라보았다. 나는 너무나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또딸이는 분명 모지리 바보도 아니고 미친 것도 아니 었다. 생긴 것이 좀 이상한 허천병 환자일 뿐이었다. 환자도 약을 먹거나 침을 맞아 병이 치 료되면 정상인과 똑같은 사람일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방치해놓고 불치병 환자나 천형인 문둥병 환자 취급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상한 학대였다. 조씨 문중의 장손을 치 여서 죽게 했다는 그 벌이라면 너무 잔인한 것 같았다. 과학적인 근거도 없는 그런 것에 빗 대어 한 인생을 왜곡시켜버린 것이다. 도대체 어른들이란 어디까지를 믿고 신뢰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관찰하는 게 지긋지긋해지면 살금살금 뒤안으로 돌아갔다. 살구나무에 배 를 붙이고 뒷방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알고 보니 뒷방을 가설극장보다 훨씬 재미있는 곳 이었다. 뒷방에서는 거의 매일 일인 다역의 소리극이 공연되었다. 또딸이는 정말로 굉장한 배우였다. 우리나라의 어떤 배우도 또딸이의 대사 암기력에는 미칠 수 없을 거였다. 또딸이 는 '그리움은 가슴마다' 와 '미워도 다시 한번' 같은 최근의 영화는 물론 조신과 아사녀의 사 랑을 이야기한 '꿈' 이나 '단종애사' 같은 아주 옛날에 상영한 영화도 외웠다. 일년 전에 방 송한 '저 눈밭에 사슴이' 라는 라디오 연속극도 했다. 가족들의 갈등 속에서 소아마비 소녀 가 겪는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나도 아랫방에 살짝 묻어가서 가슴을 움켜쥔 채로 빠지지 않고 들었고 라디오가 없는 언니들의 친구들도 날마다 몰려와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듣고는 소녀의 새엄마를 저주하고 증오하느라 이를 득득 갈다가 어둔 밤길을 옹송그리며 돌아가곤 했다. 그러나 또딸이가 그 방에 들어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또딸이는 날마다 추위에 사 지를 발발 떨면서 아랫방 뒤창문에 귀를 붙이고 몰래 엿들었던 게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또딸이는 언니들의 친구들도 무시로 드나드는 아랫방에도 끼여들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와 부모님이 어떤 특별한 편견 때문에 천대를 한다 하더라도 다같은 자매인 언니들조 차 똑같이 천대를 한다는 것은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 넓은 천지를 다 놔두고 하필 이면 조씨네 가문에 태어나 바로 그 살붙이들에게 천대를 받는다는 건 정말로 슬픈 일이었 다. 또딸이 때문에 나는 다시 골몰해지곤 했다. 그날은 언제 상여했는지 기억할 수도 없는 '피아골' 이라는 영화의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그런데 또딸이가 '순이동무래' 하면서 허장강의 코먹은 소리를 영락없이 흉내내고 있었다. 나를 따라다니며 뒷방 공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제남이가 킥 웃었다. 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제남이의 뒤통수를 가차없이 때려버렸다. 살구나무에 콩 얼굴을 박은 제남이가 눈을 흘겨뜨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만 주르르 코피가 흐르는 게 아닌가. 내가 놀라자 그때 에야 자기 코밑을 만져본 제남이가 으아악 비명을 질렀다. 내가 허겁지겁 장독대로 몸을 숨 기는 순간 또딸이가 뒷방문을 내던졌다. 기겁을 한 제남이는 오도 가도 못한 채 더욱 발악 을 하며 울어젖혔다. 코피를 손으로 발라내며 제남이가 죽어라 울어젖히자 놀란 또딸이가 뚱그적 뚱그적 방을 나왔다. 그리고 제남이에게 다가가더니 얼굴을 한번 들여다보고 옷소매 를 당겨 잡아서 코피를 닦아냈다. 옷소매로는 불편한지 다시 치맛자락을 끌어다가 코피를 닦고 눈물도 닦아주었다. "울지 마라. 다 큰 게 울믄 망태할아부지가 잡아다 사장나무에 걸어논다. 울지 마. 착하지 이?" 어린 막둥이동생을 자식처럼 들여다보며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었다. 제남이는 감동을 받 은 것인지 충격을 받은 것인지 울음을 뚝 그치고 또딸이의 얼굴을 말갛게 쳐다보았다. 또딸 이는 물론 울긋불긋 화장을 한 도깨비 얼굴이었다. 그러나 제남이는 도깨비 얼굴 속 누군가 를 바라보는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또딸이가 어떤 마법의 장난으로 돌하르방이 되고 말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제남이 와 나는 그 마법을 풀어낼 방법에 골몰하느라 몇날이나 살구나무 밑에서 머리를 맞대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허천병에는 역시 원없이 먹여주는 게 치료가 아닐지 몰랐다. 배가 터지도록 먹다 보면 걸귀가 놀라 도망을 갈지도 모르는 것이다. 내가 엎드린 것으로는 키가 자라지 앉자 구르듯 내려온 제남이가 할머니의 들국화 꽃베개 를 내 등 위에다 얹었다. 그러니까 나는 이불 뭉치를 깔고 엎드리고 또 등에다 베개까지 얹 은 셈이었다. 끙끙거리며 이불에 올라선 제남이가 다시 내 등을 밟고 베개 위로 올라섰다. 나는 한껏 등을 세워올렸다. "닿냐?" "이." 드디어 천장 반자 사이의 구멍에 손이 닿는 모양이었다. "있냐?" "이." 돈주머니를 찾았는지 제남이가 팔짝 뛰어내렸다. 모란꽃이 탐스럽게 수놓인 빨간색 공단 주머니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온 것이라서 이제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돈뭉치는 제법 되어 보였다. 서랍에 넣어 놓고 일이 있을 때마다 들랑날랑 꺼내 쓰는 살림 돈과는 달 리 천장에 일평생 저금해온 할머니의 전재산이었다. 그러나 일년에 한두 번밖에 꺼내보지 않기 때문에 어떤 때는 할머니 자신도 깜박 잊고 사는 돈이었다. 주머니의 주둥이를 열고 나는 손 끝에 빠닥거리는 100원짜리 지전 한 장을 꺼내었다. 제남이도 손을 넣어 100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본 다음 주머니의 주둥이를 당겨서 원래 위치에 넣어놓았다. 200원이면 소고기 한근 값이었다. 아리랑 담배는 36원이었다. 할머니는 그 돈이 아까워서 싸구려 연초만 태우며 돈을 모았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지고 장터거리에 가서 빵을 샀다. 정 부의 분식정책으로 수요일과 토요일엔 밥을 팔지 못하므로 대신 빵집이 늘어나 있었다. 한 군데서 너무 많이 사면 이상하게 여길까봐 우리는 머리를 굴려서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사 모았다. 주먹만한 찐빵이 스무 개, 시루에 쪄서 칼로 자른 밀떡이 다섯 덩어리였다. 우리는 그것을 숨겨들고 살구나무 밑을 찾아갔다. 또딸이는 그것을 꿀떡꿀떡 그리고 꾸역꾸역 단숨 에 다 먹어버렸다. 제남이가 바가지로 물을 떠다주자 다 마시고 또 한 바가지를 떠오라고 했다. "또딸아, 인자 배부르지?" "..." "배부르지?" 또딸이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나 그리 흔쾌한 답은 아닌 것 같았다. 역시 빵은 밀가 루 음식이었다. 밀가루 음식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든든하지 않다는 게 할머니의 지론이었 다. 사실인 것 같았다. 우리는 다시 고심하기 시작했다. "찰밥을 해 묵으까?" "그래, 맞다 맞어." 찰밥이야말로 속 든든한 음식으로는 으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서로 맞장구를 치 자 데굴데굴한 또딸이의 눈에서 어떤 광채가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참을 수 없는 기대와 기쁨의 빛인 것 같았다. 엄마와 할머니가 김장배추를 심으로 가고 아버지는 사장나무 그늘로 마실을 간 사이 제남 이와 나는 곳간 열쇠를 따고 들어가 항아리 뚜껑을 열어놓고 찹쌀을 몇번이나 퍼날랐다. 면 을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만든 쌀 씻는 바가지로 가득 퍼날랐으니까 10인분은 족히 되는 양 이었다. 화덕솥에다 밥을 해놓으니 커다란 양푼에 고봉으로 쌓고 넘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살구나무 밑에 도래멍석을 펴놓고 우리는 양푼을 마주하고 앉았다. 또딸이가 먹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엔 소금 간을 한 찰밥이 꿀맛 같은지 맨밥으로 마구 퍼먹었다. "또딸아, 맛있지?" "이." 게가 뻘을 치듯이 허겁지겁 먹느라 대답도 변변해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 양푼에 고봉으 로 올라온 산이 납작해져 버렸다. "행남아, 가서 된장 즘 퍼와. 쪼각지도 더 퍼오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깍두기와 된장을 한사발씩 퍼다주었다. "쪼각지 즘 더 퍼와." 깍두기를 와작와작 다 씹어먹고 국물까지 후루룩 마셔버린 또딸이가 또 사발을 내밀었다. 나는 달려가서 사발 가득 깍두기를 퍼다 주었다. 벌써 세 사발째였다. 된장은 손가락을 푹 찔러서 한 덩어리를 도려내가지고 입속에 넣은 다음 손가락을 샅샅이 빨아댔다. 깍두기와 된장에 차츰 손이 자주 가는 것 같았다. "또딸아, 맛있지?" "이. 쪼각지 즘 더 퍼와. 물도." 내가 조그만 옹기 항아리를 득득 긁어서 깍두기를 퍼다주고 다시 바가지 가득 물을 떠오 자 또딸이가 아구구 하면서 배를 싸 쥐었다. 너무 많이 먹어서 배가 터지려고 하는 모양이 었다. 양푼은 반절이나 움푹 들어가 있었다. 또딸이는 또 물바가지를 뺏다시피 꿀떡꿀떡 마 셔댔다. 그리고 옆으로 비스듬히 눕고는 눈을 감았다. 푸른색 통치마의 주름이 펴졌다 접혔 다 할 정도로 헐떡거리며 숨을 쉬는데 꼭 새끼 밴 암소 같았다. 드디어 걸귀가 또딸이를 떠 나려는 순간인 것 같았다. 저러다가 정말로 배가 터져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데 눈을 감은 채 손을 들어올린 또딸이가 또 수저를 붙잡는 게 아닌가.누운 채로는 숟가락 질이 잘 안되니까 또딸이는 맨손으로 덜컥 밥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하품을 하면서 그 밥을 입속으로 가져갔다. 제남이와 나는 양푼 뺏을 생각은 전혀 없이 그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깍두기 때문에 또딸이에게 찰밥을 해먹인 것이 곧 들통 나고 말았다. 우리 식구가 하루 세끼씩 사흘은 먹고 남을 깍두기가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다. 나는 물론 엄마한테 매를 맞았 다. 어린 것이 함부로 곳간을 열고 곡식을 퍼내는 통큰 짓을 했다는 거였다. 알고 보니 그 찹쌀은 곧 다가올 오빠 생일에 쓰려고 남겨둔 것이었다. 오빠 생일에는 언제나 시루떡을 해 서 시루째 상에 올려놓고 동사무소 욋소리쟁이네 장모인 당골네를 불러다가 징을 치며 팔양 경을 읽혔다. 전답이 다 날아가고 이제는 부자가 아닌데도 우리 집은 더욱 극성스럽게 집집 이 어른들을 불러다가 생일상을 먹이고 골목골목마다 떡을 돌렸다. 그렇게 중요한 찹쌀을 내가 뒷방것 또딸이에게 해먹여버린 것이다. 당연히 돈을 훔친 사실도 곧 들통이 나고 말았 다. 또딸이가 매를 맞으면서도 안마나 애무라도 받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인 것처럼 나도 매를 맞으면서 아무렇지 않았다. 억울하거나 슬픈 생각도 없고 후회나 죄책감도 없었다. 어 른들도 길을 잃는가 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며 산다는 걸 나는 벌써 눈치채버린 것이었다. 꼭 옳지도 않는 일에 율법처럼 스스로를 묶어놓고 고통받으며 사는 게 어른들의 삶이란 것 알아버린 것이다. 나는 돈을 훔친 것도 허락없이 밥을 지은 것도 잘못했다는 생 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또딸이가 일평생 소원을 푼 것이었다. 오빠의 생일이 중요하더라도 또딸이의 평생 소원을 푸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어느날이었다. 하교길에 우대미로 돌아오는데 노인이 지붕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나는 무조건 가슴이 철렁했다. 할아버지가 왜 지붕에 올라가는 것일까. 고추나 박속 또는 깻대를 말릴 계절은 아직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닭을 쫓으려고 낡은 지붕을 오른다는 것도 말이 되 지 않았다. 더구나 노인의 손에는 하얀 저고리가 들려 있었다. 나는 숨을 멈추었다. 초가지붕 비탈에서 다리에 겨우 중심을 잡은 노인이 한 손은 허리에 대고 한 손으로 저고 리를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날아가는 새를 부르기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애절하게 소리쳤다. "금온면 금하리 윤보연 복! 금온면 금하리에서 종일댁으로 불리는 윤보연이 복! 윤보연이 보옥!' 노인은 이내 목이 매는지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리고 하얀 저고리를 지붕 위에 펼쳐놓 았다. 복, 그것은 떠나가는 혼을 다시 부르는 소리였다. 망자가 입던 옷을 보여주며 다시 돌 아오라고 초혼하는 간절한 소리였다. 내 입에서 저절로 비명이 쏟아져나왔다. "할머니이! 할머니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을 내려오던 노인이 마당으로 뛰어든 나를 가로막았다. "아가, 할마씨 잠들었은께 들가지 마라. 아그들은 사람 자는 것 보고 그러믄 못써. 너는 어서 가서 아부지한테 소식이나 전해라. 할마씨가 금방 길 떠났은께 인사하라고. 혼이 아주 가기 전에 낙천이 그 놈 인사라도 받고 가라고." 말을 마친 노인이 손을 저으며 돌아섰다. 곧 엎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균형을 잃은 모습이 었다. 노인이 그토록 나약하고 힘없어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종일댁의 죽음은 시작이었다. 추석이 지나고 하늘이 높아지면 할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말했다. 죽기에 더없이 좋은 계 절이 왔다는 것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에 꽃상여 타고 훨훨 날아가듯 떠나는 것이 할머니의 꿈인 것이다. 할머니는 바람이 산들산들한 가을이 지나갈 때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지나갈 때마다 좋은 시절을 놓쳤다며 안타까운 시늉을 했다. 그런데 정말로 갑작스런 죽음의 그림자가 마을을 덮기 시작한 것이다. 콜레라였다. 물것처럼 지겹고 끈질기던 그 더위가 다 지나가고 추석도 지난 청량한 가을 에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발생한 것이다. 종일댁의 장례를 다 치르도록 온갖 일을 도맡았던 아버지가 다시 방바닥으로 돌아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루 종일 변소를 들락거리 던 제남이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행남이 누나야, 이것 봐라. 내 똥에서 젖이 나온다. 내 똥에서 염소젖이 나온다께." "아이 행남아아, 막둥이가 뒷간에서 뭐라고 해싼다아. 잠 가봐라." 엄마는 니찌니에게 보낼 약초를 손질하고 있었다. 틈틈이 캐다 말려놓은 것이었다. 암덩이 처럼 또딸이가 가슴에 얹힌 엄마는 니찌니마저 중환자가 될까봐 여간 조바심을 치는 게 아 니었다. "행남이 니가 제남이 신문지 조각 좀 찾아다 줘라. 지푸라기로 밑 씻기 싫은께 괜한 소리 를 늘어놓나보다." "야."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나는 군말없이 일어섰다. 제남이는 요즘 많이씩 먹는 바람에 변소 에 자주 들랑거렸다. 그래서 밑이 헐어 있었다. 나는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대로 회종이를 뜯어서 손으로 비비며 변소로 달려갔다. 회종이라도 밑씻개로는 썩은 새끼줄이나 지푸라기 보다 낫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마당을 건너 변소에 다다르기도 전에 제남이는 바지말 을 무릎께에 걸친 채 고추를 달랑거리며 어기적어기적 걸어나오고 있었다. "모지리 빙신, 똥구멍도 안 씻고 나오믄 워칙한대?" "여찌나야, 나 죽으믄 워칙한댜? 똥이 안 나오고 젖이 나오는디 나 죽으믄 워칙하냐고오." "너 죽으믄 나 혼자 맛잇는 거 다 묵고 좋제 뭐." 그러나 비 올 때 딛고 다니려고 마당에 박아놓은 징검돌에 발이 차인 제남이가 핑글 하더 니 픽 쓰러져버렸다. 두 팔을 늘어뜨린 채 허수아비처럼 가볍게 쓰러져버린 제남이는 그러 나 울음소리도 없이 그대로 기절을 한 것 같았다. 놀란 엄마가 먼저 달려왔다. "제남아 제남아, 왜 이러냐 응? 제남아 제남아, 아니 이것이 뭔 일이다냐. 어무니 어무니! 빨리 나와 보시오. 머시기, 거시기, 이질, 이질인갑소. 어무니 제남이가 이질인갑소!" "뭣이 제남이가 뭣이 어쨌다고야?" 윗방문을 내동댕이치며 할머니가 뛰쳐나왔다. 제남이를 마루로 들어온 엄마가 엉덩이를 까벌려 보이자 할머니가 당신의 가슴을 쿵 쳤다. "내 이럴 줄 알었다, 내 이럴 줄 알었어! 지 애비 약 넣어 고아 믹일라고 문어 한 마리 사 다가 살강벽에 걸어놨더니 앞문을로 들어가서 발 하나 끊어묵고 뒷문으로 들어가서 발 하나 끊어묵고, 플방구리 쥐 드나들 듯 들랑날랑하드니 아이고 기어이 일을 내고야 말었구나!" 제남이가 식은땀을 흘리며 허옇게 눈을 뒤집자 할머니가 가슴을 치며 발을 굴렀다. "행남아 막내야아! 아리대미 이대갈네, 누구냐 그 아그 이름이. 오라 문영이, 문영이네 집 에 잠 싸게 댕겨오니라. 가서 그 집 어른보고 우리 할마니가 보내서 왓다고 함시롱 앵속, 앵 속갓 따논 것 있거덩 쬐끔만 달라고 해라. 싸게싸게 담박질로 핑 댕겨오니라." 문영이, 색소폰 아저씨. 사라진 이름이 불려진 바람에 나는 언뜻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눈만 끔벅거렸다. "저누무 가시낭년 할머님 말씀 하시는디 귀먹은 것마냥 왜 그러냐잉? 아 빨리 못 가냐?" 엄마가 발을 구르자 나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그때 집모퉁이를 달려나온 또딸이가 한 손 으로 엉덩이를 받치고 뚱그적뚱그적 변소를 향해 치달려가는 게 보였다. 또딸이한테도 급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또딸이는 대낮에도 뒤안 담밑에 세워둔 오줌동이를 쓰기 때문에 변소를 자주 들락거리는 편이 아니었다. 엄마가 멍청한 눈으로 또딸이의 뒷모습을 쫓는 사 이 나는 집을 달려나왔다. 12. 바리데기 면내에 한 개뿐인 남녀공학 중학교에 꼴찌에서 몇번째로 어쨌건 합격이 되어 교복을 입게 된 나는 그러나 만사가 시큰둥했다. 나는 이 세상의 온갖 파란을 이미 다 겪어버린 느낌이 었다. 몇겹으로 싸인 생의 비의까지도 온몸으로 느껴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지쳤고 삶의 굽 이굽이를 몇바퀴나 돌아버린 늙은이처럼 새로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반만 뜬 채 걸어다녔다. 중학교 역시 초등학교보다 나은 건 하나도 없었다. 하얀 칼라를 단 교복을 입고 영어를 배우고 짝꿍이랑 둘씩 쓰던 책상을 혼자서 쓴다는 것밖에 다른 것은 없었다. 중학교는 만복 들 건너 오리 길에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좀더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것은 정말로 고역이 었다. 나는 아침을 먹지 못한 채 등교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허겁지겁 학교에 가면 책가방을 던져둔 채 갔던 길을 되돌아서 바닷가까지 모래를 가지러 갔다. 교실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 문에 교사를 신축하는 데 쓰일 모래를 퍼 나르기 위해서였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우리 때에 학생이 배로 불어났다. 전쟁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기 때 문에 1, 2년간 휴지기를 거친 다음 전쟁 복구 사업으로 집집마다 아기를 마구 낳아댔기 때 문이었다. 한 학년에 세 반밖에 없던 것이 다섯 반으로 늘어났다. 보자기를 펄럭이며 나른한 봄날 무거운 햇빛을 머리에 이고 우리는 줄을 맞춰서 억지로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유행가도 교과서의 노래도 아닌 주로 군가들이었다. '전우의 시체 를 넘고 넘어' 라든가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또는 '맹호 청룡 부대가' 등이었 다. '우리는 대한의 향토 예비군!' 하거나 '올해는 일 하는 해 모두 나서라' 하기도 하고, 전 해에 박정희 대통령이 '싸우면서 건설하는 해' 로 신년사를 발표한 이래로 '한손에 망치 들 고 건설하면서 한손에 총칼 들고 나가 싸우자' 하는 노래도 대유행이었다. 북괴가 70년대를 '무력통일 기본목표의 시기' 로 정하고 휴전선 일대에서 끊임없이 도발을 해오기 때문에 국 토의 맨 끝인 이 후방에서도 하루도 긴장이 풀리지 않게 정신무장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래만 퍼날라다 놓고 형식상 수업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집에 돌아와 저녁밥 먹기 전에 지쳐서 잠들어버리면 하루 종일 한끼도 못 먹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영양 부족으로 머리가 급속히 나빠져버렸다. 가장 곤욕스러운 것은 '국민교육헌장' 이었다. 구구단 보다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장들을 달달 외워야 했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 때 외웠던 것을 다 까먹어버렸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까지는 언제나 순조로웠다. 그러나 '나라와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하다 보면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라는 시구절이 따라 나와서는 그만 미궁에 빠져버리는 거 였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이 따라나올 때도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건너뛰어 몸 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합니다인가 다짐합니다인가 망설이다 보면 선생님 이 회초리로 책상을 치면서 나를 저주했다. 돌대가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수자처럼 돌대가리 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언덕 위의 중학교는 차츰 정이 들었다. 바깥 풍경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창 쪽을 싫어했다. 햇빛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창쪽에만 앉았다. 창밖으로는 만복들 건너 마 을 건너 놀미대미, 새벌, 그리고 큰벌과 거멍숲 너머 까마득한 바다까지가 한눈에 내다보였 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태양이 높으면 높을수록 바깥 풍경은 언제 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내가 그 안에 있을 때는 그토록 큰 세계이던 마을도 멀리서 바라 보면 사장나무를 모시고 옹기종기 납작 엎드린 게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2학년이 되어 2층 으로 올라가자 바깥 풍경은 더욱 잘 보였다. 그러나 그 풍경들 속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남포마을의 연기 오름이었다. 바닷 가 마을 남포의 옹기 굽는 굴에서 진하고 굵은 연기가 신비한 굴곡을 만들며 용오름처럼 하 늘 높이 솟아 구름 속으로 섞여드는 것이다. 나는 자주 연기 오름을 타고 오르는 상상을 하 며 내 몸의 중량을 잊곤 했다. 더구나 나는 연기 오름만 바라보면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두찌니의 딸 나대 때문이었 다. 그 반짝이는 검은 눈과 조그맣고 말랑말랑한 몸뚱이의 탄력만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달 려가고 싶어졌다. 큰언니가 철물점하는 땅딸보 남자와 사진관에서 사진만 찍는 결혼식을 올리자 두찌니에게 도 곧 짝이 생겼다. 바로 남포 옹기 굽는 집 아들이었다. 그해 초가을 창궐한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었을 때 우리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무더기로 죽 어 나갔다. 해경 초소의 헤드라이트가 미치지 않는 바다 쪽에서 잡아다 먹은 꼬막이며 바지 락 등 조개들 때문이었다. 우리 집에선 제일 먼저 제남이가 희생되었고 곧이어 아버지도 생 명을 잃게 되었다. 또딸이도 피똥을 줄줄 싸대며 쓰러졌다. 그런데 제남이와 아버지에겐 효 력이 없던 앵속갓, 양귀비가 또딸이를 살려냈다. 몇날 며칠 동안 물도 마시지 못한 채 피똥 만 싸는 바람에 피골이 상접했던 또딸이는 이후로 몸피가 적당한 정상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곧 청혼이 들어왔다. 남포에는 옹기굴이 다섯 개 있었는데 그중에 네 개는 이미 문을 닫아버렸다. 세상의 변화 는 눈 깜짝할 순간이어서 옹기의 시세가 곧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것이다. 아무데나 던져도 깨지지 않고 싸고 가벼운 고무통이며 플라스틱 그릇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 것이다. 형부네 도 농한기인 초여름에만 한차례Tlr 그릇을 빚었다. 형부가 산버덩 구덩이에서 진흙을 퍼다 가 매질을 하고 발로 짓이겨서 흙을 부드럽게 해주면 형부의 아버지가 물레에 앉아 여러 가 지 그릇을 빚었다. 형부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자전거는 잘 탔다. 그래서 장터 거리에 가설극장이 서면 울긋불긋 진하게 화장을 한 두찌니를 뒤에 태우고 산버덩 고개를 넘어와서 영화를 보고 돌 아갔다. 농번기에는 자전거로 달려와서 우리 농사를 돕기도 했다. 혼자 와서 거들 때는 저녁 밥도 안 먹고 가버리지만 두찌니와 함께 와서 거들 때는 저녁밥을 먹고 달이 높은 시간에 자전거벨을 요란하게 울리며 푸른 밤 사이로 돌아갔다. 허례허식 때문에 가정이 멍들고 나라가 좀 먹는다며 전해에 '가정의례준칙' 이란 게 선포 되었다. 그래서 원래 사람이 죽으면 삼년상을 치르던 것이 일년으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엄 마는 아예 백일 탈상으로 아버지의 상청을 치워버렸다. 상중에 언니들의 결혼식을 치를 수 는 없기 때문이었다. 임자가 생겼을 때 빨리 보내지 않으면 또 어떤 틈이 찾아들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보다 더 억울해하며 할머니가 말렸지만 엄마는 막무가내였 다. 곳간 열쇠는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벌써 넘어와 있었다.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저절 로 된 것이었다. 아마도 엄마가 장사를 시작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도 같고 아버지가 가 장의 임무를 포기한 때문인 것도 같았다. 푼돈 하나도 맘대로 못하던 엄마가 날마다 현금을 만지게 되면서 우리 집의 전권을 쥐락펴락하게 된 것이다. 엄마는 정말 사람의 한계를 넘어선 무슨 초능력자처럼 낮이나 밤이나 일을 했다. 농번기 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 때는 발이 부르트도록 장사를 다녔다. 엄마는 오빠를 끝까지 공부 시키는 길만이 우리 집이 일어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만이 엄마를 구원 하는 신앙이었다. 엄마야말로 또 하나의 할머니가 되고 가문의 수호신이 되기 위해서 일생 을 투자중인 것이다. 엄마는 어디까지나 장사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생활의 편리를 찾았다. 제일 먼저 푸새질 이나 방망이질 또는 다리미질 등 손길이 많이 필요한 광목 홑이불은 다 뜯어내버렸다. 그리 고 찬란한 모란꽃 또는 백일홍 칸나 같은 꽃무늬 화려한 나일론천으로 바꿨다. 물바가지 역 시 던져도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으로 바꾸고 나무로 깎아서 만든 설거지통도 가벼운 고무다 라이로 바꾸고 가마솥이 걸린 아궁이도 연탄 아궁이로 개조했다. 할머니는 나일론이나 플라 스틱의 편리함은 새시대의 산물로 인정했지만 연탄밥만은 질색이었다. 밥에서 가스냄새가 난다고 막 억지를 부렸다. "세상 좋아졌다드니 남말이 아니다. 잿물 빨래에 보리 대껴 밥하던 때가 언젠디 놋그릇 닦기 귀찮다고 멀쩡하고 존 그릇들 처박아놓고 푸리딩딩한 스덴그릇 비싸게 사서 부리지를 않나, 후다닥 나무 때믄 찰지고 고소할 밥을 부러 비싼 연탄에 지리한 밥을 안 맨드나, 밥을 묵자는 것인지 돈을 씹자는 것인지." 하지만 그런 잔소리야말로 우리 할머니가 아직 건강하다는 증거였다. 할머니는 어느날 저 녁밥을 먹다가 갑자기 젓가락으로 물레 잣는 시늉을 했다. 이튿날은 신발짝을 등에 없고 하 염없이 마당을 돌았다. 그리고 눈빛이 멀겋게 풀어져버렸다. 이후로 허리도 급속히 기역자로 굽어버렸다. 할머니는 해질녘만 되면 엄마가 밥을 주지 않는다고 사람마다 붙잡고 흉을 보았다. 마당 을 돌다가 돌연 성님! 시숙님! 하고 발작하듯 소리칠 때도 있었다. 할머니야말로 이승 사람 이 아니었다. 가장 큰 고역은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밤마다 불도 켜지 않은 윗방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향해 한도 끝도 없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것이다. 그 대상은 제남이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아버지와 종일댁과 노인, 또는 아주 옛날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 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그리고 증조할아버지였다. "여보, 당신 혼자만 그렇게 앞서 가지 말고 우리 낙천이 손 잠 붙잡고 가요오. 나는 이누 무 가시낭년이 무거서 허리가 다 빠질락 한다께라아." 이고 지고 친정에라도 다녀오는 길인지 할머니는 자꾸만 등을 추스르며 안타깝게 소리쳤 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점잔을 빼느라 할아버지가 시치미를 떼며 혼자서만 저만치 앞서가는 모양이었다. 똬리가 우물에 빠져서 남편이 시부모 몰래 새끼줄에 호미를 달아 건져낸 새댁 때 이야기며, 새 짚신을 엮어준 시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을 하고, 편하고 부드러운 고무신 한 번 신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 때문에 안타까워하면서 할머니는 날밤을 지고 샜다. 나는 학교만 다녀오면 할머니를 찾으러 다녔다. 정신이 멀쩡한 낮에는 지팡이를 마구 휘 저으며 밖으로만 돌아다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대개 사장나무 그늘이나 마을 어귀에 쪼 그리고 앉아 있었다. 염소수염 할아버지와 말벗을 하기 위해서였다.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원 래 마을 어귀를 가장 좋아했다. 장에 간 며느리가 돌아오는 신작로가 멀리까지 환히 내다보 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엄마는 쯧쯧 혀를 찼다. "동무들하고 말벗하고 오다가도 동네 어귀에 흰 그림자만 보이믄 아부지 나 기다린다고 줄달음을 쳐도 쌓드니 쯧쯧, 못 미덥고 한스러서 그 먼길을 워치케 갔는고." 죽은 한몰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한몰댁이 죽어버리자 염소수염 할아버지를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날 좀 잡아가라고 소리지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한테나 하고 싶은 말을 마구 해버리 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바로 그 말에 맞장구를 치러 따라다녔다. 할머니 역시 뇌 속의 어느 끈이 탁 끊어짐과 동시에 삶의 긴장이나 세상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놓아버린 것이었다. 두 사람의 주제는 언제나 10.1폭동이나 6.25전쟁이기 십상이었다. 생애 중 가장 큰 회오리 를 겪게 했던 그것에 염소수염 할아버지의 의식이 딱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야 말로 아무 두려움없이 그날의 일들을 떠들 수 있다는 사실에 희열을 감추지 않았다. 볼이 발갛게 상기되도록 목청을 높여서 서로 다투듯 자신의 지식과 기억들을 쏟아내는 것이었다. 가설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온 언니들이 자다 깨 엄마한테 서로 다투듯 영화의 내용을 재연 하던 것처럼 두 사람은 죽이 맞았다. "아이고 아자씨, 나는 지금 생각해도 자그자그하요. 경찰들ㄹ이 다 피난 떠나불고 이틀도 안 되아서 인민군 내려왔을 때, 논에 방천 고치러 간 우리 낙천이한테 쫓아가서 살라믄 빨 리 인민군 마중을 나가라고 막 발을 안 굴렀겄소오. 내가 하나밲이 없는 자식을 못 잡아 묵 어서 환장한 년이였단께라." "아이고 아짐씨, 누구는 다르고라. 마중 안 나오믄 반동으로 몬다고 한디 누군들 어쩔 것 이요오. 경찰들이 사기를 쳐갖고 사람 잡을 줄을 누가 알었겄는가라. 거 참 나주부대, 나주 부대 말만 해도 살이 다 떨리요." "그것이사 금석이 그놈이 불러들인 재앙이었제라." "내 말이 그 말 아니요오. 해방된께 지 세상 왔다고 꾕매기 뚜드리매 말채찍 흔듦시롱 옹 기 팔러 댕기다 봉께 세상이 돈짝만 했등가. 그냥 꼭지가 돌아부렀당께라. 술 퍼묵고 빈 경 찰서에 쳐들어가 막 장도를 휘두르고 지내가는 트럭을 붙잡고 권총으로 공포를 쏘매 겁을 주고 지랄을 안했겠소. 놀랜 트런 운전수가 죽어라 도망을 치다가 우슬재에서 그 나주부대 경찰들하고 딱 부닥쳤단 말이요. 해남은 좌익이 판을 친다고 일러부렀제라." "그랬제라. 그래서 그 나주부대가 우슬재를 넘자마자 짐승사냥 하드끼 사람을 그냥 눈에 뵈는 대로 다 죽임시롱 그런 사기를 쳤단께라. 지내가는 트럭 운전수 한마디에 멀쩡한 양민 을 짐승 몰 듯 몰아 부렀어라. 사람 가죽을 쓰고 그럴 수는 없었어라. 없고말고라." 할머니는 새삼 살래살래 체머리까지 흔들었다. 염소수염 할아버지와 맞장구만 치면 할머 니의 기억력은 깃을 치듯 저절로 솟아오르는 모양이었다. 구절구절 온갖 잡사까지 다 들먹 여 서로 아귀를 맞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귀밑까지 찢어진 입뿐 말라 비틀어진 명태처럼 보 기조차 무참할 정도로 꾀죄죄한 염소수염 할아버지와, 치마를 거꾸로 돌려입은 채 제멋대로 날리는 백발의 할머니를 눈여겨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얼마나 자주 읊었는지 아예 염불하 듯 줄줄잘잘 쏟아놓고 할머니는 맞소 맞소 하며 부추기는 것이었다. "해방이 됐어도 남북은 되레 갈라지고 토지개혁도 물 건너가불고, 일본이 물러가고 난께 미군정이 나서서 강제로 식량을 공출하고오, 친일하든 놈들이 처벌받기는커녕 되레 설침시 롱 양심깨나 있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유치장에 도로 가두고, 그것이 뭔 놈의 해방이냔 말이 요. 그래서 못살겄은께 뒤집어불자, 그랬든 것 아니요오? 사람이란 사람은 다 나서서 양심인 사 석방하고 친일배는 물러가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그랬는디, 난중에 알고 봉께 그날 온 나 라가 다 그 난리였드랑께. 해남만 해도 일시에 들고일어났은께 굉장도 안했제라." "아자씨 아자씨, 말은 해 뭐하겄소만 참말로 옳은 일 한다고 한 그것이 바로 사단이었단 께라. 우리 아아들이 바로 거그서 코를 뀄단 말이요오. 우리 웃집 종하랑 종구가 그래갖고 10.1폭동 주모자라고 안 몰렸냔 말이요오. 빨갱이라고라아." 할머니는 목소리를 낮추며 눈까지 한바퀴 크게 굴렸다. 그럴수록 염소수염 할아버지는 언 성을 높였다. "일반 양민이야 수도 없이 다쳤제만 경찰도 많이 다치고 봉께 전국 각지에서 좌익 인사들 이 주도를 많이 했다고 해서 10.1폭동 참가자를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였든 것이제라. 그랬다 가 전쟁이 터진 께로 과거 죄를 용서해준다고 보도연맹에 가입하라고 한께 너도나도 믿거라 하고 안했었소." 나도 이제는 그런 이야기의 줄거리라면 본 것만큼이나 환히 꿰고 있었다. 아무나 함께 어 깨동무를 했던 10.1폭동 참가자들은 뒷날 빨갱이로 몰리게 되고, 전쟁이 터지자 그것을 용서 한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보도연맹에 모두 가입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에 져 서 밀리게 된 군경들이 피난길에 오르면서 후환을 없앤다는 이유로 해남에서만도 100여명이 나 되는 보도연맹원들을 불러다놓고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유족들이 경찰 가족한테 앙갚음이라도 하면 큰일이다 해서 삼일 만에 플어주고, 여론이 어떻게 돌아간 것 인지 다음날 다시 부르니까 살려고 발 빠르게 응한 사람 60여명만 죽여놓고 떠났다는 것이 다. 그 와중에 서금석은 '하루 서장' 이라는 엉뚱한 역할을 하게 되고, 그날 '영광작전' 이라 는 전남 방어작전에 실패하고 퇴각하던 나주부대 경찰이 다시 인민군 흉내로 환영식에 나온 사람들을 모아놓고 보도연맹원들을 색출해서 모두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철저한 반공교육으로 북한괴뢰 공산당의 만행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왔다. 군경 의 그런 만행은 금시초문이었다. 더구나 나의 우주였던 우리 아버지가 아군, 우리 편의 적이 었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사건의 진실을 이해할 수 없었고 혼란 속을 헤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사실들은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다. 규칙을 위반했다고 함부로 죽고 사는 아이들 놀이도 아니겠다, 어떻게 어른들이 서로 그런 무모한 게임을 한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사건에 참가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 매도당하고, 또 용서해준다는 제도에 덜컥 올가미를 꿰고, 엉뚱한 사기극에 휘말려서 결국은 그렇게 목 숨까지 희생되고 마는,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다 큰 어른들이 우왕좌 왕하다가 길을 잃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토록 안타깝게 알고 싶어했던 사건의 전말은 그렇 게 실없고 황당하고 잔혹한 것일 뿐이었다. 충분한 논리도 치밀한 구성도 없이 잔혹한 사건 만 나열된 아주 조잡한 옛이야기 같았다. 이제는 시시해져버린 동화 한 편보다도 만화 한 편만큼도 못한 어른들의 세계였다. 인간은 어른이 되어도 완벽한 존재는 되지 못한다는 사 실을 나는 진작부터 눈치채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실망하게 되리라곤 나는 정말 상상 하지 못했다. 정말로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실없고 잔혹한 것일 뿐일까. 그토록 황당하고 조잡한 것에 인간은 평생을 다해 뼈아프고 가슴 시린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단 말인가. 삶의 비의는 물론 나는 죽음의 실체 같은 것도 이미 만나버린 지 오래였다. 나는 죽음에 대해서라면 이미 통렬한 경험을 해버린 바가 있었다. 언젠가 수자가 찾아준 종달새알 네 개는 제비집에서 정말 부화를 했었다. 어미제비가 속 아서 자기 알 세 개와 함께 품어준 것이다. 그런데 가뭄 때문에 먹이가 형편없이 부족했다. 어미제비가 힘들까봐 우리는 날마다 잠자리 파리 구더기 애벌레 지렁이들을 잡아서 막대 끝 으로 먹여주었다. 일곱 마리의 새끼들은 샛노란 주둥이를 찢어져라 벌린 채 지렁이를 단 막 대를 따라 뱅글뱅글 따라돌고 끄덕끄덕 인사를 하면서 샛노란 매스게임을 벌이곤 했다. 너 무나 귀엽고 재미이었다. 샛노란 주둥이로 덜금덜금 먹이를 받아먹을 때면 내 배가 불러지 는 것처럼 흡족한 충일감도 느껴지곤 했다. 그런 어느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종다리 한 마리가 입에 가시를 물로 땅바닥에 떨어 져 죽어 있었다. 어미가 탱자가시를 물어다 준 것이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종다리들은 그렇 게 차례로 죽어갔다. 어미제비의 본능과 결단에 어른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서 나한테 발을 굴렀다. "저누무 재앙스런 가시낭년 땜에 벨놈의 험한 꼴을 다 본다께 그냥!" 종달새들을 뽕나무 밑에 묻었다. 호미로 땅을 파고 연둣빛 비단처럼 보드라운 뽕잎을 깐 다음 차례로 묻어주었다. 오빠는 곡까지 하라고 나를 쥐어박았다. 나는 장난을 친 죄책감 때문에 그로부터 한동안 종달새 꿈을 꾸기까지 했다. 어미 종다리 가 밤마다 찾아와서 젖을 물려주기도 하고 제비처럼 빨랫줄에 앉아 곡하듯 울기도 하는 것 이었다. 어느날 밤엔 종다리들이 다시 살아서 날아가는 꿈도 꾸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처 럼 땅껍질이 꿈틀꿈틀하더니 포르르 깃을 치며 날아가는 것이었다. 땅에서 솟아난 새들은 대밭을 찾아 돌아온 되새떼처럼 하늘을 새까맣게 덮기도 했다. 얼마나 선명한 꿈이었던지 나는 정말로 종다리들이 날아갔는지 확인하려고 무덤을 다시 파보았다. 그러나 무덤을 파는 무모한 행동만은 말았어야 했다. 흙껍질을 벗겨낸 순간 거기 드러난 것은 그냥 허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던 것이다. 깃이 젖혀진 새들의 몸은 그야말로 아수라의 세계가 되어 있었다. 바늘끝으로 점을 찍어 놓은 듯한 무수한 존재들이 가득 우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새의 몸은 간데없고 구더기떼 자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소름이 끼쳤던지 죄책감도 연민도 안타까움도 송두리째 달아나버렸다. 나는 다시는 꿈도 꾸지 않게 되었다. 한마디로 오만정이 다 떨어져버렸다. 다만 죽음에 대한 완벽한 이해 가 생겼다고 할까, 죽음이란 그토록 지독한 모욕일 뿐이던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아버지의 죽음도 제남이의 죽음도 그런 모욕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었다. 실없고 잔혹한 이 세계를 떠나서도 그런 모욕 뿐이라면 인간이 란 도대체 구원이 없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토록 황당하고 조잡한 이념들의 올가미에 꿰어 허우적이다 결국은 그렇게 허무한 것으로 사라져야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슬픈 짐승인 것 같았다. 산다는 건 그렇게 부질없이 길기만 한 지루한 꿈일지도 모른다. 핍박과 수고뿐이던 조상 들의 삶도 아버지의 좌절도 잘못 꾼 나쁜 꿈인지 모르는 것이다. 노인이 왜 민들레가 보여 준 그 텅 빈 세계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지지 말라고 했는지, 종일댁의 죽음도 보지 말라고 했는지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많은 것을 보아버렸다. 미래라고 해봐야 양상을 달리한 그것들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아주 우울한 소녀였다. 공부에도 친구에게도 별 흥미가 없는 나한테 유일한 취미가 있다면 그것은 물건을 옮기는 일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자주 이 사람 저 사람의 물건과 돈을 좀더 필요해 보이는 곳으로 옮겼다. 납부금을 몽땅 잃은 급우가 발작하며 까무러치는 것도 재미있었고 엉뚱한 아이가 돈을 들켜서 교무실로 끌려가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내림이 있는 것이어서 나의 솜씨 는 언제나 완벽했다. 곡식을 퍼다가 가난뱅이 두찌니한테 갖다주는 것도 재미있었다. 함지 가득 쌀을 퍼서 이 고 심부름을 가는 것처럼 태연하게 먼길을 걸어가서 두찌니네 옹기 항아리에 부어놓는 것이 었다. 나는 아버지와 노인처럼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이리저리 가져다 나르는 맛에 중독되 어버렸다. 나는 심심하면 광주 큰언니에게도 편지를 썼다. 할머니를 찾으러 다니다가 책과 책가방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형부 몰래 목돈이 부리나케 우편환으로 날아왔다. 우편환은 곧 지전으로 바꿨다. 꼬깃꼬깃 접혀진 돈은 두찌니네 옷장 서랍에 슬쩍 끼워두기도 하고 사장나무 그늘에서 낮잠 자는 소자의 떡 벌어진 입에다 슬쩍 넣어두기도 했다. 정말로 그런 것밖에는 이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그런데 나 대가 태어난 것이다. 나대는 온 세상이 새옷으로 푸르던 유월에 태어났다. 새벌 우리 논에서 모내기를 하던 두 찌니가 갑자기 배를 부둥켜 안고 뒹구는 바람에 형부가 급하게 리어카로 실어왔는데 안방에 들어가자마자 으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난 것이다. 나대가 태어난 그날 나는 수업시간에 창밖을 본다는 이유로 교무실에까지 끌려가 벌을 서 다 늦게 돌아왔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두찌니에게 먹이려고 끓여놓은 미역국을 한 양푼 이나 훌훌 마셔버렸다. 그리고 잠든 아기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는데 빨갛고 쭈글쭈글하고 솜 털투성이인 아기가 사람 모습을 빠짐없이 갖췄다는 게 그렇게도 놀랍고 신기할 수가 없었 다. 손가락도 다섯 개씩 발가락도 다섯 개씩, 손발톱이며 마디마다의 선연한 자국까지가 완 벽했다. 이렇게 작고 여리면서 완벽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나는 아기에게 금방 반해버렸다. 문틈으로 뭔가 빛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먹성이 좋은 아기는 며칠 가지 않아 쭈글쭈글한 얼굴을 활짝 펴버렸다. 그리고 단풍잎처 럼 조그만 손발을 마구 저으며 까르르 까르르 웃기도 잘했다. 두찌니는 홍앵란, 홍지미, 홍 문희 하고 발음해 보며 아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예쁜 이름을 찾으려고 날마다 고심했다. 유명한 배우들 이름이 너무 노골적인 흉내 같으니까 복희, 훈희 등 유명한 가수들의 이름을 따보기도 했다. 임시로는 아기가 건강한 나머지 손발을 하도 나대니까 그냥 '나대' 라고만 불렀다. 그런데 손녀딸을 보게 되어 기쁜 나머지 나대의 할아버지가 장터거리에 볼일 보러 간 김에 면사무소로 쑥 들어가버렸다. 아기의 출생신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면사무소 직원이 이름을 물어도 나대의 할아버지는 준비해온 게 없었다. "집에서는 하두 나댄다고 그냥 나대라고만 부른이요이." "그라믄 가시나한테 벌릴 라는 쓸 수가 없고 비단 라로 올릴 팅께 그리 아시씨요이." 나대는 그렇게 해서 굳어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아무러면 어떤가. 나대는 그렇게 해서 저 큰 비단, 저 넓은 초록의 들판을 이름으로 얻게 된 것이다. 원 줄기인 만복천이 흘고 굽이굽 이 사천이 감아도는 저 넓은 들판, 조용하고 기운찬 초록의 물결이 또는 배부른 황금의 물 결이 넘실거리는 저 큰 들판의 아름다움을 이름으로 얻게 된 것이다. 형부는 말을 못하는 대신 힘이 무척 세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도 형부는 쉬지 않고 짚뭇을 두들겨서 새끼를 꼬고 가마니를 짰다. 망치로 탕탕 돼지우리도 고치고 김 이 펄펄 나는 돼지똥은 리어카로 퍼다가 보리밭 고랑에 거름을 주었다. 날마다 끙끙거리며 마늘밭 고랑에 똥 퍼나르는 일도 혼자 다 했다. 형부는 옹기 만드는 일보다 농삿일이 더 마 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형부는 두찌니도 무척 위했다. 남달리 굼뜬 동작이나 서투른 손길을 나무라는 법이 없었다. 아기가 똥을 싸면 자기가 먼저 후다닥 기저귀를 갈아버리고 두찌니 가 쭈물쭈물 푸성귀라도 씻으면 얼른 다가가 빠른 두레박질로 물을 퍼서 그릇을 가득 채워 준 다음에 자기 할 일을 했다. 그래서 엄마는 형부를 친 자식처럼 더욱 미더워했다. 팔남매 나 되는 적지 않은 자식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흩어져버렸지만 두찌니 덕분에 우리 집에는 다시 사람 사는 훈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이에 지친 엄마가 자주 중얼거렸다. "바리데기 효자 된다더니 옛말 그른 것 없다. 자식도 곁엣 자식이 제일인께." 나도 형부를 무척 좋아했다. 헛간에서 절겅절겅 쉴새없이 가마니 짜는 소리가 들려오면 색소폰 소리처럼 황홀하진 않지만 아버지가 거기 계신 것처럼 마음이 안정되었다. 학교에 다녀와서 나대가 남포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있으면 나는 더욱 행복했다. 밥을 짓는다거나 청소를 한다거나 귀찮은 일은 다 두찌니가 하고 나는 나대와 놀아주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 었다. 나대만 안으면 나는 사장나무 그늘로 나가 우대미 노인의 집을 바라보았다. 노인의 집은 거의 폐가가 되어가고 있었다. 여름 태풍 때 앞머리가 들렸던 초가지붕은 곧 내려앉을 듯 골이 패고 창호가 다 뜯겨나간 방문짝도 바람이 불 때마다 덜컹거렸다. 잡풀이 우거졌던 마 당엔 한낮에도 쥐새끼들이 달려다녔다. 겨울이 되어도 노인이 돌아오지 않으면 집은 곧 도 깨비 소굴이 되고 말 것 같았다. 노인은 양지쪽 풀포기가 파랗게 움 돋던 이른 봄에 떠났었다. 노인이 낚싯대를 지붕 서까 래에 붙잡아 묶자 나는 이상한 생각에 물었다. 낚시를 꺼내어 손질해야 할 계절인데 되레 올려 묶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어디 먼디 가실라고요?" 그것은 직감이었다. 역시나 노인이 조용히 나를 돌아보았다. "우리 검은눈이 할애비 속을 뚫어보는구나. 오냐, 먼디 아주 먼디를 댕겨올란다. 죽기 전 에 내 태 묻은 고향땅, 내 조상들이 대대로 살고 묻혔다는 땅이나 한번 밟아볼라고 그런다." "거기가 어딘디요." "우리 부친이 무장현, 그랑께 지금으로 말하믄 쩌어기 웃녘, 고창군 공음 사람이었은께 거 기가 어딘지 가다보믄 찾아지겄지야. 아가 너도 기억해둬라 무장현이다. 느그 증조부가 떠나 온 그것이 바로 무장현이여. 알겄지야?" 노인이 왜 남자도 아닌 나한테 그렇게 열심히 조상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 역시 궁금한 것은 지금 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 면 우리 가문의 역사는 혼란 자체가 되어버리는 거였다. 조상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경배 를 할 만큼 철저한 아버지가 불과 몇십년 된 조부의 역사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 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 창년 조씨 창녕공파의 족보에 이름이 올라가 있고 아버지는 오대조의 시제사에 한번도 빠진 적이 없으며 딸인 나도 참여의 영광을 누려보기까지 했었 다. 그런데 우리 증조부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무장현에서 떠나온 게 사실이라면 영암땅에 누워 있는 오대조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그것을 묻자 노인이 갑자기 껄껄껄 크게 웃었다. "그래, 씨종자가 있어서 바로 묻는구나. 나도 바로 답하마. 느그 증조부나 우리 선친이나 다 내림이 있는 가문에 나고 자라 동학 때도 다들 접주를 했든 사람들이다. 느그는 인근에 떵떵거리는 부자라도 접주를 햇고 우리 선친은 장대 키에 덕방이 있어서 접주를 했든 것 같 다. 그란디 느그 증조부가 역적으로 몰려서까지 무서운 집념으로 매달렸던 일이 바로 그 근 본이었다. 집을 잃고 땅을 잃고 한뎃잠을 자는 것도 다 참을 수 있제만 한가지 못 참은 것 이 바로 그 근본을 잃었다는 거였어. 아가 거그 샌나꾸 잠 집어주라. 태풍이 몰아쳐도 꼼짝 을 못하게 묶어두자." 노인은 낚싯대를 다 묶은 다음에 사다리도 달아매고 평상도 집 모퉁이에 붙여세운 다음 집기둥에 다리를 꽁꽁 묶었다. 정말로 아주 먼길을 떠날 모양이었다. 그러나 평상 다리를 다 묶어놓고 손바닥을 탁탁 털던 노인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아니다, 여그다 묶어둔다고 세월 풍상이 비켜간다더냐. 필요한 사람보러 갖다 쓰 라고 그냥 내려놔야 쓰겄다. 아가 느그는 평상이매 사다리매 다 있지야?" "예." "그래. 느그는 조부 때부터 연장이매 집기매 따습게 갖추고 사는 내림인께. 그란디 내가 아까 어디까지 이야기하더냐. 오라, 근본 이야기를 했었지야?" 사다리를 내려놓고 평상도 마당으로 다시 내다놓은 노인이 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난리통에 족보가 불타고 없는디다 고향까지 등지게 되았으니 뿌리없는 상놈 중에 되상놈 이 되고 만 것이제. 그란디 사고무친한 영암땅에서 종씨를 만나게로 일가붙이를 만난 거만 이로 느그 증조부가 많이 붙여 살았더란다. 그래갖고 일구월심 노력한 결과로 한 귀퉁이에 적을 올렸든 것이래여. 나도 우리 부친한테 들은 얘기다만 그것은 다 느그 후손들한테 근본 을 만들어줄라고 해서 있은 일이 아니겄냐. 그랑께 시제사를 잘 모시는 것도 조상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나 매한가지제." "아무리 그래도 아부지가 그렇게 까마득히 몰랐다는 것도 이해가 안되고요." "안되고말고. 모르믄 몰라도 느그 아부지도 시제사 댕김시롱 뭔인가 분명치 않은 걸 늘 느꼈을 게다. 그럴수록 더 열심히 정성을 다하는 게 바로 낙천이 성정이기도 하다만. 그라고 보믄 느그 할마님이 참말 무서운 양반이다. 열쇠는 바로 느그 할마님이 쥐고 계신께. 느그 증조부님이 돌아가실 때 혼자 된 며느님의 손을 잡고 유언을 남기셨어. 조상의 내력은 비밀 에 붙이라고. 자손 대대로 세상일에는 관여도 참여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신 게여." 아 그랬구나. 그랬다면 아버지가 모를 수도 있겠구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노인 이 껄껄 또 웃음을 터뜨렸다. "느그 아부지 젊은 시절에 정치모임에 더러 고개를 디밀라고 하믄 느그 할마님이 발굽을 재고 따라댕기매 말리는 바람에 낙천이가 거 복장도 더러 터뜨리곤 했니라. 그라고 보믄 느 그 할마님이야말로 대단한 효부고 느그 아부지도 내림 효자다. 그란디도 세상이 내버려두질 않았다만 어쨌건, 느그 오래비는 증조부님의 그 간절한 유지를 받들어야 할 것이고 그 대신 너는 들은 대로 진실을 믿어라. 그것을 믿는 것이 흉이 될지 복이 될지 누가 알겄냐만 그래 도 진실 한가닥은 제대로 전해져야 할 것 아니냐? 내가 너한테 소상히 밝히는 것도 다 그 뜻이다. 어쩌냐, 뭔 말인 중 알아묵겄지야?" "예." 내가 깊숙한 소리로 대답하자 노인이 흐뭇한 얼굴로 담배연기를 멀리 내뿜었다. 그리고 길을 떠난 노인은 봄 한철이 다 지나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어기고 여름 가을이 다 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이 고향을 찾고 조상의 흔적을 보았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젖먹이 세 살 때 쫓겨나왔던 고향은 이미 낯선 곳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낯선 곳을 헤매는 노인의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느 산모퉁이나 소나무 아래 쓰러진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몸 서리가 쳐졌다. 나는 어서 노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오빠가 대학에 떨어졌다 그래도 오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재수를 한다는 것이다. 집을 떠난 큰언니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딱 한번 돌아왔듯 오빠도 그럴 모양이었다. 오 빠는 니찌니와 다찌니의 자취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그래서 새벽같이 출근을 해야 하는 언 니들이 밥을 해서 윗목에 차려놓으면 그걸 먹으면서 공부를 하고, 하루 종일 다리가 붓도록 베를 짜고 돌아온 언니들이 저녁밥을 해주면 그걸 먹고 독서실에 가서 잔다고 했다. 아버지는 훗날 당신이 늙어 힘이 없어졌을 때 오빠와 제남이의 빽이 되라고 시찌니를 여 자인데도 무리해서 대학까지 가르쳤었다. 그러나 색소폰 아저씨와의 헛소문 때문에 엄마한 테 작대기로 두들겨 맞고 집을 떠났던 시찌니는 어떤 교회의 전도사와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개척교회 전도사는 다찌니의 표현을 빌면 전생에 예수의 사촌동생 쯤 되었 던 사람으로 아무에게나 옷을 벗어주는 게 취미라고 했다. 손목의 시계도 벗어주고 구두조 차 바꿔신고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찌니는 언니들의 자취방을 드나들며 고춧가루나 마늘 참기름 같은 엄마가 보내준 양념들을 퍼간다고 했다. 다찌니는 자주 편지를 썼다. 형제들끼리 살면서 벌어진 일들을 시시콜콜 적어보냈다. 대개 는 시찌니가 너무 이기적이고 오빠는 독선적이며 니찌니가 멍청이라서 만사에 자기가 너무 나 피곤하다는 그런 내용이었는데 골자는 언제나 서울로 완전 이주를 해서 온 식구가 함께 살자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가 성공하면 할머니 비행기 태워주고 엄마 밍크코트 사준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월남전도 끝나고 경제개발오개년계획도 순조로운지 니찌니와 다찌니처럼 공장에 다니기 위해 마을마다 도시로 나가는 처녀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설 추석의 연휴만 지나가면 한바 탕 처녀공출이 있었던 것처럼 마을마다 골목이 썰렁해지는 것이었다. 어떤 회사에서는 차를 가지고 와서 무더기로 실어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차까지 대절해서 모셔가는데도 그런 것을 기뻐하는 부모는 별로 없었다. 일자리를 얻어서 몇푼 버는 대가로 '공순이' 라는 경멸 기 섞인 이름의 신분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었다. 노동의 질과 임금의 보 잘것없음이 그들을 '공순이' 로 부르게 한 것이다. 엄마도 이제는 언니들의 '공순이' 라는 사 회적 신분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엄마는 현리에 태어나서 금하리로 시집을 오던 열아홉이 될 때까지 금온면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랬다가 죽어버리긴 했지만 귀한 아들을 낳은 다음 해에 아버지를 따라 처음으로 군내에 있는 대흥사 구경을 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절집의 웅 장함이나 부처님의 자비모습보다도 서양인 관광객이 가장 기억에 남는 구경거리였던 모양이 었다. '어떻게 보면 개댁이(고양이) 얼굴이고 어떻게 보면 오모짜(인형) 얼굴인 사람' 이 비 로드코트를 입고 걸어다니더라는 것이다. 엄마는 낯선 것이나 황당한 것을 말할 때면 언제 나 몇십년 전 그 서양인 관광객을 들먹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다찌니의 편지만 받으면 중얼거렸다. "그래 성공만 해라. 나도 밍크코튼가 비로도코튼가 입고 노랑머리 미국년마냥 팔도강산 구경 댕기자." 집이나 전답을 팔면 서울 이주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엄마는 뭔가를 새로 시작하기엔 너무 늙은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날마다 밥을 주지 않 는다고 엄마 흉을 보면서도 엄마의 보살핌을 일용양식으로 살아가셨다. 엄마는 나만 서울로 보내놓고 시댁에서도 둘째인 두찌니네와 합가하겠다는 결심을 굳혀가는 것 같았다. 나는 서울생활을 자주 그려보곤 했다. 이 곳을 떠나면 나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돌대 가리의 이 답답한 상황을 벗어나서 인생의 뭔가를 다시 꿈꾸어도 되는 걸까. 이 우울하고 답답한 나의 소녀기를 헌옷처럼 훌훌 벗어버릴 수 있을까. 우리 조상들이 갖은 핍박과 역경 을 견디어내며 역적이라는 손가락질을 훌훌 떨쳐내버렸듯 나도 간첩혐의로 끝내 인생이 굴 절당한 우리 아버지의 과거사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나는 자주 골몰해지곤 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넓은 신천지에서 아무도 의식하지 않는 익명의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저 들과 산과 숲과 바다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가 숨을 쉴 수 있을까. 저런 것 이 없는 곳에서도 내 삶이 가능할까. 그 생각만 하면 나는 자신이 없어졌다. 저절로 눈물이 고이고 가슴이 부엌 아궁이처럼 뻥 뚫려버리는 것 같았다. 저 들과 산과 숲과 바다와 하늘 까지도 그런 것들이 어쩌면 나와 일체가 아니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도 분리되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저 땅에 나는 것을 먹고 자랐으며 저 하늘을 숨쉬며 살아 왔다. 땅은 나의 육신이었으며 하늘은 나의 영혼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있었고 모든 것 이었으며 전부였다. 내 두 눈으로 아니 온몸으로 분명히 보았거니와 내가 민들레 한송이이 기도 했고 민들레 한송이가 이 세상 모든 것이기도 하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어쩌지 못할 갈등으로 고개를 흔들고 다니는데 슬쩍 다가온 미란이가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주더니 내 팔을 꼬집고 눈을 곱게 흘기면서 얼른 도망을 가버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봉투를 뜯어보았다. 나는 그것이 처음에 미란이의 편지인 줄 알았다. 여자 아이들은 날마다 얼굴을 보면서도 밤이면 새삼 길고 긴 편지를 쓰고 시를 적어보내기도 하 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으로 나와 잘 지내고 싶다는 그 편지의 주인은 미란이가 아닌 남 자 이름이었다. 이른바 연애편지인 셈이었다. 수없이 오간다는 연애편지를 나도 드디어 받은 것이었다. 윤학종이라면 1반의 반장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에선 난데없는 김한수의 이름이 떠올랐다. 김명래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다. 노랑둥이 한수는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고 까불이 명 래는 자기 외갓집이 있는 목포로 진학을 했다. 이상한 아픔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곧 이상한 낭패감이 내 전신을 휩쓸었다. 1반 반장 같은 모범생이 왜 나같은 돌대가리를 사 귀고 싶은 걸까. 지각을 밥먹듯이 하고 걸핏하면 교무실까지 불려다니며 벌을 서는 나한테 도대체 무슨 관심이 있단 말인가. 항상 졸거나 넋이 나가거나 반만 뜬 눈으로 시큰둥하게 책가방만 들고 왔다갔다 하는 나한테, 돈과 물건을 몰래 옮길 때만 오싹한 긴장과 희열로 잠깐 피었다가 곧 시들해지는 나 같은 애늙은이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는 것인가. 1반 반장 은 혹 나한테서 난치미나 백치미 같은 걸 본 걸까. 생각에 생각을 하다보니 갑작스런 분노가 솟구쳐 올라왔다. 그렇다면 이 편지는 결국 여 자로서의 나를 남자로서 상대를 하고 싶다는 그런 뜻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인간 이상 이하 그 어떤 성의 구분을 적용한 삶은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 가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또딸이가 두찌니로 승격하고 우리 집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딸 들에 대한 구박이 사라졌는데도 나는 아직 아들딸 차별을 하는 세상의 온갖 편견과 어법에 극심한 증오를 느끼는 바였다. 나는 편지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겨울방학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개학을 하자마자 마침 1반 반장이 선생님 대신 출석부를 들고 오는 게 보였다. "야! 너 일루 와봐." 나를 발견한 1반 반장이 모자 차양을 한번 들었다 놓더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다가왔다. 당황한 눈빛은 둘 곳을 몰라 헤매는데 반듯한 콧대와 선명한 입술이 아주 단정해 보였다. "니가 이 편지 보냈지?" "응." "누가 이런 걸 보내랬어. 칵! 다시는 이딴 것 보내기만 해봐, 가만 안 둘 테니. 알았어?" "..." "대답 안할래?" "알았어." 내가 발로 걷어차려고 하자 1반 반장은 그제서야 우물쭈물 대답을 했다. 그리고 돌아서더 니 윗몸을 마구 흔들면서 걸어가버렸다. 나한테 완전히 실망을 한 것 같았다. 나는 가슴 한 쪽이 이상하게 비어지는 느낌이었다. 그것은 이미 겪은 바 있는 상실감이었다. 나는 내친 김 에 신발장을 미친 듯 걷어차버렸다. 그때 복도 끝에서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나는 내 이름을 못 들은 것처럼 태연히 복도를 걸어나와버렸다. 바다처럼 넓은 운동장은 텅 텅 비어 있는데 내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야 할지 그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일은 결국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찾아오는 일로 발전했다. 담임은 금온면 출신인 터줏 대감 선생님인데 우리 오빠 언니들이 하나같이 이 중학교의 우등생이었던 사실을 알기 때문 에 나를 더욱 골칫덩이 문제아로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고심 끝에 나를 당장 3학년부터 전학을 시키려고 서둘렀다. 서울로 떠나기로 한 봄방학이 닥쳐오자 나는 날마다 나대를 안고 사장나무 그늘로 나와 서성거렸다. 주인없이 겨울을 난 노인의 오막살이는 여기저기 벽이 허물어져 뻥뻥 구멍이 뚫렸고 그 사이로 바람이 사정없이 지나다녔다. 노인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이제는 집 구실 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모습이었다. 내가 아무리 기다려도 노인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비로소 들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때 벌써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상세히 조상들의 진실을 밝혔을 것이다. 노인은 그렇게 여생의 할 일을 마쳐버린 다음 길을 떠났던 것이다. 한 많은 이 생의 마지막을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먼길을 더듬어 찾아갔던 것이다. 노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확신으로 굳어지자 나는 갑자기 마음이 조급 해졌다. 그러고 보니 노인은 엄청난 짐을 나에게 지워놓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저 들이 생 겨난 깊은 내력과 바다에 얽힌 역사의 슬픔을 나한테 고스란히 떠넘겨놓고 떠나가버린 것이 다. 노인은 내가 저 들을 지키고 가꾸는 주인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 미래 의 주인에게 모든 것들을 들려주었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이미 지쳐버린 애늙은이였다. 갈기갈기 찢어진 가슴으로는 저 바람 세찬 들 판을 달릴 수가 없었다. 나는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보아버렸고 역사의 자혹한 발톱은 내 이런 기슴까지도 찢어버렸다. 기름 발라놓은 것처럼 햇빛 부시는 저 검은 땅의 주인은, 저 한 많은 땅에 푸른 물결을 일궈야 할 주인은 더 건강하고 힘찬 영혼을 가져야 할 것이었 다. 나는 밖에만 나오면 좋아서 두 팔을 퍼덕이며 좋아하는 나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돌 도 지나지 않은 나대의 뺨에는 벌써 들바람 자국이 나 있었다. 보리밭에 북을 주던 날 손이 부족해서 나대는 두꺼운 옷과 포대기에 감싸인 채 고무다라이에 담겨 밭둑가 양지쪽에 하루 종일 놓여 있었던 것이다. 나마저 떠나버리면 나대는 리어카를 얻어타거나 아빠 어깨에 무 동을 타거나 들판에 나가서 많은 날을 보내며 자라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왠지 들판 에 서 있는 나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슬프지 않았다. 나대야말로 저 바람자국 선연한 들 판의 푸름을 이름으로 얻지 않았는가. 나대야말로 노인이 남겨놓고 떠난 저 큰 짐의 주인인 지 모른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짐을 나대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엄마가 내 내복에다 헝겊을 대서 속주머니를 만들고 있었다. 두 개짜리 방을 얻으라고 마 련한 돈을 넣어주기 위해서였다. 오빠 언니들 말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엄마는 같은 말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서울은 대낮에도 코를 베가는 곳이라고 하니까 앞 뒤 길을 잘 살 펴 다니고 몸조심하나는 말도 몇번이나 강조했다. 그러나 나는 대낮에도 코를 베간다는 그 말이 그렇게 자극적일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자기 볼일만 보면서 살아가기에 눈앞에 있는 코를 다 베어간다고 하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익명의 보장에 다름아니었다. 떠날 준비를 하면서도 나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공부를 하게 될지 언니들 처럼 공순이가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것은 그때 가서 그렇게 되어진 대로 살면 될 것이었다. 다만 그렇게 익명의 자유로 훨훨 날아간다는 사실이 설렐 뿐이었다. 노인이 지워준 짐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 아무 부담 없이 나는 듯 떠날 수 있었을 것이 다. 그동안 나의 우주이고 모든 것이었던 이 조그만 세계를 가만히 벗어놓고 되새처럼 멀리 날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이불짐과 식량은 화물로 부치고 나머지 짐 단속을 하는 동안 나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대를 안고 사장나무 그늘로 나가보았다. 들판의 내력이라면 역시 나대에게 전하는 게 옳을 것 같았다. 나대가 알아먹건 알아먹지 못하건 그것은 상관없었다. 아버지를 통해서건 어머니를 통해서건 나대는 이미 그 거인들의 피를 물려받았기 때문이었다. 젊은 시절 노인이 청오산 너머에서 가져왔다는 용의 알처럼 커다란 들독 위에 걸터앉아 나는 나대를 높이 들어올려 보았다. 하루 종일 방안에 갇혀 있던 나대는 깃을 치듯 두 팔을 퍼덕이며 좋아했다. 들어올린 몸뚱이를 마구 흔들어주자 장난을 좋아하는 나대는 까르륵까 르륵, 거의 까무러칠 듯 소리지르며 더욱 좋아했다. 어느 순간 나대의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메아리처럼 귀가 아닌 가슴에서 울리는 것 같 았다. 나대와의 행복한 시간도 사장나무 그늘의 시간도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이었 다. 이제야말로 새벌을 제대로 한번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벌을 자세히 바라보면 조상의 모습이 보인다는 건 노인의 말이었다. 보를 막고 둠벙을 내고 씨 뿌려 거두는 거인 들의 모습이 보일 거라는 거였다. 보였다. 정말로 흰 옷을 입고 밀짚모자를 쓴 키 큰 사람이 두루미처럼 느릿느릿 걸어 다 니는 게 보였다. 나는 두 눈을 심하게 깜박여서 자세히 바라보았다.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거름을 넣고 피를 뽑고 농약을 치고 땅속 물줄기를 찾아 느릿느릿 걸어다니고 있었다. 밀짚 모자 밑으로 흘러내리는 구슬땀도 보이고 검게 탄 팔뚝의 꿈틀거리는 근육까지 다 보였다. 조상이 만들어준 땅을 지키고 팔남매나 되는 자식들을 위해 피땀 흘리던 아버지의 모든 수 고와 염려와 기대와 조바심과 한숨과 아픔까지도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왈칵 눈물이 솟구쳤 다. 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이루고 싶어했던 것, 지키고 싶어했던 것들은 하늘 아래엔 마 땅하고 지당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것이 최고의 가치이고 지상의 모든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은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술의 힘을 빌려 인사불성이 된다거나 세상을 원망하며 폭력이나 욕설 등으로 이 성을 잃은 적이 한번도 없었다. 언제나 또렷한 의식으로 자신의 패배를 고스란히 겪어냈다. 내가 막상 두려워했던 것도 바로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었다. 자신의 실패를 고스란히 담은 그 무기력한 모습이야말로 몸서리가 나도록 처절한 것이어서 숨이 다 막힐 지경이었다. 순 전히 자기 의지로 폐인을 자처한 그 모습이야말로 무서운 분노의 다른 표현 같았던 것이다. 그것이 확실한 자기 의지였다는 것은 색소폰 아저씨의 화장 때 아버지가 몸소 증명했다. 마 음만 먹으면 아버지도 그렇게 깃을 치듯 얼마든지 활기찬 몸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종 일댁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또다시 온갖 정성의 몸짓을 다했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노인은 아버지를 용서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 이다. 한번 굴절된 삶의 궤적은 한계 밖의 것이 되어버렸고, 아버지는 자신의 그런 생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하다 못해 술의 힘을 빌린다거나 변명 한마디조차 없이 철 저하게 자기를 부정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끝내 세상을 용서할 수 없었고 자신을 부정함 으로써 자신을 묶었던 올가미와 궤적 뿐 아니라 온갖 체제와 규범과 가치, 세상 자체를 부 정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도 저 들판에 서 있다. 노인도 자주 저곳에서 자신의 선친을 보았던 것일까. 자기 자식들 또한 역사의 구렁창에 빠져 가슴을 치고 싶을 때마다 저곳에 아직 서 성이는 아버지를 불렀던 것일까. 그래서 자기 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라도 발견했던 것일까. 그래서 나에게도 힘들 때마다 저곳을 바라보라고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버지의 게임은 끝난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저 들판을 서성이며 떠 나지 못하는 것이다. 잔혹한 세월을 견디다 죽음이라는 허무의 모욕으로 끝을 맺어버렸지만 저곳에서 실재한 흔적이 아직도 우리의 기억 속에 또는 핏속에 온전히 자리잡고 있는 것이 다. 태어난 이상 생존의 게임은 불가피한 것이고 우리는 어차피 아버지가 물려준 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우리를 통해서 다시 살게 되는 것이다. 한번 태어난 이상 우리는 조 상의 피를 다시 살고 극복하고 완성하는 과제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아버지가 용서할 수 없었던 그러나 온몸으로 사랑했던 그 세상의 복판에 서 있는 나 를 가만히 돌아보았다. 두려움과 슬픔으로 후들거리며 짱뚱어 꿰미를 들고 가는 소녀가 보 이고 햇빛 뜨거운 모래밭에서 박수치며 뜀뛰는 소녀도 보이고 되새가 되었다는 꼬막의 신비 에 놀라서 밤잠을 설치는 소녀도 보였다. 슬픔과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기쁨과 환희의 충 일한 순간들도 함께 뒤척이면서 기억의 강물로 흐르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다시 양상을 달리한 그것들의 무위한 반복이 될지 진정한 새로운 시작이 될지 모를 자리에 서 있었다. 날이 지고 다시 새날이 밝으면 나는 새벽차를 타고 아버지가 분노했던 그리고 사랑했던 세 상의 복판으로 좀더 나아가게 될 것이었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가자 나대야." 나는 나대를 끌어안고 다시 한번 새벌을 건너다보았다. 새벌은 아직 생명의 가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검은 빛으로 낮게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머잖아 햇빛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우 내 얼어붙었던 저 땅의 온갖 슬픔과 분노는 흔적조차 사라지고 푸른 새 생명들이 힘차게 솟 기 시작할 것이다. 차갑고 사납던 바람의 기억은 그 생명들을 더욱 강하고 푸르게 일어서게 할 것이며 불불이 일어난 생명의 숲은 더욱 은성한 물결을 이룰 것이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또 여름 가을이 가고 꽃은 피고 지고. 자연의 반복은 결코 무위하 지 않다. 그것은 천연의 질서일 뿐이다. 사람도 본래는 그렇게 천연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발문 마침내 내가 없는 곳 김형경 대장장이가 쇠를 오래 두드리는 이유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수한 철분 성분만을 얻기 위 해서라고 한다. 신이 인간에게 오래 고통을 주는 이유는 그 고통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럼에도 단금질 때 쇠는 망치에 얻어맞는 통증이 너무나 생생하여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느낄 것이다. 이제 곧 순수하고 깨끗한 철이 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기쁘게 망치 세례를 받는 쇳덩이가 있을까. 인간도 그럴 것이다. 힘든 일을 겪으 며 그것을 헤쳐나가는 동안 뒤에 준비된 진실을 미리 알고 흔쾌히 고통을 감내할 사람이 몇 이나 될까.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을 알고 있다. 박정요. 그가 장편소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단금질해온 쇳덩이에서 마침내 순수한 철분 성분을 얻었구나 싶었다. 아니, 그가 얻은 철 분이 이 소설이라는 뜻은 아니다. 소설은 그저 눈에 보이는 성과의 일부분일 뿐, 그가 도달 한 더 넓은 지평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이라는 눈에 보이는 성과로써 그가 도달한 세계를 어렴풋이 짐작해볼 뿐이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데뷔하는 시상식장에서였다. 회의실을 급조해 만든 그 시 상식장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긴 당선소감을 꼼꼼하게 읽었다.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그 후 간간이 그를 만나거나 전화통화로 이야기를 주 고받거나 했다. 이야기는 주로 그가 하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했다. 그가 관심 을 가지고 있는 분야들, 불교적 참선수행이나 정신과학의 내밀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즐 겨 들었다. 그의 이야기는 늘 열정에 차 있고 드라마틱하여 듣는 이를 매혹시키는 힘이 있 다. 저녁 열시쯤 시작된 전화통화가 다음날 새벽 다섯 시까지 이어질 정도로 그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다. 최근에는 그와 여행을 한 일이 있다. 개심사를 찾아가는 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동양화를 배우고 싶어. 매화를 그리고 싶어서. 새 가지에서는 살진 꽃이 피고, 묵은 가지 에서는 맑은 꽃이 피지. 그걸 그릴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치 동양화를 그리듯 어린시절 이야기를 했다. 노란 민들레 꽃잎 속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가던 체험이며, 바닷가에 허리 굽은 노인처럼 서 있던 소나무며, 짱뚱어를 잡아 들 고 땅거미 속을 걸어오던 노인이며... 그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풍광들은 아직도 풀기가 생생하고 선연한 색채를 간직하고 있었다. 처음 넘기는 새책처럼 손 끝에 빳빳한 기운이 묻 어나곤 했다. '어른도 길을 잃는다'를 읽으며 나는 그가 바로 그 매화를 그려냈음을 알았다. 묵은 가지 에서 핀 맑은 꽃을. 이 소설은 동학혁명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저기 땅끝마을로 밀려와 자리 잡던 시기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그곳에서 일제 강점기를 겪고 한국전쟁, 전후 재건기를 거치 면서 격동과 암흑의 세월을 헤쳐온 민중들의 삶이 전개되고 있다. 무엇보다 그것을 한 아이 의 시각으로 그려내고 있어 담백한 동양화가 지닌 설화적인 분위기가 돋보인다. 사실 그가 소설을 완성했고, 그 분량이 1800매쯤 된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나는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진저리를 느꼈다. 무언가 왈칵 눈물겹고 가슴 아팠다. 이 소설의 창작기간이 그의 투병시기와 일치하며, 멀리서나마 그 과정을 지켜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2년 전부터 신장투석을 받고 잇다. 입원한 병원을 처음 찾았을 때, 신장투석을 위한 혈관 확장 수술을 받고 누워 있던 그는 무겁디무거운 내 마음과는 달리 환하고 밝은 태도로 문병객을 맞았다. 그때 내가 느꼈던 어리둥절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가 아는 상식으로는, 신장투석을 한다 함은 신장을 비롯한 생리기관의 활동 정지를 뜻하고, 더불어 심각한 정신 적 충격을 동반하며, 투석을 시작하는 환자 중에는 정신과 상담을 병행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 정오였다. 그런 내 눈에 그의 명랑한 태도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얼마 후에 그는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병이 난 이후부터 그렇게 행복하다. 심지어 수술할 때조차 즐겁고 행복했다. 몸으로 고를 받는 사람은 아프면서 깨달아야 한다는데, 이놈의 중생이 그걸 모르니까 아예 몸뚱이 한 부 분을 끝장내버린 모양이다. 그래서 더 아픈 다음에 깨닫게 하는 모양이다." 그는 속에서 시도때도 없이 일렁일렁 웃음과 즐거움이 올라온다고 했다. 투석 중 혈압이 떨어지거나 일시적으로 몸이 가라앉을 때는 성가시기도 한데, 그런 성가심도 금방 잊는다고 한다. 혼자 생각해보면 하도 힘드니까 정신이상이 됐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단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니란다. 즐겁고 행복하단다. 그는 자신의 병을 이승에서 치러야 하는 업보로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고통을 치를 만큼 치르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병원에서 치료받으면서 고통을 피해가는 것조차 실은 좋은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있다. 인간계의 차원에서만 보지 말고 인식을 영계까지 확대해서 보 면 물리적인 의학으로 고통을 피하는 것보다는 업을 정면으로 갚으며 가는 게 낫다는 생각 도 한다. 나는 모른다. 그가 행복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가 깨달은 게 무엇인지, 업을 정면 으로 갚으며 나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다만, 그가 병나기 전보다 한결 활기차고 정서 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스스로 만족스러워하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막연 히 짐작한다. 그가 어떤 고비를 넘어섰구나,. 병을 통해 삶의 한고비, 의식의 한고비, 영혼이 확장되는 한고개를 넘었구나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언젠가 그가 말한 '마침내 내가 없는 곳' 이라던 바로 그곳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씌어지기 시 작했다. "때로는 병원에 노트북 컴퓨터를 가지고 가서 한두시간, 전날 쓴 것을 읽어보기도 하고, 한두 줄 쓰기도 한다. 그러면 다음 작업과 맥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갈 수 있다. 생각해보라, 코에는 산소 줄, 팔에는 투석 줄, 그리고 무릎에는 컴퓨터 줄을 줄줄이 달고 앉아 있는 사십 대 초반의 노처녀 환자를. 사람들의 눈에는 안돼 보일 것이다. 얼마나 마음 붙일 곳이 없으 면...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야 뭐라 생각하든, 나는 행복하다." 그가 소설을 완성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오래 단금질된 쇳덩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을 연상했다. 오랜 고통 끝에 도달하는 정신의 평화 같은 것을 함께 느껴보기도 한 것 같다. 그는 아직도 병과 싸우고 있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받으면서 한편으로 민간요법들도 찾아다니고 있다. 나는 그가 실천하는 민간 요법들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황토를 수돗물에 가라앉혀 위에 뜨는 맑은 물을 마시는 황토요법, 몸안의 탁기를 빼낸다는 기 수련, 우리 조 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절대자에게 매달려보는 관음기도. 그는 한번도 기복의 차원에서 불교 를 이해한 적이 없는데 한번만 관음보살에게 빌어보겠다고 했다. 또 절하는 자세가 몸의 축 기에 좋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절을 하면 온몸의 기가 잘 통하고 특히 상체로 올라간 기운 이 단전에 쌓이게 되며 기가 풀리면서 허혈, 울혈 같은 것들이 함께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는 요즈음에는 계분요법이라는 걸 실천하는 모양이다. 닭똥 위에 희게 덮이는 가루가 일종의 백금 성분인데 그것을 복용하면 금의 기운인 폐와 대장이 실해지고, 그러면 오행의 운용상 금생수가 되어 신장과 방광의 기운도 생조를 받는다는 설명이다. 계분은 반드시 순 수 토종닭의 것만을 써야 하므로 그는 요즈음 토종닭을 치는 계사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 다. 그럼에도 그 모든 것보다 그가 가장 우위에 두는 것은 심리요법이다. 인간의 마음, 인간의 목소리가 당사자의 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이다. "마음이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면 몸이 후끈해지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얼굴이 붉어진다거 나 가슴이 뜨거워진다거나. 그것이 바로 마음이 몸을 움직인다는 증거다. 그래서 제일 중요 한 것이 마음이다. 낙관적으로, 밝은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려고 한다." 마음의 힘, 그것말고 나는 다른 짐작도 해본다. 그를 살리는 힘 중 하나는 바로 저 소설쓰 기가 아닌가 하고. 그리하여 간구한다. 이 책이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읽히기를, 그의 힘겨 운 노력에 대한 보답이 되기를, 그의 열정의 불길을 유지시켜주는 장작이 되기를.